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롬 5:1-4

by 【고동엽】 2023. 1. 24.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

2002-11-21 10:12:45 read : 9715

 

5:1-4 // 2002-11-21

< 자신에 대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

 

어느 날 한 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덫에 빠뜨리는 여러 도구를 팔려고 내 놓았습니다. 진열대 위에는 불평, 질투, 탐욕, 증오, 상처, 분노, 음욕 등의 도구가 있었고 거기에 각각의 가격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한 가지 도구만은 '팔지 않음'이라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한 귀신이 사단에게 물었습니다. "선배! 왜 그것은 팔지 않죠?" 그때 사단은 "이 도구는 사람을 망하게 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어서 절대 안 판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도구가 무엇일까요? 바로 '낙심'이라는 도구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낙심하면 유혹과 죄에 잘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위로를 주는 이상한 것들, 즉 독주와 마약, 이단 종교, 심령술, 쾌락주의, 허무주의 등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은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낙심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핵심 요소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죄가 내 안에서 여전히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느끼는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때로는 믿는 사람 같지 않게 엉망으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기뻐합니까? 예배 잘 드리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남편에게 짜증을 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기뻐합니까?

 

우리의 사는 모습만 보면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은 의문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마치 망나니처럼 행동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보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대개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죽은 다음에 천국에는 가지만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망나니처럼 행동하면 그 순간만은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우리가 살면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라는 말입니다.

 

< 언제나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

 

그러면 어떤 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말도 안됩니다. 만약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의롭다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진짜 망나니처럼 살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믿음도 희미하고, 정신도 병든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진정 받아들인 사람이 정말 망나니처럼 행동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목사님! 그 사실을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까 오늘 밤 캬바레 가서 한바탕 쏴야지!"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목사님!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하니 이제 마음이 놓입니다. 이제서야 지긋지긋한 아내와 맘 편하게 이혼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당신이 저의 행위와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그 은혜에 감사해서 저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습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은 진실로 믿으면 죄를 더 짓기보다는 오히려 죄를 더 안 지으려고 애쓸 것입니다.

 

자녀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부모들은 다 이런 심정일 것입니다. "얘야! 나는 네가 무엇을 하든지 항상 너를 사랑하고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자녀가 "! 정말 그래요! 그러면 저 이제부터 마약 할래요! 그래도 사랑할 거죠!"라고 하겠습니까? 부모님이 나를 언제나 변함없이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부모님을 더 사랑하고, 더 부모님 뜻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위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의롭다고 해주심을 진정으로 믿으면 우리는 망나니처럼 행동하기보다 반드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더 애쓸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고 거부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기댈 곳이 없어지고 삶의 용기를 잃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영혼에는 큰 상처가 생길 것입니다. 결국 그 상처를 위로 받으려고 독주와 마약에 빠지고, 이단 사설에 현혹되고, 미신에 현혹되고, 각종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어떤 잘못된 행위를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만큼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믿는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마음을 레이더로 탐지합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율법대로 순종하며 살았는가? 내가 하지 못한 일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끊임없이 분석합니다. 그러면서 내 행위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를 저울질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완벽한 행위는 없습니다. 성경은 "다 치우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했느냐?"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깊이 깨달을 때 우리도 은혜가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 은혜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고전 장발장 >

 

우리가 잘 아는 빅톨 위고의 소설 장발장은 은혜의 소중함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장발장은 가난해서 빵 한 조각을 훔쳐먹은 죄로 19년간 감옥생활을 합니다. 그때 교도관 중에 자베르라는 형사가 있었는데 그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법만 있었고 자비는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법과 정의의 하나님이었고, 인생은 법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무엇인가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마침내 장발장은 법이 지배하는 감옥에서 19년만에 나옵니다. 그러나 법의 영향력아래에서 마음이 차가워진 전과자를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는 잠잘 곳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이 신부님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를 안으로 불러들여 먹이고 재워주는 은혜를 베풉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장발장은 은혜를 배우지 못한 19년간의 감옥생활로 생긴 본능을 못 이기고 신부님의 은촛대를 훔칩니다. 그리고 곧 경찰에 붙잡힙니다. 경찰이 신부님에게 장발장을 끌고 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이놈이 신부님의 은촛대를 훔쳤지요?" 그때 신부님이 말합니다. "훔치다뇨? 그 은촛대는 제가 준 것입니다. 다른 것도 더 주려고 했는데 그것들은 놓고 갔어요."

 

경찰이 떠났습니다. 장발장은 그에게 자유와 기쁨을 준 신부님 앞에 혼자 남았습니다. 신부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 일의 의미를 아십니까? 저는 지금 방금 당신의 영혼을 샀습니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가서 당신 원하는 대로 사시오." 그 말을 듣고 장발장이 어떻게 합니까? "! 신난다! 신부님! 끝내주는데요! 이제 신부님 말씀대로 저는 가서 망나니처럼 살께요."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도 정신병자요,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거의 정신병자 수준일 것입니다. 장발장은 신부님의 말을 듣는 순간, 털썩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신부님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후 그는 다른 도시로 가서 마들렌이라고 이름을 바꾼 후 성실하게 살아 그 도시의 시장이 됩니다. 그리고 불행한 창녀가 남긴 딸 코제트를 입양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성실하게 살아도 법의 대명사인 형사 자베르는 장발장이 가석방 기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장발장을 사냥개처럼 좇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장발장은 항상 자신의 과거가 밝혀질 것을 염려하며 매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프랑스에 급진주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자베르는 급진주의자들 사이에 잠입했다가 장발장의 딸인 코제트의 남편에 의해 발각되어 죽게 됩니다. 그때 장발장은 "내가 그를 처리하겠소!"하고 나섭니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정의가 승리하고, 장발장은 틀림없이 자베르의 목을 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복수의 화신처럼 평생 그들 정죄하며 따라다닌 자베르를 풀어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둘이 강둑에서 만났을 때 자베르가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전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나의 삶은 곧 법에 의해 움직이는 삶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내 안에 갈등을 일으켰다.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은혜와 자비란 없는데 네가 나에게 보여준 은혜와 자비로 인해서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말을 하고 자베르는 자신의 두 손에 스스로 수갑을 채우고, 강으로 뛰어들어 자살합니다. 장발장은 넋을 잃고 그곳에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 그의 입술에는 희미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미소는 어떤 미소였을까요? 아마 은혜의 위대한 힘을 깨달은 자의 승리의 미소였을 것입니다. 그때 장발장은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정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믿는 여러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원히, 그리고 변함없이 설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이, 현재가 어떻든 상관없이, 미래가 어떻든 상관없이, 또한 여러분이 범한 어떤 죄와도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러분을 의롭다 하시고 받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함없을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잃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도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 가운데 열심히 '내일의 나'를 꿈꾸고 앞날을 깨척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실천할 일 >

 

그처럼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은혜 받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3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평화도 없고, 하나님이 있는 곳에는 평화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결코 불안과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든지 두려움을 주려고 하고, 우리가 두려워하면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가끔 한 맺힌 일이 생길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나의 한을 풀어주심을 신뢰하며 사십시오.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심한 말을 들으면 우리도 더 심한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때 온유한 말을 선택해서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이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변호하기보다 하나님이 그를 다루어 가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사실상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 힘듭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친히 처리하시고, 우리를 돕는 사람은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항상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자기와 더불어 화평을 누리십시오.

 

자기와 더불어 화평하라는 말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연단되고, 결국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시험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왜 시험을 당할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배는 시험을 이기게 만듭니다. 예배는 주일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대해 반응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예배는 인생의 어려운 시험을 이기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19세기에 스패포드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마치 욥의 삶과 같았습니다. 연이은 슬픔과 고통이 그에게 닥쳐왔습니다. 유일한 아들을 4살 때 폐렴으로 잃었고, 시카고 대 화재 때에는 호변에 있는 그의 모든 빌딩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1873, 그는 영국의 한 부흥집회에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려고 배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날, 중요한 비즈니스가 있어서 자신만 일정을 연기해 다음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세 딸은 그냥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세 딸을 모두 잃었고, 오직 아내만 살아남았습니다. 아내로부터 "혼자만 살아났다!"는 전보를 받고,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안고 영국에 있는 아내에게 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가는 중에 선장에게 세 딸을 잃은 장소가 어디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곳을 통과할 때 그는 갑판에 올라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구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침몰하던 그날 밤 세 딸이 울부짖는 악몽이 잠시 떠올랐다가 곧 이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 같은 평화가 그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실로 들어와 하나님이 주신 찬송시를 받아 적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470"내 영혼 평안해!"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항상 주님만 따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에 우리의 성공여부에 주님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성공시키고 열매맺게 하려고 끝까지 성원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주님! 주님께서 저를 선택하셨지요? 그 선택이 헛되지 않게 저에게 힘과 능력을 주소서!." 하고 기도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공에 주님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삶은 항상 손해 보는 방향으로 진행되겠지만,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삶은 항상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3.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십시오.

 

은혜 받은 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내 안에 평안이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은혜 가운데 평화롭게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복음의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배우자도 그렇게 대해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왜 자녀들이 커서 교회를 떠납니까? 자녀들을 주로 어떤 표준에 맞추어 율법적으로 키우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은혜의 복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남편과 성도들과 이웃에게도 복음의 은혜로 대해주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형제를 용서하는 것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특별히 약한 사람, 없는 사람과 함께 마음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애쓰고 있지만 선교사님들 사이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합니다. 어떤 선교사님들은 많은 후원을 받고 넉넉하게 사역을 하지만 어떤 선교사님들은 살아가는 것도 벅찬 형편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교하되 어려운 선교사님들을 더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중국의 이바울 선교사님은 의식주 및 교육 문제와 같은 기본 생활을 하는 것조차 매우 힘든 형편인 것 같습니다. 훈련소에 있는 몇몇 중국의 소수민족 출신 형제와 자매들은 보따리 장사와 팝콘 장사를 하며 전도 경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정 선교헌금을 할 때에는 큰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선교사님보다는 어려운 선교사님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 허영이 아닌 겸손한 심령을 가지고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더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영혼은 더 새로워지고 맑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합니까?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하러 나가는 이유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전도하러 가면 안됩니다. 상처 입은 사람,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없는 자, 비천한 자를 섬길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매우 힘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인간관계를 많이 만드십시오. 좋은 친구를 만들면 어려운 때에 반드시 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홀로 살지 않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을 이기게 해주고, 좋은 일에 같이 즐거워하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는 서로 언약관계입니다. 우리는 서로 도와주어야 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고 같이 울고 같이 웃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그렇게 위로하고 섬겨주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내리막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도 가끔 이유 없이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 파송 받아 개척한 목사님들, 좋은 배경이 있는 목사님들이 처음부터 거창하게 교회를 개척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내게는 왜 이런 배경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배경은 없어도 제자는 있어야 하는데 가끔 교회에 제자가 별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다시 가능성을 보고, 꿈과 비전을 보고 일어서지만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도 중 누군가가 "목사님! 힘내세요" 하고 말해주면 위로가 됩니다. 더 나아가 "목사님! 저도 도울께요!" 하고 동참하면 더 위로가 됩니다. 더 나아가 목회자에게 힘써서 순종하고, 힘들어도 주님의 비전에 묵묵히 행동으로 동참하는 분들을 보면 가장 위로가 됩니다. 그처럼 여러분들의 지역장과 구역장들도 여러분들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한번 "지역장님! 제가 힘써 도울테니 용기를 가지세요." 하시고 협조하시면 우리 교회가 얼마나 든든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왜 교회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닙니까? 서로 위로해주는 친밀한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잠깐만 참석하면 믿음의 공동체에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수십 년 동안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상황에서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대개 기도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주일에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나누는 큰 가정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그런 기도친구가 없다면 이제부터 만드십시오. 마음 문을 활짝 열면 반드시 기도친구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친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은혜의 복음을 서로 나눠주며 사십시오. 항상 주님의 은혜 안에 있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내 안에 평안을 찾고, 이웃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산다면 그것 이상의 행복한 삶이 있겠습니까? 그런 은혜와 평강이 항상 여러분들의 삶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