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랑의 모습
2001-12-06 16:50:11 read : 186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가장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된 복음을 외면하고
이상한 주장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일이든지 바로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완전히 바꾸는 혁명은 오히려 쉽지만
무엇인가를 바로 잡는 개혁은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이 참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도 바로 잡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이 사도 바울의 간절한 모습과 갈라디아교인들의 태도를 보면
그 가운데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진실한 사랑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1. 진실한 사랑은 논리가 아닙니다.
논리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바른 것을 어떻게 사랑으로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바른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 1장 6절 말씀부터 9절 말씀까지 보십시오.
"다른 복음"에 대한 강한 책망이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
7절을 보십시오. "다른 복음은 없다."
8절을 보십시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9절을 보십시오. "다시 말하는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내용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한 어투의 말씀이 오늘 본문 바로 앞인 4장 11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부터는 그 어투가 바뀝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애정에 호소하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바로 잡기를 원한다면 논리적 변론 이상으로
사랑과 애정을 앞세워 호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논리와 변론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못인줄 몰라서 바꾸지 못합니까?
잘못인줄 알지만 바꾸기가 힘들어서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삼 아픈 데를 들춘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말과 관련해서 다음 3가지는 꼭 조심해야 합니다.
1) 첫째, 논리적으로 말만 잘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만 잘해서는 안되고 말을 실천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원리라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2) 참람된 말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참람된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함부로 남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말이 거칠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흥회 왔다고 해서 말을 함부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듣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줄 수는 있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 진실된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 인격과 진실함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말은 정확하게 인격과 사람됨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람된 말을 해서도 안되고 참람된 말을 하는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3) 훼방하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한 말인 것 같은데 사실상 더 큰 진리를 훼방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로운 말인 것 같은데 사실상 전체 공동체의 의를 훼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의와 진리를 말하는 데도 훼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을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른 말을 질서의 토대 위에 잘 들리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바른 말을 하는데 마음이 나뉘어집니다.
그러면 그 말이 의도하는 효과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부부간에 서로 틀린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서로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바른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 말 때문에 부부간에 마음이 혼란에 빠지고 나누어집니다.
그러니까 바른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말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틀린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서로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바른 말들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 때문에 마음이 나뉘어지고 오히려 의욕이 꺾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바른 말만 듣고 자라면
마음이 더욱 가정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어머니가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른 말을 해도 그 말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말로 들리지 않고
정말 사랑과 관심과 인내가 섞인 말로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바른 논리의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바른 논리와 바른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적절한 때에 적절하고 사려 깊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2. 진실한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진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바른 논리와 바른 말을 적절한 때에 적절하고 살펴 표현하는 것!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을 역류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고,
상대방에 대한 진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시는 바로 이 성육신입니다.
내가 남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는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입장이 되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제 아이들이 젓가락에 이상한 장식을 하고 마술봉이라고 장난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마술봉을 흔들면서 아빠한테 "죽어라! 얍!" 합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죽는 척하고 쓰러져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같아졌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정말로 귀한 사랑은 내가 얼마나 나를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상대방과 같아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처럼 상대방과 같아지면 상대방을 진실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내편이 아닌 상대편에서 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이해의 깊이가 바로 사랑의 척도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역자와 성도 사이에 이러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화장 좋아하고 쇼핑 좋아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이 쇼핑이라도 해야지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여자가 많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백화점 좋아하는 것이 정말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살림과 미의 추구가 상당히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남편의 자존심을 꺾어서 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고는 진정과 사랑이 오고 갈 수가 없습니다.
남자를 잘 조정하려면 먼저 자존심과 명예를 높여주어야 합니다.
사역자와 성도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역자는 성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상징적인 의미로 아이 쇼핑을 하는 것을 너그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도 평신도였을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도 사역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역자 경험은 없어도 공동체 경험, 인생 경험이 풍부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사상도 사랑과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1996년 제가 MBC 신우회 담임목사를 하고 있었을 때
최창섭 아나운서와 교제를 하는데,
그분이 주님의 교회 집사인데 자기 담임목사인 이재철 목사님을 자랑합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은 6년 담임을 하고 1년 안식년을 가진 후
다시 6년간 한번 더 담임목사를 하고 13년 후에는 퇴임하기로 했는데,
그 해가 금년이라고 하면서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정말 신선했고, 정말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교회를 자기 교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목회자들도 더 자기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고,
성도들도 신선하고 새로운 기운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잘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때 그런 생각이 옳다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때 제가 신학교를 4군데 강의 나갈 때였으니까
일주일에 몇백 명의 학생들에게 가는 곳마다 그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상 꿈과 희망 외에 현실적으로 별로 가진 것이 없어 변화의 욕구가 심한
젊은 신학생들에게 그 말이 얼마나 먹혀들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정말 인기가 꽤 많은 교수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쯤 후에 그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새벽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의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마음속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생각인지는 몰라도
저 자신이 그런 말을 돌아다니며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처럼 큰 교회 목사님이 그런 주장을 하면
본인이 속한 얘기, 본인과 관련된 얘기이니까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회자가 13년만에 교회를 사임해야 한다는 것은 신선한 도전이 될 수는 있지만
제가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충분한 이해의 바탕이 아닌,
저와 관련이 없이 큰 교회에 목사님에게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한 교회를 몇십 년 섬기는 목사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어떤 생각일까, 어떤 입장일까,
그리고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을 면밀하게 이해하지 않고,
다만 좋은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주장하는 것은
돌려 말하면 "당신 그 자리 나가라!"라는
소리의 묘한 쿠테타 의식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철저히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없는 자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되어야 하겠지만
있는 자도 무조건 매도하지 말고 그의 심정도 한번 이해해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목자의 마음이라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두 달간 그 사상의 전파자가 되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올랐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얘기입니까?
현실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젊은이들에게는
자리잡은 그 자리를 깨뜨리고 빈 자리로 돌려 놓으라는 주장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있습니다.
그래야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없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더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몇십 명의 사람을 두고 몇 년 목회를 한 사람은
한 교회에서 13년 목회한 후 그만두자는 얘기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천명을 섬기면서 몇 십 년 목회한 사람은
13년 목회 후 그만두자는 얘기를 쉽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대개 13년 이상 되었기 때문에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저는 바른 사상이라고 전파하면서 간접적으로
큰 교회 목사님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놓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생각이 바른 생각인지를 몰라도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실수를 얼마나 많이 저지릅니까?
우리의 진실한 사랑은
욕망이 없는 진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상 각 교회의 상황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섣불리 단정하기보다는 먼저 깊이 생각해 보는 자세,
상대방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해 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십자가를 지는 상황에서 바른 길을 주장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실천하지 못할 의견은
아무리 좋은 것처럼 생각이 되어도 조심스럽게 그 주장을 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더욱 견고해 질 것입니다.
3. 셋째, 진실한 사랑은 덮어 주는 모습 속에서 발견됩니다.
오늘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 바울에게는 일설에 간질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래도 바울을 예수님과 같이 영접했습니다.
사랑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허물이 있지만 그것을 덮어주는 모습!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남의 실수를 비판하기 전에
자기의 실수, 자기의 허물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좀 모자란 것 같아 보여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에서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극대화시켜주고
부끄럽게 생각해서 감추려는 것은 몇 겹으로라도 감싸주어야 합니다.
남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감추려는 것은 정말 아픈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십시오.
바울의 약함을 보고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사처럼 대접합니다.
그들은 할 수 있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주었을 것입니다.(15절)
그런 모습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덮어 주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덮어 주기 위해서는 그냥 덮어준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회개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나가면
덮어 주는 것이 됩니다.
천리안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정말 난장판입니다.
보통 거친 말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들어가서 성경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 곳에 들어가서 진리를 전하니까 공자님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게시했습니다.
그가 "예수쟁이, 제발...."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시하기를
왜 자기들이 막말하는 신성한 게시판(?)을 더럽히느냐고 주장을 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조용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래도 약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가 지혜롭지 못한 측면이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아, 그렇구나! 세상 사람들에 지나치게 학처럼 보이면 거부감 생긴다.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진리를 전파하는데에는 요리가 필요하구나.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편한 마음이 다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그냥 덮어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생각은 아직도 "나는 잘못이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덮어 주고서도 본전 생각나고 후유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앞세우고 덮어주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온전히 덮어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진실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
여러분들이 속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초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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