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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그 능력의 비밀 /사도행전 14장 1~18절

by 【고동엽】 2023. 1. 24.

2009.9.6 (사도행전 강해 32)

 

그 능력의 비밀

사도행전 141~18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한 소녀가 난생 처음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옆에 있는 엄마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엄마, 신부는 왜 저렇게 하얀 옷을 입어야 해?"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 그건 말이야. 하얀 색은 순결을 뜻하는 것이란다.“ 어린 딸은 엄마의 대답을 잠시 생각하더니만 다시 물었습니다. "엄마, 그러면 저 신랑은 왜 저렇게 까만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엄마가 너무나 당황하였답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저 자신을 많이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를 부끄럽게 한 첫 번째 구절은 3절에 나오는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구절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오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기록해두고 있었습니다. 그저 단순히 이고니온에서 사도 바울이 다른 곳보다 좀 오래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까? 오래 있었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쓰신 것은 아닐까? 하고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역사도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믿었지만 훼방하고 핍박하는 이들도 일어났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이러한 방해와 핍박을 받으면서 그 도시에 오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래 있었다는 말씀이 왜 중요한가? 그런 핍박이 있는 중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핍박이 있는 중에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던 것이 참 놀랍다 하는 것을 마음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나는 핍박이 있는 곳에서 하루라도 더 있고 싶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옥에 붙잡혀 있다면 모르지만 스스로 찾아간 곳이요 얼마든지 떠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왜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던 것일까요?

만약에 나를 죽이려고 하는 위협을 하는 곳이라면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곳에 있으면 해를 당할 위기가 올 때 누가 더 있고 싶었겠느냐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다는 일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구나!’ 그러면서 제 자신을 말씀 앞에서 비추어 보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저는 목회하다가 교회를 좀 옮겼으면 하는 마음을 품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제 마음대로 안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교인들의 말 한 마디가 서운해서 였습니다. 그런데도 목양지를 포기하고 싶었고 떠나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죽이려고 하는 위협이 있는 중에도 사도 바울은 그곳에 오래 있었다. 오래 남아 꾸준히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저하고는 너무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저를 부끄럽게 한 또 하나 구절은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바나바와 바울이 자기 옷을 찢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뭔가 일이 있으니까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평소에 옷을 찢어본 적이 있습니까? 또 막 소리를 질러본 적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어느 때 그랬습니까? 우리는 보통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을 때 옷을 찢거나 심지어 자해를 합니다. 그럴 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루스드라에 와서 그런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했던 것일까? 여러분, 우리가 다 성경을 읽었지만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니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을 신으로 경배할 때였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떠받드는 순간에 했던 행동입니다.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했던 이 말씀이 저를 참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했을까?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왜 신으로 떠받들려고 했느냐 하면 루스드라에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에게 예수님이라면 나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고 말하자 그 사람이 뛰어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여기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은 자기 옷을 찢고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소리쳤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때 옷을 찢을 것 까지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뭐 그렇게 원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라고 나가서 소리를 지릅니까?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세요.”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그렇게 막 신으로 추앙하는 것 자체가 나중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해서 내 말 잘 들으세요!” 이렇게 써도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주님이 하신 일이라도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를 하셨지요. 또 주님이 쓰시는 종이라는 것만 가지고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옷까지 찢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소리 지르면서 야단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 이렇게 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제 자신과 너무 비교가 되는 것이 저는 사도 바울처럼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주의 종이라고 교우들이 사랑해 주고 대접해 줄 때 그것을 그냥 마음으로 좋게 여기고 그리고 은근히 그것을 즐기던 제 자신과 너무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은근히 그것을 즐기고 좋아했던 것 사람들의 평판에 예민했던 것이 너무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저에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일으켜내는 그런 권능이 나타나게 된다면 아마 사람들이 저를 보는 눈이 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 처럼 옷을 찢고 소리를 칠까?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도 바울이 참 대단한 사람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는 정말 인내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이 저를 부끄럽게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도 얻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3절 말씀입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사도 바울의 인내도 겸손도 사도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를 힘입어되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깨달아진 것이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본래 사도 바울이 담대하고 두려움도 없고 핍박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주님을 힘입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보면서 나같이 이렇게 부끄러운 자도 주님을 힘입는데는 소망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게도 길이 있구나. 나 자신이 어떠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구나! 사도 바울의 능력의 비밀이 그가 주님을 힘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주를 힘입어 사역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복음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붙잡은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주님을 힘입고 살았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것이 사도 바울의 인내와 겸손의 비밀이었습니다.

자아가 죽은 자에게는 핍박도 성공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면 아무리 어려워도 끝까지 충성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죽을 것 같은 위협 속에서도 주님의 싸인이 오기 전에는 계속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것을 무엇이 또 죽는 것이 겁이 나겠습니까? 그러고 나니까 오래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떠나라고 할 때 까지는 계속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돌을 들고 죽이려 할 때 주님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니 떠나라 하시매 그는 떠났습니다. 주님이 있으라면 죽을 것 같아도 그 자리에 있고, 주님이 떠나라고 하시면 아무리 좋아도 떠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칭찬할 때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람들의 칭찬과 평판에 넘어질 이유도 없고 넘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내가 조금이라도 가로채는 것이 얼나마 두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평판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뀝니다.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을 신처럼 떠받들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도 바울에게 돌을 던져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죽은 줄 알 정도로 사도 바울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를 신처럼 떠받들 때 그것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었다면 아마 그는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넘어뜨리는 무기가 둘 있는데, 하나는 핍박을 통한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성공을 통한 교만입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핍박을 해서 안되면 마귀는 성공으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성공은 핍박 보다 더 무서운 시험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많은 위험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힙니다. 수없이 매를 맞습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 위험이 있지만 최고의 위험은 성공의 위험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고친 사건은 놀라운 승리의 사건이면서도 사도 바울의 위기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기울어졌다면 결과는 끔찍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진리 위에 서 있는 자들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신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환호하는 것 같아도 언제 돌을 치는 자가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할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기대를 걸지 않고 소수의 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나에게 몰려오느냐 떠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느냐, 나와 함께 계시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사람들의 평판에 속으면 안됩니다. 사람의 평판에 연연하면 안됩니다.

정말 두려운 일은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성령님이 자신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다가오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면 그것으로 끝장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심을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인 사람이 아니면 절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것같다가 그만 사람들의 칭찬에 마음을 두어서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떠나십니까? 교만한 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두려운 일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그 믿음 위에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고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를 순교시켰던 헤롯 왕이 사도행전 12장 후반부에 보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들에게 연설을 하였는데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하며 막 아첨을 떨 때, 헤롯이 그 말이 너무 듣기 좋아서 순간 스스로 신으로 착각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어느 분이 음란의 유혹에 계속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한번 하나님께 회개하다가 음란의 유혹을 평생 끊으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도 주저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수도 생활과 같은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끊으라! 버리라! 떠나라!” 하심을 알면서도 미련을 갖고 주저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하지 못하여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끊어야 할 것, 끊는 것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독약이 있는데 독약을 평생 마시지 말라.” 하시면 너무 힘들어하고 답답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독약을 보는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독약인 줄 아는 눈이 뜨이니까 독약을 마시라고 해도 안 마시는 것입니다. 독약인지 음료수인지 구별 못하는 어린 아이는 어떻습니까? 부모가 마시지 마!” 그러면 울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마시면 안될까요?”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 인생에 무엇이 약인지 무엇이 독인지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갈등과 유혹은 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 인생에 독약과 같은 것을 끊어버리라고 한다고 그것이 괴롭다, 힘들다고 한다면 눈이 안 열려서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 사람들의 평판이 사도 바울에게 독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그래서 벌레가 먹어서 죽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정말 뜨이지 않았다면 아마 그도 영락없이 넘어졌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복음을 분명히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을 여러분도 다 알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붙잡으면 반드시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삽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고 노래가 되면 반드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인데 어찌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어찌 사람들이 모여들고 신처럼 떠받들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핍박의 시험도 성공의 유혹도 이긴 것은 오직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2:20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떤 목사님이 빌리그래함 목사님에게 교회에 부흥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 목사님에게 대답하였답니다. “목사님 자신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십자가 복음을 분명히 붙잡으면 반드시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오랜 기간 동안 기도도 하고 어려움도 겪는 고비를 다 넘어가고 15년 만에 예배당 공사를 완공하고 봉헌 예배를 드리면서 이 예배당을 한국 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내어놓는 결단을 했습니다. 이 예배당이 우리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어떤 교회나 단체든지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것이라면 이 예배당을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락할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한해를 지나고 두해를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을 내어놓으려 해도 재정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예배당에서 집회를 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기 요금, 냉난방 비용 등이 상당한 액수가 들어갑니다.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해도 소원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감당할 재정적인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뜻이 아무리 좋아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기뻐하는 뜻대로 내가 살리라 결심한다고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셔야 비로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에 서있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고백이 되고 노래가 되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오직 붙들 것은 오직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주를 힘입어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만 분명히 믿으면 예수님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지난 지방 연합 부흥회 때, 강사님께서 요셉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셉이 애급 총리까지 된 사람이지만, 요셉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창세기 393절 말씀을 들었습니다.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보디발이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여호와를 보았을까요? 요셉을 통하여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요셉은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어려서 종으로 사서 부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일을 맡겨보고서 깜짝 깜짝 놀란 것입니다. 요셉은 너무나 평범한 유대 소년인데,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너무 보잘것 없는 사람이야.’ 조금만 두려운 일이 생겨도 그만 움츠려들고 조금만 사람들이 칭찬하면 그만 마음이 풀어지고 우쭐하고 누가 조금만 뭐라고 그러면 화가 나는 사람입니까? 좋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 십자가 복음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내 주님이십니다.” 분명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모자라고 부족했던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구나 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두려움이 많고 인내심이 없고 교만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자존심 덩어리 일지라도 나 죽고 예수로 사는십자가 복음을 위에 굳게 서서 성령님을 받으면 오히려 그러했던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병고침을 받고, 14 명의 죽었던 자가 그의 기도를 통해 일어났을 정도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부러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처음에는 도무지 설교를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사람들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를 설교하게 해 보려고 얼마나 열심히 도왔는지 모릅니다. “여보,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저는 당신이 오는 주일에 설교하기를 간절히 원해요." 라고 이야기하곤 하였지만 번번히 실패였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 써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들이 하신 설교들을 일주일 내내 적어 외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교단에 일단 올라서면 그 동안 적어놓았던 설교를 읽지는 않고 그 대신 저는 설교 못하겠습니다. 저 대신 다른 분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성령님의 역사를 확신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믿음으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보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보아도 그는 하나님이 그를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통해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이것은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약함은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너무 겁도 많고 너무 두려워하고 인내심도 없고 너무 이기적이고 사람들 앞에 너무 드러내기 좋아하고 사람들의 칭찬과 평판에만 갈급했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듣고 믿고 고백하며 나가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셨다는 이 간증이 비단 사도 바울의 간증만이 아니고 우리의 간증이 되게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나 겁이 많고, 유혹에 비참하게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히려 준비된 사람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분명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계속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증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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