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28 주일설교(시편 강해 1)
복있는 사람이 된 증거를 굳게 붙들라
시 1:1-6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했지만 10대 때 신앙을 떠나 55세가 되었을 때 돌아왔습니다. [신앙론]이란 글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가 18세 되던 때, 한 친구가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편 강해를 시작하는 제 마음의 갈망입니다.
시편 강해를 시작하는 제 마음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합니다.
처음 시도하는 성경이고, 또 너무 많은 분량이기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제 마음과 영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시편을 강해할 마음을 강하게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대한 갈망이 계속 커져갑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받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변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사는 이들을 많이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책으로라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런데 가장 좋은 책이 시편이었습니다.
시편을 기록한 이들은 그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사랑하고 친밀히 교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편을 강해하게 하신 것이라 깨달아졌습니다.
저는 시편 강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생생하게 재현해 보고 싶습니다.
시편 1편은 첫 시이면서 시편 전체의 문을 여는 성경입니다. 이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이 누군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것은 시편 전체가 복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당황스러워도 대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복이 많다는 말을 들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는 복도 지질이 없어!’ 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복이 없기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정도 능력도 환경도 다 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복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런가? 예수 믿고도 되는 일이 없는데?
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에 자신이 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따금 자녀들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기가 막힙니다. 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건강하고, 먹을 것이 있고, 공부할 수 있는데, 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이 복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이 복인 줄 모르면 복을 받고도 누리지 못합니다.
복은 정말 받아야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많음 목사님들이 제 머리에 손을 얹고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 보니, 그렇게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제 삶과 사역이 이만큼 되어짐을 깨닫습니다.
저는 1990년 부산으로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갈 때,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담임목사님에게서 복을 받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 아닙니까? 목사님께서 안수하여 주시든, 아니든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 마음은 간절하였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사는 것이 다릅니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저절로 과실을 맺습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마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삶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칠고 메마른 바위 산에 심기운 나무는 어떻습니까? 몸부림을 치고 몸부림을 쳐도 과실 맺기가 어렵습니다. 과실은 고사하고 말라죽지만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런 삶이 복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느 편입니까? 확실히 “난 아니야!” 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은 형통함을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에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이 다 복된 사람들이지만 당시 그들의 형편은 말할 수 없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형편을 보고 복있고 없고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형통해 보이나 나중에 뒤집어질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어려우나 나중에 잘 될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롯과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잘 된 것입니까?
우리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같은 복을 이해하려면 1-2절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1-2절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렇습니다. 정말 복은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율법을 즐거이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악인의 꾀를 좇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결심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자리에 가있고, 또 그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어떻습니까? 뚜렷이 죄짓는 일이 싫어지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 이야기나 나누는 일이 부담스러워지고, 성경을 더 읽고 싶고 주의 일에 더 힘쓰고 싶고, 가정에 더 충실하고 싶고, 가까운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진짜 복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 주라고 한 복이 있었습니다.
민 6:22-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해지는 복, 은혜와 평강의 복입니다. 예배드리는 순간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런 엄청난 복을 받고도 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또 천국 가는 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천국 가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 늘 천국 가는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천국 갈 때 마음 조리지 않습니다. 먼 여행을 갔다가 내 집에 돌아 온 사람이 자기 집에 당연히 들어가듯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이 가까울수록 가슴이 설렙니다. 빨리 도착하면 좋겠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아버지!” 하고 쑥 들어갑니다.
그러나 천국 가는 복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깨끗하게 살고 선행을 하고 살아도 천국이 가까워 올수록 두렵습니다. 곡을 하고, 굿을 하며 죽은 이후의 길이 복되라고 용을 써도 하나님이 두렵고, 천국이 낯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고, 천국이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는 복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말씀이 고민이 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성경 읽는 것도 배우는 것도 부담스럽고 읽기 싫고 듣기 싫은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원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고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 같이 여깁니다. 원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 안에 전혀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찬송 부를 때 은혜가 되고 말씀들을 때 은혜가 되고 더 은혜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 복이 심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초등학교 교사가 하루는 시험 감독을 하다가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답안 하나를 못 쓰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 있는 아이는 썼는데 그 애는 못 썼습니다. 옆에 있는 아이가 발꿈치로 쿡 찌르고 이거보고 쓰라고 보여줬어요.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아이가 안 보려고 그러고. 쿡 찌르면 또 안보겠다 그러고. 쿡 찔러도 안보겠다고. 계속 이렇게 싸우다가 마지막에 보고 쓰더랍니다. '아이구 저 놈이 시험에 빠졌구나!' 선생님 마음이 안타까왔답니다.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이 시험 답안을 다 낼 때까지 그 애는 얼굴이 벌개 가지고 앉아 있더니, 마지막에 답안지를 가지고 나오더니 울먹이며 말하더랍니다. "선생님 빵점 주세요. 제가 하나 보고 썼습니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 "네가 복있다." 하며 울었답니다. 이런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에게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욕구가 여전히 강하여 끌려 다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4장 30절에 나오는 성령의 근심입니다.
우리 안에 이 역사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사님 한 분을 칭찬하시면서, 1년 유급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채플에 빠진 횟수가 문제가 되었는데, 교회에서 집회가 있었다고 거짓 증명서를 제출했던 일이 깨달아져서 회개한 후, 학교에 찾아가 자백하고 유급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사님이 복있는 전도사님입니다.
복 없는 사람은 거짓말을 마치 재능처럼 생각합니다. 속는 사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멍청합니까? 속이는 자가 멍청한 것입니다. 혹시 아직 거짓말을 버리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이 질문을 하십시오. '거짓말하는 나에게 하나님이 복 주실까? 거짓말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깔고 있는 나의 계획에 복 주실까?'
여러분 눈 앞만 보면 안됩니다. 거짓말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가 그 재산이 자녀들의 손에서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게 폐인으로 만드는 집안을 한두 건 봅니까?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을 더 알고 싶고 세상과는 구별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복있는 사람의 증거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 증거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연평도 북한 포격으로 너무나 마음이 무거운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전쟁인가! 그러나 이미 수없이 예언된 일이기도 함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회개하라. 은밀한 죄에서 싸움과 분열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셨었습니다. 복있는 자로 살지 못하고 멸망당할 악한 자의 길을 가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경고를 듣고도 좀처럼 회개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소식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이제는 정말 회개할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경고하신 것이 있습니까?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형통한 자가 될 복을 주셨는데,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세상을 따라 죄의 길, 악한 자와 어울리며 사니 어떻게 하면 회개하고 돌아살 것입니까?
먹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이 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아닙니다. 전쟁이 나면 번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돔 고모라가 멸망당한 것은 죄가 많아서도 그렇지만 의인 열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있는 자의 삶을 사는 것이 나라를 전쟁에서 건지는 길입니다.
죄짓는 유혹을 받으면 참여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책망하여야 합니다. “나라가 전쟁의 위기 속에 있는데 이런 일을 하고 무슨 복을 받을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모이는 [믿음으로 사는 남자]들이 처음 모였을 때, 서약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남자입니다. 아버지입니다. 남편입니다. 가장입니다.” “이제 세상 의지하던 줄을 온전히 끊겠습니다.”
“직장에서 불의한 방법으로 계약하지 않겠습니다.”
“술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먹고 사는 걱정 근심하지 않겠습니다.”
“집에서 화내고 짜증내지 않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매일 축복기도해 주겠습니다.”
“정직하고 죄 짓지 않겠습니다.” “분노를 이길 힘을 주심을 믿겠습니다.”
“정상적인 상품만 취급하겠습니다.” “손해 보더라도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법도 꼭 지키겠습니다.” “검소하게 살아 꼭 빚 정리하겠습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나의 회사를 주님을 위한 회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수요예배 금요 철야 전에 영업을 끝마치겠습니다.“
이 모든 고백들을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이제 비로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고, 복을 복으로 깨달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이 없습니까? 다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복을 복으로 여겨야 할 뿐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모두가 “나는 이미 복을 받았구나!”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계속하여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있는 자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6절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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