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13 주일설교 (사도행전 강해 33)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이 역사하신다
사도행전 14장 19~28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
어느 목사님께서 전방 부대 군목으로 계실 때, 그 지역에 변변한 식당이 없었답니다. 낮에는 식당을 하고 밤에는 술집을 하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군목 모임을 해도 그 식당에서 모일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식당 종업원으로 있는 한 자매가 군목들이 모이면 잘 섬겨주었는데 알고 보니 빚에 매여 밤에는 술집에 일하고 있으며 그녀가 어릴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답니다. 그래서 군목들이 모일 때 특별한 마음으로 잘 섬겨주어서 목사님들도 너무 마음이 아프더랍니다. 그녀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와서 인근 부대 군목들과 의논하여 월급을 모아 식당 주인에게 그 자매를 풀어주라고 부탁을 하고 이야기가 잘 되어서 그 자매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6개월 후 그녀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안타까와 만나 보니 고향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농사 짓고 빨래하고 지긋지긋한 가난한 삶이 너무 고생스럽고 따분하고 재미없어서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같은 삶에서 건져낸 복음의 능력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인가 목사님들이 너무너무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환란도 이길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환경과 죄에서 구원해 내시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은혜를 받게 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고생이 가슴 깊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장애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켰던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될 정도로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사도 바울에게 돌을 던지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돌로 쳤는지 사도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 던졌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이런 고난은 처음 당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과 비통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묵상하다가 울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바울이 고통, 마음의 애통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 상황을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 언급하였습니다.
“힘이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으니” 사도 바울은 그 날 죽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후 바울은 믿어지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그 다음 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250리가 떨어진 더베로 가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도 바울이 무엇에 사로잡혔나 봅니다. 그렇게 죽도록 돌에 맞아 죽게 되었는데 그것도 전도하다가 그랬는데, 다시 전도할 마음이 어떻게 생기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하루 밤 지나고 250리길을 더 가서 어떻게 전도를 하나요?
그 뿐 아니라 얼마 전 죽임을 당할 뻔한 루스드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울이 당한 환란으로 인하여 혹시 마음이 흔들리고 시험 들었을지 모르는 제자들을 권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럴만도 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돌에 맞아서 죽어갑니다. 그것 보고 예수 믿을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시 루스드라에 와야 됐습니다. 와서 예수 믿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믿음에 굳게 서있으라고 권면하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이렇게 환란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무엇엔가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돌에 맞을 때, 스데반 집사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주동이 되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였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으면서 아파서도 울었을 것이고 스데반 집사에게 너무 미안해서도 울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다시 전도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은 아파서 누워있을 자격도 없다는 그런 마음이겠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은 시작부터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5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 여행을 떠나보내라고 하신 분이 성령님이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그들을 선교사로 보내라고 성령님이 직접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 여행은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성령님은 계속 역사해 주셨습니다.
말씀도 성령님이 하게 하셨고 기사와 이적도 성령님이 역사하여 일으키시고 이방인들도 성령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을 사도 바울은 놀랍게 경험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 보고한 내용을 주목해 보십시오.
27절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사도 바울이 자신들이 나가서 전도했지만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는데 그것도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마음이 문이 열린 것도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어도 마음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전도, 된다! 교회, 세워진다. 이방인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역사하신 예수님을 너무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을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충만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우리 가정에 우리 인생 가운데 그 일을 시작하신 우리 주님이 그 일을 능히 완성시키실 줄로 확신합니다. 이 확신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명의 길, 분명히 힘듭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명의 길이 단순히 어렵기만 했다면 사도 바울도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명의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사명의 길을 가는 자만이 누리는 엄청난 복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어려운 길, 돌에 맞아 죽을뻔한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또 전도자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도록 돌에 맞는 일이 끔찍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는 더 놀랍고 더 뜨겁고 더 좋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역사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처럼 행복하게 살아간 사람도 없습니다.
그의 인생 마지막 때, 그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
우리 중에 이렇게 고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죽는다면 그런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사명의 길이 힘들다, 나는 그런 길 못 가! 먹고 사는 것이 너무 바빠서. 그래서 잘 살았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이제 죽음을 눈 앞에 두면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산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은 것,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그렇게 고생 많이 하고 살았는데도 하나님 앞에 가서 보고할 것이 없어! 그런 아쉬움 밖에 남지 않는 삶을 대부분 사람들이 삽니다.
그런데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뻔 했던 사도 바울이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삶이 단순히 고난의 삶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명의 길이 고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고생만 하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래서 사명자들이 사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 충만하고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지만 어떻게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고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부러운 것입니다. 그 비밀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에서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그 교회를 맡으라는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교회 장로님같은 분들이 아닙니다. 장로라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새신자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믿은 그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가 될 만한 분들을 뽑아서 장로로 세운 것입니다. 장로라는 말은 이제 교회를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핍박 당하는 교회입니다. 순교 1순위가 바로 장로입니다. 성경도 없고, 신학교도 없고, 이웃 큰 교회도 없고, 핍박을 받는 상황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교회를 맡깁니까? 사도 바울이 끝까지 있어야지 어떻게 장로들에게 맡기고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맡길 수 있겠습니까? 또 맡긴다고 맡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연약한 사람을 장로로 세워 그에게 핍박 당하는 교회를 맡긴 것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사도 바울이 각 교회에 장로를 세웠던 이유는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연약한 믿음을 가진 초신자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핍박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정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분명하고 예수님이 정말 마음에 계신 것을 알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면 예수님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교회에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지만 복음을 전해야 될 곳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 교회를 맡기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같이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책임져 주세요. 이 사람을 써주세요.” 그렇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정말 연약한 사람을 장로로 세워 교회를 맡겼지만 실상은 예수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일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께 맡겨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 교인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26절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당시 복음을 전하려고 떠나는 선교 여행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거지 순례 전도입니다. 먹을 것 잠잘 곳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힘으로 이들을 파송합니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그들을 오직 주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보내라고 하시니 우리가 보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슨 선교비를 제대로 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따라다니면서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이 두 사람이 소 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닐 때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함께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을 책임져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주님께 맡기고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받고 사도 바울이 떠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매 순간 경험한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하여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세워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교회에 한 사람을 장로로 세우고 “예수님이시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다 가르치실 것입니다. 무슨 말을 전할지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골 1:29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을 세울 때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사람은 연약하여도, 주님께 다 맡기면 주님이 반드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루스드라의 교인들이 시험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돌에 맞아 죽을 일도 생깁니까?” 하나님을 살아계시다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시라고 전도하던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서 죽도록 된 것을 보고 예수 믿을 마음이 다 없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시 루스드라에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자에게 환란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말했습니다.
22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마귀는 복음을 방해하려고 발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을 때 어려움이 생기고 전도자에게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제자들에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환란보다 더 크신 분임을 확신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직 임마누엘하시는 주님을 믿고 기도하고 다 맡기면 됩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돌에 맞아 죽는 것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목사님, 제 심정이 꼭 그와 같습니다. 정말 돌에 맞아 죽는 것 같아요. 소망이 다 끊어졌어요.”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한 가지만 확인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신 것이 사실입니까?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정말 믿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신 것을 보니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이 맞습니다. 성령님이 이끌지 않았으면 어떻게 여기 왔겠습니까? 예수 믿을 생각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십니까? 아멘입니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 예수로 삽니다. 이 믿음이 분명하면 여러분 인생을 예수님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사도 바울도 돌에 맞아 죽을 지경까지 갔지만 그를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듯이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최근 우리 교회 여선교회 연합회에서 소래 포구의 건축 중인 한 교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모님의 간절한 편지를 읽고 너무 많이 밀려있는 지원 요청에 마음만 답답해, 여선교회 회원들이 한번 가보시라고 했습니다. 가보니 도와야 할 마음이 간절해 돕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 사모님이 지난 목요일 오셨습니다. 소래 포구 근처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 길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전 교인들이 40일 작정 기도에 들어갔답니다. 기도 중에 목사님은 에스겔이 로뎀나무 아래 있는 것 같은 심정으로 까마귀를 통해 떡과 물이라도 보여주세요. 했으나 마치는 날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40일 기도가 마치는 날 우리 교회 여선교회 회원들이 떡과 수박을 들고 찾아간 것입니다. “떡과 물”이었습니다. 건축비보다 더 감사한 것은 떡과 수박이었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하나님의 사인이 왔기 때문입니다. 온 교인들이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돌에 맞아 죽을 지경”처럼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루스드라의 장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고난 당하는 교회를 맡았습니다. 어떤 사명도 결국 주님이 역사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우리가 확인할 것은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을 이 예배에 나오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믿을 마음을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이 아니하시면 누구도 하나님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 확인할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주님이십니까? 아멘입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말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 인생을 맡긴 사람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환란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계속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선교 단체 YWAM(국제 예수전도단) 설립자 로렌커닝햄 박사가 쓴 "네 신을 벗으라"는 책에서 처음 예수 전도단 선교 단체를 설립하려는 부름에 순종할 때,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목사직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좋은 교회도 포기하고 친척이 제안하는 수백만 달라 규모의 사업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교단 본부에 가서 목사직을 내어놓고 아내 달린과 함께 돌아오는데 고속도로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깨어나니 온 몸에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의식을 찾고 보니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아내 달린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내 쪽으로 기어가서 보니 달린은 이미 호흡이 멎어 있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다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로렌, 이래도 여전히 나를 섬기겠느냐?’ 로렌은 사막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예 주님, 그래도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이제 제 인생에 남은 것이라고는 목숨 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취하실 수 있습니다." 잠시 후 주님의 말씀이 다시 들려 왔습니다. ‘달린을 위하여 기도하라!’ 달린이 죽었다고 생각하였는데, 달린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니 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달린이 숨을 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차가 마을로 가서 의사와 구급차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내는 여러 날 수술을 받고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로렌은 그 날 이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겨버렸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며 세계적인 선교회를 이룩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워서 기도를 해도,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기도도 힘들고 응답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따라 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따라 오셔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다는 말은 하나님이 앞장 서시고 나는 따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위하여 “오늘 도와주소서! 주여 설교할 때 역사하소서.” 하는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설교는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잖아? 왜 내 일인 것을 주님이 도와주시는 것처럼 기도했을까? 그 다음부터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주여 저를 통하여 역사하소서. 저를 통하여 하실 말씀을 하소서. 주님의 마음을 주소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주님의 말씀만 전하게 하소서.” 그 때 주님의 영감을 얻습니다.
친구 김상현 목사님이 개척 교회 시절 이야기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너무 어려워 교회에서 매일 철야 기도할 때, 주신 응답이 뭔지 아십니까? ‘교회 부흥을 네가 더 원하니? 내가 더 원하니?’ 그 때부터 확신이 생기더랍니다. 교회 부흥 시켜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구나. 그것은 하나님이 더 원하시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이 교회 부흥 시키시려고 하시는데,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하나님이 엄청나게 그 교회를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어려운 문제 속에서 당하는 고통이 다 주님께 맡겨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 인생을 여러분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정동섭 교수님 이영애 사모님이 둘째 아들 간증을 하셨습니다. 오래 전 7, 80년대 일인데 그 아이가 꽁지머리를 하고 교회를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당시로는 난리도 아니지요. 목사 아들이 꽁지머리를 기르고 나오니 사람들이 다 수군수군 하더랍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가 아무리 간절하고 애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주님께 맡겼답니다. “너 그 머리 하고 싶으면 해라.” 그러면서 속으로는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세요.’ 이 아이가 스스로가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야단쳐서 될 일이 아니더랍니다.
그런데 부활절 성극을 하는데 예수님 역할을 할 긴머리인 사람을 찾다가 그 아이가 예수님 역할을 맡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십자가 달리는 연습을 스무 번도 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한번하고 두 번 하다가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금식을 하더래요. 연극 연습하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역할을 하는데 그렇게 울더랍니다. 그 후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군대 갔다 오고 다시는 머리 기르지도 않더랍니다. 요즘에는 머리 길러도 멋있지요?
여러분, 주님이 저의 마음에 주셨던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도 바울처럼 돌에 맞아 죽어가는 것 같은 심정인 사람이 오늘 완전히 주님께 맡기므로 살아나는 것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틀림없이 오늘 이 시간에 그런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도하실 때 “주님, 더 이상 제가 방황하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 다 맡깁니다.” 핍박 당하는 교회 장로로 뽑힌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두렵고 힘들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께 맡기고 감당했습니다. 두려운 사명 앞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하실 것입니다. 맡기면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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