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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 삶을 위한 3가지 규례/사도행전 17장 1-3절

by 【고동엽】 2022. 8. 29.

성공적 삶을 위한 3가지 규례// 20010321

2001-12-08 17:49:02 read : 268

 

수요일 저녁예배// 사도행전 171-3

 

저는 사도 바울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철저히 예수님을 위해 살았고, 일생토록 살아있는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이 그냥 생길까요? 아닙니다. 삶의 원칙이 없으면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히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대로 살았습니다.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개 삶의 소중한 원칙을 잘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던 그의 삶의 원칙이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을 바울답게 만들었던 몇 가지 삶의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자기의 규례'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스스로 정한 삶의 원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좋은 인생의 규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좋은 인생의 규례를 만들고 지키고 계승시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훌륭한 배울 점이 아주 많지만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점은

그가 좋은 인생의 규례를 가지고 그 규례 대로 원칙 있는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좋은 인생 규례를 가지고 지키기에 한번 힘써 보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인생 규례를 가지고 지켜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성공적인 자녀교육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적 규례를 확고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보고 배우고 자라는 모델이 좋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녀를 성공적인 자녀로 키우려면 좋은 신앙 규례로 무장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좋은 인생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몇 가지 사도 바울의 좋은 인생 규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교회 중심적인 삶의 규례

 

사도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거의 예외 없이 회당을 찾았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오늘날로 말하면 사도 바울의 회당 중심적인 삶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우리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교회 중심적인 삶을 말합니다.

 

교회 중심적인 삶이란 하루 종일 교회에 와서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중심적인 삶이란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를 먼저 생각할 줄 알며,

기쁜 일에나 슬픈 일에나 주변을 의식하며 나 혼자가 아님을 의식하는 삶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조금도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 주는 태도!

슬픈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슬픈 일에 동참해 슬픔을 나누어지려는 태도!

고난을 당하면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비슷한 고난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

"교회가 썩었다!"고 말하기 전에 "아직도 교회는 우리의 희망이다!"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희망이 되려고 노력하는 태도! 이런 태도들이 바로 교회 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진정 교회를 생각한다면 항상 교회를 위해서 내가 희생할 것을 생각하고,

어떤 행동이든 교회에 어려움이 예상될만한 행동은 미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 하면 될 거야!"라고 해도 생각대로 안되는 경우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죽제품을 경영하는 회사 사장이 한 식당과 식사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몇 달치 식사대금을 치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계속 빚 독촉을 하는데 이 사장이 3일 후에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당신을 어떻게 믿느냐"고 하니까 "우리 목사님 앞에서 약속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니던 교회로 같이 와서 사장은 담임목사님에게 보증 좀 서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순수하게 그 성도를 돕고자 "어떻게 보증을 서야 합니까?"하고 물으니까

"3일 후에 빚 안 갚으면 내가 갚겠다고 한마디만 해서 돌려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려움 당하는 교인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 교인을 믿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말을 듣고 식당 주인이 돌아갔는데 이 사장이 3일 후에 빚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식당 주인이 와서 목사님보고 돈을 달라고 하고 교회에서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몇십만 원도 아니고 몇천만 원인데 어떻게 목사님이 그 돈을 갚아줍니까?

그래서 못 갚고 있으니까 그 식당 주인이 와서 목사님에게 온갖 욕을 다 해댑니다.

그리고 그 사장은 목사님 뵙기 미안하니까 멀리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 버렸습니다.

 

그 목사님은 교인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증 한번 잘못 섰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결국 그 교인은 교회를 떠났고, 목사님은 오래 동안 그 문제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고의로 그 사장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그런 행동은 처음부터 문제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도 상처를 입고, 교회도 어려움을 당하고, 사람도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살펴보면 본의 아니게 교회에 어려움을 끼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어려움을 끼칠 수 있는 행동들을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내 마음은 분명 교회를 사랑하지만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정성스럽게 섬기는 두 일꾼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교회적 자세를 권면합니다.

비록 감정이 상해 싸우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처럼 둘 다 교회생활을 잘 하는데 결국 생각지 않게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습니까?

그처럼 생각지 않게 나의 행동이 교회에 누가 될 수도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교회에 유익한 존재가 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돕는 정신, 협력 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책임을 감당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미국의 어떤 한인 목사님은 4년 반 동안 혼자서 교회생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잔디 깎고 청소하는 일을 거의 혼자서 했습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목사님을 돕지는 않고 뒷짐만 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적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임하시고 그분 후임으로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공언했습니다.

"나는 잔디 깎는 일, 청소하는 일은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만 신경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후 몇 달이 지나면서 잔디가 자라고 교회가 지저분해지니까 성도들이 나섰습니다.

 

제가 어떤 모습이기를 원합니까? 제 생각에는 두 분의 중간쯤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본을 보이고, 성도님들도 자기의 일을 찾아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내가 해야 할 일감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께서 책임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런 기도도 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목사님이 본을 보이면 성도들은 자연히 따라 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본을 보이는 행동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협력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알아서 자기의 몫을 감당하려고 해야 합니다.

 

협력은 마치 촘촘한 사랑의 그물로 네트워크를 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무리 유능해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협조해야 합니다.

그렇게 협조하며 자기의 일을 감당하려는 사람이 진정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닐까요?

 

성령충만한 가장 뚜렷한 증거 중의 하나는 하나되는 삶을 추구하는 교회적 자세입니다.

반대로 잘못된 영이 충만하면 항상 사람을 가르고 분리시키는 길로 가려고 합니다.

분열시키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만들고, 사이를 벌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물질, 체면과 자존심, 이데올로기 등으로 침투해서 사람을 벌어지게 만듭니다.

 

때로는 물질도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리고 체면이나 자존심도 지나치지 않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인생의 울타리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성도답게 만드는 바른 통로가 될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성도의 모습과는 반대로 분열과 혼돈의 도구가 된다면 잘못된 미혹의 덫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기와 질투의 독화살이 날라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도 진실한 영혼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도 천국의 삶과 행복한 삶은 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적 자세가 여러분들의 삶의 규례로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2. 예배 중심적인 삶의 규례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삶의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안식일이 중요할까요? 무엇보다도 안식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이 중요한 이유는 주일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려면 네 가지가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일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건강과 행복의 소중한 조건입니다.

 

2) 노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 없는 존재이니까 반드시 노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의 균형을 잘 잡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스톱이나 치고, 소주나 마시면서 노닥거리는 것은 또 다른 고역입니다.

그러므로 운동도 하고, 예술도 즐기는 것과 노는 방법의 개발도 아주 중요합니다.

 

3)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행복과 보람을 느낍니다.

사랑의 대상, 내가 기쁘게 줄 대상, 내가 나의 것을 아낌없이 바칠 대상이 있는 것!

그것은 인간 행복의 아주 중요한 요소인데, 현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이기적으로만 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4) 예배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가 다 있어도 인간 영혼의 거대한 부분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인간 영혼의 만족은 오직 우리는 초월하는 존재와의 교통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초월적 존재와 교통을 합니까? 그것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이 역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것이고, 예배를 통해 신령한 축복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영적인 수입과 같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비롯해 그 외의 모든 일은 지출과 같습니다.

그런데 수입이 없이 지출만 너무 심하면 우리의 심령은 곧 고갈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영혼에 예배하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예배는 우리 영혼이 하늘의 은총을 입는 시간이니 얼마나 좋은 시간입니까?

그러므로 예배하러 올 때부터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온전한 은총을 힘입기 위해서 예배에 집중하는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

 

어떤 한 가족이 주일에 예배드리러 황급히 교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까이 오자 엄마 아빠의 손을 잡은 여덟 살 짜리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오늘 예배 때에는 졸면 안돼요. 창피해요."

그러자 엄마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윽박질렀습니다. "조용히 해!"

 

그처럼 간절히 아이가 애원을 했건만 그날도 엄마는 예배 시간에 졸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자 일주일의 피로가 몰려오면서 잠이 슬그머니 오는데

아이가 옆에 앉아서 몸도 뒤척이고, 종이 비행기도 접고 하다가 지루한지

아이가 엄마를 슬쩍 건드리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돈 내고 빨리 가자!"

 

그런 모습이라면 어떻게 예배 시간이 영혼이 소생하는 시간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힘을 얻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군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올 때는 패잔병처럼 왔지만 갈 때는 사랑의 용사가 되어 교회를 나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예배 중심적인 삶의 규례를 확고히 다지는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말씀을 증거하는 삶의 규례

 

사도 바울은 회당에서 기회를 얻을 때마다 말씀을 강론하며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그처럼 그는 항상 말씀 중심적으로 살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3).

 

우리의 믿음도 서재의 믿음, 예배당 믿음에서 현장의 믿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보람있게 감당하기를 원한다면 같이 뛰어야 합니다.

누리는 데에만 신경 쓰지 말고, 십자가를 지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불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을 인도하려는 구체적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무엇보다 중요한 생명을 나누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떡을 돌릴 때 얼마나 신이 납니까? 정말 기분 좋습니다.

복음은 떡보다 훨씬 귀한 것이 아닙니까? 정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오직 하나 부러운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면류관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세상 것은 주님을 아는 우리에게 부러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매혹시키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귀가 천하영광을 예수님께 주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천하영광은 육신이 있을 때만 잠깐 가지고 있다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은 단 한가지도 우리의 영생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린 공로는 영원히 남아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고 하늘의 무한한 행복을 맛보게 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진정 믿는다면 전도를 삶의 규례로 생각하고 전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에게 비롯되는 모든 훌륭한 것은 대개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투수는 자세가 좋아야 하고, 타자도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자세가 거의 반입니다.

볼링을 치는 사람의 자세도 좋아야 하고, 수영도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도 좋은 자세,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진정 원한다면 좋은 신앙 규례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 사도 바울의 삶처럼 교회 중심적 삶, 예배하는 삶, 증거자의 삶을 통해서

신앙생활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소중한 여러분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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