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 삶의 지혜 4가지// 20010207
2001-12-08 17:37:58 read : 241
수요일 저녁예배// 전도서 10장 1-4절
마태복음 12장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나옵니다(1-12절).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손 마른 자의 손을 고쳐 주시니까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하고 의논했습니다(14절).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뒤따랐습니다(15절).
지도자 몇 사람은 반대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따르는 교회가 견고한 교회가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살다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반대하는 몇 명의 사람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수의 반대가 아니라 말없이 성원하는 다수입니다.
그러므로 말없는 다수의 뜻을 알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지도자의 안목이고, 공동체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성도의 수가 줄어 비상조치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우연히 다른 교회의 찬양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감동을 받고 40명 정도 되던 성가대를 복음찬양 성가단으로 만들어
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드럼과 기타를 주일 낮 예배 중에 사용하려고 추진하니까
평소에 찬양예배를 강조하던 몇몇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그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찬양을 하니까 "교회가 살아 있는 것 같아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용히 있다가 점차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한 분이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왜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지 모르겠어요."
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교회는 정체성 혼란을 느끼면서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지도자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말없는 다수의 마음을 읽고 존중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몇몇 소리가 큰 분들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준비 없이, 사명 없이, 달란트 없이, 좋은 것이라면 무조건 따라하다가
오히려 낭패를 보고,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만드는 경우가 많이 발견됩니다.
주변에 목회를 하는 동료 목사님들을 보면 그런 경우를 상당히 목격합니다.
교회성장이 어려워지면서 "어떻게 하면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목회자들은 자나깨나 그 생각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미나에서 <누가 무엇으로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얘기를 <참고>로 듣고 소화시키기보다는 <맹종>하여 무조건 따라합니다.
그러나 교회성장이란 것이 어느 것 한 가지만 꼭 잘해야 성장합니까?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장소가 좋아서, 어떤 교회는 훌륭한 평신도가 많아서 성장할 수 있고,
어떤 교회는 기도를 많이 해서, 어떤 교회는 전도를 잘해서 성장할 수 있으며,
준비된 목회자가 있고, 교회 프로그램이 좋아서 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일학교 때문에, 어떤 교회는 찬양을 잘해서 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따라야지
세미나에서 배웠던 그 방법을 무조건 따라한다고 교회성장이 쉽게 되겠습니까?
인천에서 목회 할 때 가까이 지내던 목사님 중에 아주 순수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순수하게 열정적으로 목회해도 2년 동안 성도가 2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목회가 힘드니까 이분이 어느 날 영성세미나에 가서 영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교회성장에 대한 꿈에 부풀어 그 원리를 교회목회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다 말합니다. "A집사님은 방언기도 하시고 B집사님은 통변해보세요."
갑자기 그러니까 B집사님이 목사님에 대해서 불평하다가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3개월만에 20명 교인이 오히려 12명으로 줄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목사님은 영성에 대한 강조를 포기하고 1년 동안 낙심하며 지냈습니다.
1년쯤 지날 무렵, 이분이 기도를 강조하는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분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8시간 이상 강단에서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비전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보름이 지나도 새 신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후 그분이 그 세미나에 다녀온 지 3개월만에 제가 그분 교회에 방문해 보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허공을 바라보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교인 다 떠나고 4명 남았습니다."
저는 그때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혜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이 지혜로운 자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혜로운 자의 삶의 특징 4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지혜로운 자는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큰 실수와 큰 잘못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의외로 조그만 어리석은 행동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지극히 작은 것에 차이가 납니다.
진짜와 가짜가 크게 차이가 납니까?
아닙니다. 사실상 알고 보면 진짜와 가짜는 아주 조그만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사실상 진짜와 가장 가까운 것이 가짜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것, 작은 일에 대해서도 매일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인간적으로는 별 차이 없었습니다. 작은 차이입니다.
가룟 유다도 주님을 배반했지만, 베드로도 결정적인 때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러면 무슨 차이가 그들의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회개의 차이가 만들었습니다.
그처럼 겉으로 보면 작은 일 같아도 그 결과는 크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지혜로운 사람은 알기에 작은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작은 관심이 소홀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남자들이 보편적으로 잘하는 이런 실없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호강시켜 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가정을 위한 작은 일, 작은 관심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큰 선물, 큰 액수의 것을 상대방에게 주어야 상대방이 만족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담긴 선물은 작은 선물이라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한 작은 선물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주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작은 관심, 작은 것의 중요성을 항상 기억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둘째, 지혜로운 자는 항상 선한 편, 사랑의 편에 섭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무슨 말일까요? 지혜자는 항상 좋은 편에 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좋은 편과 나쁜 편을 선택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항상 좋은 편에 서기 위해서 노력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사실을 놓고도 항상 좋은 편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 한 장 넘쳐 전도서 12장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아 말씀은 언뜻 보면 공부가 싫은 학생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해석합니다. "많이 공부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을 공부하지 말고, 책을 읽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공부하되, 책을 읽되 헛된 방식으로 하지 말고 바르게 하라는 말입니다.
즉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공부의 기초를 두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사실, 말씀, 언어 등을 해석할 때 좋은 편으로 해석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두 편 중에서 한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두 편 중에서 하나는 이해의 편이고, 또 하나는 오해의 편입니다.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합니까? 당연합니다. 교회에서는 이해의 편을 택해야 합니다.
만약 목회자가 상처를 잘 받아 오해를 잘하면 얼마나 오해할 일이 많겠습니까?
그러면 성도들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목회자는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목회자니까 당연히 이해해야 하고, 성도는 오해를 잘해도 좋습니까?
아닙니다. 목회자는 이해도 많이 해야 하고, 성도들의 이해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한가지만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예배 끝나고 인사하는 문제로 목회자를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누구 좋아하고 누구 무시해서 상대를 골라가며 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식입니다. 그런 것으로 오해한다면 오해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항상 화평과 사랑을 추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일에 열심을 내고 공동체와 교회를 세우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나쁜 편에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상시에는 잘 얼굴도 비치지 않다가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면 그때 교회 다니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비리를 폭로하고, 양보 없는 주장을 펴고, 회의에서 발언을 도맡아 합니다.
그런 태도는 교회생활을 실패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좋은 편, 바람직한 편, 세우는 편, 사랑의 편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셋째, 지혜로운 자는 특별히 언어생활이 지혜롭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매자는 길을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우매자는 말이 우매하다는 말은 결국 지혜로운 자는 언어생활이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조금 지나서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은혜롭게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개 칭찬을 잘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은혜롭게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칭찬하는 법을 잘 배워야 합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야만인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특징이 공교롭게도 모두 말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1) 목소리가 큽니다. 그래서 눈치 없이 큰 소리를 잘 내는 편입니다.
그러나 지혜와 교양이 넘칠수록 목소리가 작아지게 된다고 합니다.
2) 자기 말만 주로 합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모릅니다.
3) 감정적입니다. 말투가 달라지기 전에 얼굴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그리고 감정이 상하면 이판사판으로 말을 하면서 성공의 기회를 차버립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언어생활로 남과 나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자기를 높이고, 거칠고, 상처를 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 사람은 용기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을 똑바로 인식시켜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곧이곧대로 .생각 없이 말하면서 스스로 정직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 옆에는 가기 싫고, 그런 사람은 항상 혼자입니다.
그런 거친 말은 어릴수록 잘합니다. 저도 학생 때 눈 때문에 여러 소리 들었습니다.
눈이 작은 것에 대해서 "와이셔츠 단추구멍인데 제대로 보이냐?"고 하지 말고,
"너 눈동자가 똘망똘망하게 생겼구나?"라고 어른스럽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은 사람은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의 도구입니다.
불평의 말보다 격려의 말을 잘 하면 우리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지극히 내성적으로 자랐습니다.
여러 번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나중에는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의 할머니는 끊임없이 그 소년을 격려하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너는 성공할 수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결국 그 할머니의 격려가 그 소년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점차 소년은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항상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통해 가정과 교회를 세우는 지혜로운 분들이 되십시오.
4. 넷째,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있게 한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자기 위의 상관 즉 위 권위자가 화를 나게 하는 일을 해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결국 그 위 권위자를 공경하며 따르는 것이고,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잘못된 실패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감정적인 사랑보다 의지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에서도 한 교회를 선택해 꾸준히 봉사에 참여해야 신앙이 자랍니다.
그런 모습 속에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이 진짜 사랑임이 증거됩니다.
사랑관계는 길에서 만난 거지에게 동냥을 하듯 일시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라
부부관계처럼 어려운 순간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사랑하듯 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때로 정말 사랑하기 힘든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때는 주님의 희생의 극치인 골고다 십자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필요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참는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하겠다는 의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운행하심에 나를 맡기겠다는 그러한 순복의 자세입니다.
조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불평하고 그 자리를 이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들이 자주 반복되면 우리를 통해서 인생의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라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크고 위대한 인생의 작품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청교도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도착했을 때 겨울을 나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맹추위와 전염병, 여독과 배고픔으로 인해 매일 눈만 뜨면 사람이 죽어갔지만,
그들의 입술에서는 단 한 마디의 불평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그들은 내년의 수확을 기대하며
한 신기한 인디언 노인이 전해 준 옥수수 씨앗을 희망과 함께 뿌렸습니다.
추위 속에서도 자신들의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의 성전부터 지었던 그들!
그들의 신앙과 눈물의 수고 위에 오늘날의 미국이 건설되었습니다.
그처럼 꾸준한 신앙은 결국 인생의 좋은 작품, 좋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는 지혜가 없습니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책을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한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꾸준한 신앙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좋은 열매를 맺는 분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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