영적인 눈이 열리는 비결// 20010415
2001-12-08 17:19:10 read : 262
주일 낮예배// 누가복음 24장 30-35절
< 청춘과 같은 신앙을 회복하세요 >
우리 교회가 있는 건물 2층에는 PC방과 호프집이 있기 때문에 복도가 더럽습니다.
그래서 건물 청소하는 분들이 아주 힘들어합니다. 벌써 몇 분째 바뀌는지 모릅니다.
최근에 새로 오신 한 분은 연세가 많은데 교회 다닌지 1년 정도 된 분이었습니다.
이틀 전에 복도에서 만나 그분이 말합니다. "목사님! 교회가 아담하고 아름답네요."
제가 물었습니다. "일하실 만합니까? 4층과 달리 2층이 지저분해서 힘들지 않나요?"
"일은 힘들긴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별로 힘든 것을 못 느끼겠습니다."
연세는 들었지만 신앙적으로는 파릇파릇한 청춘과 같은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에게도 그런 신앙이 다시 부활되기를 소원해봅니다.
교회마다 부활절이 되면 여러 행사를 하고, 여러 선물로 부활을 기념하지만
부활절에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주변에 전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 있어야 할 자리에는 꼭 있으세요 >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부활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두 제자입니다.
그래도 많은 다른 제자들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지만 두 제자는 그곳을 떠납니다.
그처럼 분노가 치밀 때 성격적으로 참지 못하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인도가 있기 전에는 복된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참으로 고생하신 고난 주간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고생과 수고를 생각한다면 한번이라도 교회에 더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새벽시간에 자리들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그것을 보면서 있어야 할 자리를 등지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두 제자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성공의 제일 요소가 무엇일까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작은 약속입니다. 물론 직장이 아니기 때문에 강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기에 그런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약속입니다.
그러한 작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가장 성공적인 자세입니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큰 약속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뢰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자산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미국 대선 때 고어와 부시 사이에 TV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그 토론에서 부시는 어떤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냥 지나갈 때가 많았습니다.
토론 후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누가 더 토론을 잘 했느냐?"
조사해보니 고어가 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지지율은 오히려 부시가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부시가 약속한 것을 지킬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폭넓은 지식, 폭넓은 약속보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조그만 책임이라도 힘써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지난 한 주간 실망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래도 우리 성도들을 믿습니다. 더욱 믿음의 축복을 주옵소서!"
어느 성도이든 때가 되면 반드시 크게 사용 받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실패한 두 제자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이 그러한 소망을 뒷받침 해줍니다.
< 부드럽게 사랑으로 감싸안으세요 >
14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쓸쓸한 모습이 느껴집니다.
그 모습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
사명을 망각한 제자들에게 찾아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며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두 제자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이 많이 있습니까?
누가 와서 "네가 정말 신앙인이냐?"라고 말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하고 너무 양심적이어서 믿음을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만들어져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서 "왜 그 모양이냐!"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가끔 구원파 교인들을 만나면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다짜고짜 질문을 합니다.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그래서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보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높은 선생님처럼 너무 다그치니까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시장에서 밝은 얼굴을 하고 "예수님 믿어보세요."라고 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면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밝게 예수님을 전파하는 모습에 참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인상을 쓰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라고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면
그 열정은 고맙지만 별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다그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너무 다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목회자가 다그치기도 하고, 성도가 다그치기도 하고, 성도끼리 다그치기도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다그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갈등과 상처와 아픔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모습으로 부족한 제자들을 다그치며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고 한 단계 한 단계 제자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러한 겸손한 사랑과 용서의 기초 위에 오늘날 우리 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이 이 사랑입니다.
<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세요 >
주님의 질문을 받고 글로바라 하는 제자가 자기들에게 벌어진 일을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오늘 이 아침 우리들의 심령에 찔림이 되길 바랍니다.
이 말씀이 찔림이 되는 순간, 신기하게도 신앙의 힘과 능력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들에게 주께서 고난받아야 영광이 된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있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비 맞는 것을 염려하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삽니까?
아직도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정말 더디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새겨보고, 더 믿음의 도리를 따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여 나의 나 됨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두려우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선진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수많은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공포가 문을 두드릴 때 믿음으로 문을 열면 문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두려움과 공포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 영적인 눈이 열리는 비결 >
결국 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고 엠마오 근처에서 여관을 잡으면서
주님께 자기들과 함께 계셔달라고 부탁을 했고 주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식사하실 때 주님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그 떡을 먹자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고 그들은 그때서야 주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는 몇 가지 비결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감사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30절에서 축사한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말인데 감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눈이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신비하게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또한 서로 감사의 말을 할 때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신앙인의 최고 인격이고,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삶이 없이는 행복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공동체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욕구불만과 시기와 질투를 가지면 절대 창조적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철이 들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감사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총을 실어 나르는 수레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 아름다운 것이 많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2. 사랑의 떡을 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낯선 좋은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분과 사랑의 떡을 떼는 순간 그들은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낯선 분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떡을 함께 뗄 때
우리의 눈을 밝아지고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정 나눔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것이며 그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에 처한 이웃을 도우십시오. 낯선 사람일지라도 도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지. 다른 사람들이 돕겠지."하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어 하나님께서 알게 한 것이 아닐까요?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말은 단순히 착한 일 하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그 길이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을 만나는 매우 소중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가족 사랑이 대단합니다. 가족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씀씀이가 아주 달라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이 가족 내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가족 개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알게 된 어려운 이웃을 봐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사랑이 가족을 넘어서면 더욱 큰 가정을 얻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긴 삼일 전에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사실을 진정으로 묵상하고, 말씀대로 자신의 사랑의 폭을 확대시켜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참 진리에 대한 눈을 뜨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이은경 집사의 골수이식 수술을 위해 1700만원이 미리 병원에 하루빨리
입금되어야 삼성의료원에서 골수이식 수술을 해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우리와 같은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감당하기 힘든 액수이지만
그런 형편을 들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 한번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전 건축은 우리의 소중한 꿈이지만 그래도 생명 살리는 일이 더 급하지 않습니까?
모아둔 건축헌금을 다 털어 넣어서라도 우리와 함께 하는 자매의 생명을 살린다면
건축헌금이 없다고 하나님이 우리의 꿈을 꺾고 우리를 초가집으로 내쫓겠습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떡을 떼어야 하고 이웃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성도임을 내세우고 주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겁고 영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이웃의 형편과 신앙과 사정을 살펴주는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 삶에 있어서 큰 의미의 행복과 축복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부자란 누구일까요? 돈이 있고, 차가 있고, 집이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닙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고, 나눌 마음이 있는 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누구일까요? 판자집에 살고, 돈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어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사실상 가난한 자일 것입니다.
물은 계속 퍼내야 샘 근원이 튼튼해지고 맑은 물이 더욱 생겨나듯이
우리도 소중한 일을 위해서 우리의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정으로 삶과 사물을 보는 변화된 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떠질 때 우리의 눈이 변화되면 이웃도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우리에게 시야의 변화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 구했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야곱은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축복을 구했는데
그 축복은 소유의 넉넉함을 구하는 축복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구하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야곱은 세상적으로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자
그는 이제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갈 길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형 에서를 만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원수였던 형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형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그처럼 내가 변화되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변화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도 나를 새롭게 만나주고 새로운 차원에서 대해주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용서하는 마음은 건강의 제일 비결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 착한 여러분들이 먼저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때로 별로 큰 일도 아닌데 화를 잘 내고 얼굴이 벌겋게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일찍 뜨고 싶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진정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의 떡을 떼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서로를 위한 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랑과 위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서로를 위해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떡, 용서의 떡을 같이 떼어야 합니다.
한때 싸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당신이 외롭고 쓸쓸할 때 내가 당신의 위로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미로운 가사입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도 좋다고 많이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에서 위로가 되어주겠다는 것의 실체는 바로 마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그 노래가 마약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종류의 마약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신비한 효능을 가진 모습처럼 다가오지만 참된 위로가 아닙니다.
우리를 이어주는 참된 위로는 서로 사랑의 떡, 용서의 떡을 떼는 것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어떤 축복, 다른 어떤 은총을 구하겠다는 것입니까?
단순하지만 사랑의 길, 용서의 길이 진짜 길인 줄 알고 그 길을 구하길 바랍니다.
물론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쉬운 경우도 있겠지만 용서는 대개 십자가를 동반하고 고뇌를 동반합니다.
어떤 여자가 잠깐의 실수로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리라 생각했는데 잘 잊혀지지 않습니다. 고뇌합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전보다 더 잘해줍니다. 그래도 죄책감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죄책감 때문에 결국 10년만에 남편에게 자기의 불륜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여보! 10년 전에 제가 잠깐 실수로 한 남자와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그러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편안하게 남편이 말합니다. "알았어. 용서할게."
그 말을 듣자마자 이 여자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과 살기 싫어요." 그러면서 막 뛰쳐나갑니다.
남편이 놀라서 뒤따라 나갑니다. "여보! 왜 그래! 내가 용서한다고 했잖아?"
그때 아내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당신의 용서는 구토가 나요."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처럼 진짜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경험을 통해야 진정 용서가 됩니다.
만약 그런 말을 들었다면 화를 내고 박차고 뛰어나가 고민하다가 며칠만에 들어와서
그때서야 용서의 말을 해야 정상입니다. "여보! 그래도 당신이 필요한 것 같소."
그처럼 고뇌가 없는 용서는 진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자리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 한번 환경을 보십시오. 인생의 먹구름이 하나씩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3. 말씀을 듣고 뜨거워질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떡을 뗀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그 순간에 주님은 신비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제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들은 순식간에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변화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주님은 말씀 속에서 현존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말씀을 진지하게 붙들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뜨거워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지하게 성경 말씀 앞에 서서 말씀을 받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생각으로 재단하지 말고, 자기 취향에 따라 변질시키지도 말고,
말씀 앞에 정직해지시고, 말씀으로 수술 받을 각오를 해 보십시오.
어떤 다른 희한한 신앙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신앙은 선전이 아닙니다.
다만 진솔하고 겸허하게, 들으려는 심정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서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으로 말씀 안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 칭찬의 대상이 되세요 >
결국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운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곧 엠마오를 거의 다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극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돌아가니까 정말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이 두 제자도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을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죽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까?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되지 않습니까?
신앙이란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끼면 하나님은 커지고 문제는 작아져 보입니다.
사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에 문제를 극복하는 법과 서로 감싸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북이 감싸안고, 동서가 감싸안고, 위아래가 감싸안는 모습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연도 감싸안아야 합니다. 자연을 우리의 종으로 여기지 말고
우리와 공생해야 할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고 우리 몸의 일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칭찬의 대상보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점은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부활절 아침에 칭찬의 대상이 되면서 살겠다는 다짐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부활절에 잠들었던 마음이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분발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깨우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떨칠 수 있는 존재로 부활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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