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23 주일설교 (사도행전 강해 30)
복음의 감격에 빠져라!
사도행전 13장 13~41절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정말 무더웠던 여름, 참 비도 많이 왔던 여름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국내외 선교 여행을 다녀옵니다. 이번 여름에도 국내외 단기 선교를 나갔던 교우들이 많습니다. 젊은이 교회 단기 선교까지 다 마무리 지어지고, 이제 단기 선교 시즌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많은 국내외 선교 여행 중 특별히 마음에 감동이 있는 것은 젊은이 교회에서 떠나는 거지 순례 전도입니다. 잠잘 데도 없고 밥 먹을 데도 없고 돈도 없이 오직 성령님께서 먹여주시고 재워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인도하심을 믿고 2박 3일 전도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녀온 젊은이들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봅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확신을 얻은 것입니다. ‘반드시 성령님은 역사하시더라, 내 길을 인도하시더라.’ 그만큼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지순례 전도를 떠날 용기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2박 3일 동안 성령님이 인도하실 줄 믿고 전도 여행을 어디로 가라고 하든지그냥 떠나실 수 있겠습니까? 거지순례 전도 하나만 가지고도,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 나를 인도하신다. 나를 보호하신다!’ 는 믿음이 실제인가 아닌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국내 거지순례 전도 여행도 아니고 해외 거지순례 전도 여행이면 어떻습니까?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음식도 다 다른데. 적어도 말은 통하는 국내 거지순례 전도 여행이면 어떻게 용기를 내볼만도 하겠는데, 굶으면 3일 굶지 뭐, 3일 동안 잠 안자지 뭐. 이런 오기라도 해 보긴 하겠는데, 해외 거지 순례 전도를 떠나라 그러면 이것은 전혀 다른 답답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이 바로 그 해외 거지순례 전도였습니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 여러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여행 경비를 준비하고 또 여행 스케줄을 만들고 그리고 가이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행 경비조차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에 맡기고 심지어 죽인다는 사람, 감옥의 위협도 감수하면서 그들은 정말 거지 순례 전도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여행이었는가를 1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도 여행을 함께 떠났던 요한이 버가에서 중도 탈락한 것입니다.
13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육신적인 고생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구브로에서 박수 엘루마와 대적할 때, 지켜보던 요한은 너무나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구브로 섬의 실력자인 무당 엘루마와 싸우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죽을 것 같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사울이 이겼습나다만. 특히 앞으로 가야 할 밤빌리아 지역은 야만적인 해적들이 활개치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이 도무지 갈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만 가겠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 요한을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요한과 정서적으로 비슷합니다. 아마 떠난 것 자체가 칭찬받을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요한을 비난하기 보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목할 사람은 선교 여행을 포기하고 중간에 돌아간 요한이 아니라,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선교 여행을 계속하였던 사울과 바나바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두렵지도 힘들지도 않았겠습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힘들고 두렵고 낙심했었다는 고백이 도처에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 어려운 전도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 것일까요?
그 답은 사울에게 있었던 복음의 감격입니다.
요한이 전도 여행을 중단했었던 것은 사울에게 있었던 복음의 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유명한 고백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사도 바울은 그 마음 중심에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하여튼 듣고 믿기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에 갈 자가 천국에 갈 자로 마귀의 종노릇을 하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기만 하면 인생이 바뀌고 가정과 가문과 나라와 민족이 바뀌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고 여겼을 정도입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우리가 전도를 왜 안하느냐 하면 전도하면 힘들고 전도 안하면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도 안하면 사람들에게 말 들을 리도 없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귀찮은 일도 없으니까 전도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전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자기는 전도할 수 밖에 없었다고까지 고백합니다.
여러분, 지금 신종 플루가 확산되고 있고 신종 플루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전염병이 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때, 여러분이 타미플루라는 치료약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지 않으면 죄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심정이 꼭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될 것이라 여겨질 정도로 복음의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런 형편에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복음을 전해주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만약에 내가 고생이 되고 어려움이 있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화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교인들이 많아도 복음을 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인들 중에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새가족 과정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새가족 교재를 꼭 공부를 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복음은 알아듣습니다. 은혜도 받고. 그런데 복음을 말해 보라고 하면 말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직 정확하게 내 안에 복음이 정리되지 않은 분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말할 만큼 내게 충격이고 감동이 아닌 분들입니다. 아직 입은 안 열리신 분들입니다. 셋째는, 복음을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훈련도 받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누구나 복음은 알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교인이 다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복음을 들으실 수는 있습니까? 복음을 말하실 수 있기까지 되었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아직도 목사님이 말씀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좀 애매하다.’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리교를 세우신 존웨슬리 목사님도 아버지가 목사였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홀리클럽이라는 경건 단체를 만들어 성경 공부도 했고, 미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그는 복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미국 선교사로 가는 뱃길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그는 죽을까봐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 선교사 벨러목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은 것을 믿습니까?” 웨슬리는 대답하기를 “나는 구원받기를 또 구원받은 것을 믿게 되기를 원합니다.” 했습니다. 그의 미국 선교 여행이 실패로 끝나고 귀국한 뒤에 “나는 믿음이 없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인 믿음이 부족함을 느낀다.” 눈물로 “나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 거리의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그 마음에 부딪혀 오면서, 그렇구나! 내가 아무리 죄가 많아도,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된다고 하셨구나! 믿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웨슬리 목사님의 죄짐이 다 사라졌습니다.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는 동생 챨스웨슬리에게 달려가서 외쳤습니다. “나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짊어 지셨음을!” 이제 웨슬리목사님이 복음의 감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요한웨슬레는 전도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복음의 감격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웨슬레 목사님처럼 복음의 감격을 한번 외쳐보셨습니까?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을 듣고 너무 감격스럽고 그것이 너무 놀라운 복이라 사람들에게 막 외쳐보셨습니까? 아마 복권 1등 당첨되면 외치지 말라고 그래도 외칠 것입니다. 하다 못해 친교회 모임에서 경품 하나 당첨되어도 소리를 지르고 뛰어나오지 않습니까? 그것과 비교가 안되는 것이 구원의 복음 속죄의 복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웨슬레목사님 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붙들고, 친구를 붙들고, 이웃을 붙들고 “나는 이제 믿습니다! 나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나 속죄함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외쳐보셨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약속대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23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30절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그래서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38-39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 속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어떤 고생도 죽음 조차 감수하고 전도 여행을 하게 한 동기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전해 주고 싶어서. 여기서 전하고 나면 빨리 저기 가서 전하고 그리고 또 저기 가서 전하고. 정말 ‘땅끝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행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이 복음의 감격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한 두 번 들으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복음의 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속죄의 복음이 변질되어가는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복음의 변질이란 무엇입니까? 속죄의 믿음은 있으나,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속죄를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 예수님이 피흘려주셔서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음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 믿음이 있으십니까?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속죄의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감격은 없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 누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것때문에 하루종일 기쁜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 이 기쁜 소식은 왜 네게 이렇게 덤덤하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부모님 은혜 만큼도 감동이 오지 않는 이가 실제로 이 자리에도 있습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복음이 해외에서 들려오는 우리 선수들의 승전보 만큼도 기쁘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속죄의 고백은 있으나 전도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게 변질된 복음입니다. 속죄 받았다고 하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질된 복음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똑같은 복음을 들어도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들어보았고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복음의 감격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감격때문에 죽음의 위협 앞에 있어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나갔습니다.
사울은 생명을 바쳐 그 복음을 전하러 온 세상을 휘젖고 다니는데, 요한처럼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떠나지도 않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아, 나는 도무지 힘들어 못하겠어.” 그러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요한은 떠나기라도 했습니다. 복음을 믿는다, 속죄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한번 전도 여행 떠나보지 못한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속죄 받았다는 믿음이 있는데 전도가 어려워서 못하는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더 못한 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듣고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면서도 전도 한번 못한 분도 아주 밑바닥은 아닙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1절에 보면 그보다 더 못한 이가 나옵니다.
41절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말씀을 듣고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같은 복음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도대체 누구는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어떤 분들은 복음을 배척하고 멸사하는 사람도 있는가 말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을 들어도 감동이 없는 것입니까? 복음은 듣지만 자기 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면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왜 복음은 아는데 복음의 감격은 없을까요?
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속죄의 복음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사함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천국 백성이다! 다 알지만 문제는 속죄 받음에 대한 감동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진정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착하고 온순하고 순종 잘하는 모범생으로 자랐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정말 십자가의 감격 없이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의 실상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제겐 교리일 뿐입니다. 제 머리로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악질도 많고 선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선한 사람 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이 감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에게 제 죄의 실체를 깨닫게 하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1984년 4월 광주 통합병원 수술 대기실에서 저는 비로서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정말 엉터리같은 목사인 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 밤 11시에서 다음 날 아침 동틀 때까지 네가 어떤 자인지 아느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처럼 제 모습을 들추어 보여주시는데, 제 은밀한 죄가 얼마나 추악한지, 완벽한 위선자요, 이중인격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의 나의 모습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의 가장 큰 죄는 남 비판한 것입니다. 자기 죄를 모르고 남의 죄만 비판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차이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느냐 차이가 아니라 자기 죄를 깨닫느냐 아니냐 차이입니다. 내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제가 할 수 있었던 말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본 십자가는 완전히 다른 십자가였습니다. 하루 사이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늘 무덤덤하게 보였었는데, 그때는 깊은 바다에 빠진 사람에게 던져진 생명줄이었습니다. 지옥에 빠져가는 자에게 던져진 천국 가는 구원의 외줄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다리를 고쳐달라는 기도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오직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수고했다 내 종아!’ 한 마디만 듣게 해주세요!” 그것이 나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죄 사함의 복음이 운명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모르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까 복음은 복음대로 있으면서도 내 마음이 헐떡거리고 갈급하고 목마르고 “안돼요, 힘들어요. 더 견딜 수가 없어요! 못하겠어요!”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완전한 죄사함을 받으면, 천국에 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하나님을 아는 눈과 생생한 체험이 이 땅에서 체험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십니다. 이렇게 죄 사함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입니다. 돈벌이 보다, 공부 보다, 죄사함이 더 중요합니다.
지난 주간 읽고 감동받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
바보 같은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고려대 의학과 91학번 내과 전문의 안수현(1972∼2006). 그는 유명한 명의도 아니었습니다. 의학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자 조문객 4000여 명이 줄을 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그는 정말 참 의사였다고, 예수님처럼 살았던 의사라고 사람들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국군 의무사령관 육군 중장이었던 김록권 장군은 군의관이었던 안수현 대위를 추억하면 예수님께서 군의관의 옷을 입으시고 한국 땅에 나타나셨다가 가신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환자의 살이 베일 때 아프겠거니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베인 것처럼 아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달랐습니다. 환자의 생명을 마치 내 생명처럼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의사들이 파업에 나섰을 때 그는 가운을 입고 진료실을 지켰습니다.
군의관으로 훈련을 나가면 앰브런스 안에서 생활하면 좀 더 편하고 안전했을텐데, 그는 풀밭에서 사병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부하들의 건강을 먼저 챙겼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계속 전도했습니다. 예수 안 믿는 환자나 가족을 만나면 책과 CD, 테이프, 선물을 사서 찾아갔습니다. 병실만 아니라 집에도 빈소에도 찾아갔습니다. 말로만 전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가 갑자기 유행성 출혈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처럼 33세였습니다.
영정 사진이 걸리기 전부터 장례식장은 물밀듯 밀려오는 조문객으로 들어설 곳이 없었습니다. 병원 매점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저씨부터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노점상 할머니까지 눈물을 훔쳤습니다. 예배와 찬송이 넘쳤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마치 결혼식 같았습니다. 한 신실한 청년을 예수님께 보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혼례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에겐 복음의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나환자 촌에 들어가는 김대영 집사는 조경 전문가인데, 방탕했던 사람이었다가 십자가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성령을 체험한 후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중국 나환자 촌에 가라는 부름을 받고 선교훈련을 받기 위하여 교회 경비로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는데, 중국 나환자 촌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으로부터 급히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고 출국합니다. 왜 암 말기 때 부르시나? 생각이 들었으나, 조금도 망설임이 없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여러분, 개인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또는 가정에서 하나님 뜻대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가족을 섬기며 가족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여러분이 직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다가, 교회에서 맡은 사명 충성해보려고 열심히 애를 쓰다가 “하나님, 이제는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어려워요, 나도 이제 지쳤어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요?” 이런 분이 있으십니까? 일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눈 앞에 장벽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의 감격을 어느 순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느 순간에 놓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얼마든지 다시 일으키십니다. 우리를 막을 것이 없습니다. 산이 옮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그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해결이 안된 문제가 없습니다. 이미 다 끝났습니다. 그 십자가가가 나를 복받는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리로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날 그 길로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혹시 지친 분이 있으십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붙잡으십시오. 가정 안에서 그렇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랬는데도 안되셨습니까? 여러분, 기도하면서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여기가 끝인가? 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너무 힘이 드십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얼마든지 이길 힘을 주십니다. 이 시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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