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5 주일 설교 (사도행전 강해 39)
부흥회에 갈 것인가?
전도집회에 갈 것인가?
사도행전 17장 16-21절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빌리그래이엄 목사님의 딸 앤그래이엄 목사가 어느 집회에 강사로 초대되어 말씀을 전하였는데, 갑자기 강대상 뒤에 앉아 있던 성가대 좌석에서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발소리가 나는 등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목사님은 설교에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리 나는 쪽에 주의를 돌리지 않고 계속 말씀을 전했습니다. 강사가 잘 보이지 않거나 소리가 안 들려서 앞자리로 옮겨 앉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끝내고 좌석으로 돌아가 앉은 후, 깜짝 놀랐습니다. 성가대원들이 절반 뿐이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성가대원들은 앤목사님이 동성애가 미국 사회의 심각한 죄라고 언급한 것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소란을 떨며 보란 듯 퇴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 분위기는 교회 안에서도 동성애를 공개적으로 정죄하면 교양 없고 무식하고 오히려 죄라고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저도 설교할 때 다른 종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언급을 하면 금방 항의하는 메일이 옵니다, “다른 종교에 대하여는 말하지 말고 그저 복음만 전하십시오.”
오늘날과 같은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인 것이 없는 시대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 너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결국 어느 종교나 다 비슷하지 않느냐?”
그래서 현대에 들어와서 전도는 정말 큰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핍박이 있기 때문에 전도가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러나 핍박보다 더 무섭습니다. 핍박은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의 반응이 더 싸늘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절대적인 존재, 절대적인 가치, 절대적인 기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덴 선교의 어려움이었습니다.
흔히 사도 바울의 아덴 선교를 실패라고 평가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녔던 도시 가운데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유일한 도시가 아덴이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세 가지였습니다. 대부분 조롱했습니다. 일부는 더 듣고 결정하겠다고 보류했습니다. 겨우 몇몇 사람만 믿었습니다.
대부분 사도 바울의 전도 기록을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핍박도 일어났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이 많았더라고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 만큼은 몇 사람이라고만 했고, 많았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아덴에서의 전도가 실패였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34절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다른 도시에는 믿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이 꼭 나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는 많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단 몇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크게 낙심시켰던 것 같습니다.
아덴에서 핍박이 유난히 심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아덴에서는 전혀 핍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음껏 전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아덴 시의 회의가 열리던 장소였던 아레오바고에서 공개적으로 전도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자신도 아덴 전도가 실패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아덴 전도는 사도 바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 전도 때 ‘너무 철학자들과 논쟁만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서신 후반부에 보면 논쟁하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딤전 6: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딤후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아덴에서 사도 바울은 철학자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아덴은 당시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도 철학에 대하여는 많이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너만 철학을 아느냐, 나도 안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른 곳에서 전도했던 것과 다르게 철학적인 접근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논쟁으로 그들을 복음에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논쟁에서 이겨 예수 믿게 하려 한다면 계산착오입니다. 졌는데 기분이 좋겠어요? 예수 안 믿습니다. “예수 믿으면 벙어리도 말하게 된대.” 하는 비아냥 을 듣게 됩니다.
아덴 다음에 간 곳이 고린도였는데, 고린도에 보낸 서신에 보면 그 당시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하면서 그가 마음에 깊은 후회도 또 그가 전도 방법에 대해 숙고했는지 거기 기록에 나옵니다.
고전 1:20-23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그가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논쟁했던 기억 때문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는 철학적인 접근 방법은 쓰지 않아야 되겠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는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덴에서 사도 바울이 ‘아, 내가 실패했구나.’ 그런 좌절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고전 2:1~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
사도 바울이 아덴 전도 후에 얼마나 낙심하고 힘들어 하였는지 짐작할 만한 구절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갈 때는 ‘나는 전도 못할 것 같아. 나 이제 전도할 자신이 없어.’ 그 정도까지 됐었다는 것입니다. 아덴에서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복음을 전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가 안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까? 핍박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아덴에서는 전혀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 마음껏 네가 해보고 싶은 말을 해봐.” 이랬던 곳이 아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기교와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과 부활의 복음을 전했던 것인데, 결과는 형편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전도할 때 겪는 일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전도해도 공개적으로 적대 행위를 당하지 않습니다. 전도한다고 감옥에 잡아가는 사람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 전도의 자유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가가.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반응은 점점 식어져 갑니다. 도무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당신들 편협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지 왜 기독교만 구원받는다고 합니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요? 당신같은 사람하고는 상종하기 싫습니다.”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것이 핍박 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사회는 변하고 있습니다. 무섭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까?
답은 새로운 전도 방법이나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시대는 바뀌었고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안되는 이유는 전도 방법이 새로워지지 않아서, 전도 메시지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 믿은 사람 안에 복음이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 복음을 아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셨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복음이 정말 진정으로 기쁜 소식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까?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바뀌었고 사람이 달라져도 전도는 항상 전도자의 마음에서부터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복음의 감격에서부터 진행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절이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달라고 먼저 요청한 경우는 없습니다. 어떤 환경도도 복음을 전해줄 때 달게만 받는 그런 사회와 시대는 없었습니다. 전도는 언제 되었는가?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에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너무 기쁜 소식이니까. 그래서 전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한 후 좌절감에 빠졌지만, 사실 아덴 전도는 절대 실패가 아닙니다. 짧게 보니까, 당장에는 받아들인 사람이 몇 사람이 안되는 것처럼 보인 것 뿐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를 보십시오. 지금의 그리스는 정교회를 사실상 국교로 하는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그리스에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국민의 98%가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대답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아덴 전도가 당장의 결실은 없어 보였지만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때, 불을 통하는 심정으로 전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아레오바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은 전부 철학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덴은 세계에서 철학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사도 바울이 철학 박사들 앞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컸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격분했다고 했습니다.
16절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사도 바울은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학문의 도시, 철학의 도시라는 아테네가 사도 바울의 눈에는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덴에 우상이 꽉 차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받은 충격을 로마서 1장 22-2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롬 1:22~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지금도 아덴 시에 가면 아레오바고 언덕에 자리 잡은 파르테논 신전을 위시한 수많은 신전의 자취들이 고스란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라고 감동하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성, 하나님 없는 지식은 결국 인간과 도시를 우상 숭배로 이끌고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학문이 발달하면 우상이 다 사라질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더 심해집니다. 학문이 발달하고 철학이 발달해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복음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면 오히려 우상숭배는 더 많아집니다. 사도 바울이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아덴에 가서 보고 그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철학이 도대체 무엇이냐 말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거의 짐승 수준이고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진노 앞에 너희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느낀 거룩한 분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2000년 전의 아테네와 너무 비슷합니다.
현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된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현대도 아니고 후기 현대,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우상의 문화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제주도에 잠깐 가있는 동안에 제주도를 둘러보다가 너무 마음이 안타까운 것이 한동안에는 제주도에 우상숭배, 잡신을 섬기는 것이 다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부 복원이 되어있습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전역에 우상숭배가 복원이 되었습니다.
1973년도에 우리나라에 정식 등록된 무당의 수가 3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5년 뒤 통계엔 무당의 수가 80만 명이라고 합니다. 70년대, 80년대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고 했던 그 시절입니다. 우상은 더 크게 퍼졌습니다. 지금은 100만이 넘는 역술인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보다 그 수가 더 많습니다. 우상숭배와 미신이 농촌이나 미개척지에만 성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 한가운데, 우상숭배와 미신이 가득차 있습니다. 웃는 얼굴로 죽은 돼지 머리가 비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식이 최고로 발달한 나라 미국에는 뉴에이지 운동이나 동성애, 마약, 사단 숭배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전자 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일본은 800만 귀신을 섬기고 있고, 온 나라가 우상 문화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학문이나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가 하는 것을 아덴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것같아도 또 사람들 마음이 싸늘하게 식은 것 같아도 정말 복음의 열정이 있는 사람, 영안이 열린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당장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 보여도 반드시 그 가운데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세상이 변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우리 안에 정말 복음의 감격이 있는가? 정말 십자가 복음이 너에게는 기쁜 소식이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기쁜 소식이냐를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안타깝습니까?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복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난 주간에 부흥회를 하던 교회에서 우주인을 만났습니다. 외계인이 아니고 1985년 나사의 우주 왕복선을 타고 우주를 다녀온 Bartoe 박사 내외입니다, 은평 천사원을 설립한 분의 동생입니다. 한국에 가면 꼭 천사원을 가보라고 해서 들렸다가 한국의 학생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학교에 연락을 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많은 초등학생들이 모여 질문이 얼마나 많은지 중단해야 할 정도였답니다. 우주에만 한번 갔다 와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말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것 같아도 사실 마음에 갈급함이 굉장히 큽니다.
우주에 갔다 온 정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3층천을 다녀온 사람입니다. 우주하고 비교가 됩니까?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온 사람입니다.
고후 12:2-4에 사도 바울이 3층천에 갔다 온 이야기를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합니다.
“...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지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눈이 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듣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가슴이 그렇게 안타깝고 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철학자들 앞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정말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3층천에 올라가서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땅끝까지 전해지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지 그 비밀을 듣고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덴에 들어가서 아덴의 학문이 나 철학에 놀란 것이 아니고, 아덴이 우상숭배하는 기가막힌 현실에 대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사람들이 망할 짓을 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날마다 시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전도했고 아덴에서 철학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가슴에 불이 있고 복음의 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 전도의 열쇠이지, 전도 방법 새로운 전도 메시지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저도 사도 바울처럼 3층천에 올라갔다 오면 사도 바울 같이 전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3층천에 올라갔다 오고 난 다음에 전도 안하실 분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3층천에 올라갔다 온 것보다 더 우리는 더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덴 사람들이 공부도 많이 하고 철학자들인데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또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실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조롱하였습니다. 그것이 아덴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저와 여러분들은 이 말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유식하고 철학적인 아덴 사람들도 안 믿어진다는 이 복음을 지금 우리는 마음으로 믿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것이 믿어지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이 믿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3층천에 올라간 것이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이 놀랍습니까? 잠깐 3층천에 올라갔다 온 경험을 한 것도 놀랍지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이런 기적이 우리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복음 안에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우리가 경험하고 누리고 살면서도 전도가 안된다고 하면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전도가 안될 수가 없습니다. 전도가 안되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복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가 안된다면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말쟁이라고 비웃고 야유하는 무리가 있고, 개독교로 폄하하여도 전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진정한 복음,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기쁜 소식이 있습니까?
만약 전할 기쁨이 없다면 전도를 할 사람이 아니라 전도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줄 알았는데 전도가 안된다, 전도가 부담스럽고. 그러면 아직도 복음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번 전도 집회에 오십시오! 초청합니다. 구도자 입장에서 다시 진지하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복음을 안다면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정말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복음을 알고 누리고 있다면 힘써 전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기쁜 소식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전해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다 못해 우스운 이야기 하나만 들어봐요. 밥 먹을 때도 그 이야기하고 친구 만날 때도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만 알아도 말 안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내가 정말 기쁜 소식인 복음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말을 안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따돌리고 이상하게 보아도 나는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은 잘해. 아마 한강에 빠뜨려도 살 거야. 입은 뜨니.” 이런 식으로 우리를 험담을 해도 내안에 진짜 기쁜 소식이 있다면 복음이 정말 구원의 복음인 줄 안다면 내게 욕을 하는 사람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되어있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그렇게 기쁜 소식인 줄 알면. 우리가 새가족들을 양육할 때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그런 과목을 전합니다. 예수 믿으면 정말 행복해지니까.
그런데 “나는 예수 믿었는데 행복하지 않은데요.” 이런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번 전도 집회 때 오십시오. 겸손하게 복음을 다시 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어도 행복하지 않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것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뭔가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11월 7일, 11월 14일 전도집회 때 자리 마련해 드릴테니 다시 복음을 들으십시오.
군목으로 임관하여 부대에 부임하여 갔더니 연대장 지휘관이 교회에서만 설교하지 말고 내무반마다 다니면서 인격지도를 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지만 한 두 군데 다녀보고는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병사들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갖는 이도, 불만이 가득한 병사도, 눈을 감고 있는 병사도 있었고, 대부분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TV도 보고 싶고 빨래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는데 귀찮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교회에 예배 드리러 나오는 병사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 그때 ‘나에게는 진정한 기쁜 소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알지만 ‘야, 너희들 이것 좀 들어 봐, 정말 놀라운 소식이야!’ 하지 못하는 제 마음을 알았습니다. 복음이 지식이지 기쁜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고민 중에 차라리 인격지도를 가지 않는 것이 병사들을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사들 중에 군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한번도 복음을 제대로 들을 기회가 없을 형제들이 많음을 알았습니다. 군에 왔기 때문에, 믿음의 지휘관이 있어서, 그래도 군목이 있는 부대라 한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가지는 것인데, 내가 부담스럽다고 그만두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주어진 기회인데. 듣기 싫어해도 전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 안에 있었습니다. 제가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정말 가슴을 칠 수 있는 뜨거운 생명의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목사가 듣기 싫어하는 형제들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눈물을 쏟아가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예수 믿어야 되는 이유를 증거할 수 있는 준비가 내게 없더란 말입니다. 정말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솔직해졌습니다. “하나님, 이 주어진 기회가 엄청난 기회인데, 솔직히 듣기 싫어하는 형제들 앞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할 감격이 없습니다. 알고 있는 복음은 있지만 그것 전하다가는 다 졸고 인상이 어그러질 것 같습니다. 어설프게 복음을 전했다가는 반발심만 살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30분 시간은 얻었는데 돌덩이같이 굳어있는 마음이라도, 끝날 때는 녹아지게 해주십시오. 끝나고 난 다음에 목사님이 와서 괜히 시간만 뺐고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갔다. 이러면 안되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복음은 능력이 없는데 이런 복음은 복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게 복음의 감격을 주세요. 제 마음에 불을 주세요.” 하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부터 저는 불신자가 전도 받는 심정으로 다시 복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깨달아지고 누려지는 복음을 병사들에게 전하였고, 나중에는 인격지도 잘한다고 군단장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그것이 제 말씀 사역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만 알고 그치는 복음이 아니라 진정 기뻐 전하게 될 복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누구나 사도 바울 같은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정말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단 하나, 여러분이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이라고 했는데,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기쁜 소식이 되도록 구하지 않으니까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우스개 소리처럼 말씀 드렸지만 내게 복음의 감격이 없고, 정말 행복하지 않으면 부흥회에 갈 것이 아니라 전도 집회부터 가야 됩니다.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품고 있는 전도 대상자가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그에게 눈물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시대가 바뀐 것 같아도 사람이 변한 것 같아도 불이 있는 성도가 하는 전도에는 반드시 역사가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감격으로 복음을 전게 해 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제 심령에 불을 주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정말 기쁜 소식 그 자체가 되게 해주옵소서. 제 눈을 열어서 사도 바울처럼 눈을 뜨게 하시고 복음의 뜨거운 감격과 은혜를 제 심령에 부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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