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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 드리는 찬송 (시편 100:1–2).

by 【고동엽】 2026. 1. 27.

기쁨으로 드리는 찬송 (시편 100:12).

죄의 무게가 사람의 어깨를 눌러도, 은혜의 손은 그 무게보다 더 깊이 내려가 우리를 들어 올리십니다. 그래서 찬송은 가벼운 기분의 장식이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이 숨 쉬는 방식입니다. 시편 100편 1–2절은 그 숨을 가장 맑고 단정하게 가르쳐 줍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이 두 절은 짧지만, 마치 종소리처럼 넓게 울려 퍼집니다. 어디까지 울립니까? “온 땅”까지입니다. 누구에게 울립니까? 여호와께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울립니까? “즐거운 찬송”, “기쁨으로 섬김”,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정말 기쁨으로 찬송하라고요? 눈물이 마르지 않는 장례의 계절에도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꺼지는 날에도요? 사람의 배신으로 속이 텅 비는 날에도요? 하나님께서 정말 기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혹시 이것이 감정을 강요하는 율법의 채찍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억지 웃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을 이긴 복음의 실재를 바라보는 눈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샘의 물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자극으로 솟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으로 솟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명령은 “억지로 행복해져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분 앞에서 참된 예배자로 서라”는 부르심입니다. 기쁨은 예배의 화장품이 아니라 예배의 뿌리입니다.

“온 땅이여”라는 첫 마디는, 찬송이 개인의 취미나 일부 경건한 사람들의 소리로 축소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은 지역의 신이 아니시고, 어떤 민족의 사유물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는 마땅히 피조물의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보편적 부르심은 단순히 규모를 키우려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방향을 예고합니다. 구원은 한 민족의 장식품이 아니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온 땅”을 들으며,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고,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어린양 앞에 서서 찬송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편은 구약의 언어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의 합창을 미리 연습하게 하는 악보입니다.

“여호와께”라는 대상은 찬송의 방향을 정합니다. 찬송은 공허한 하늘을 향한 외침이 아닙니다. 여호와, 곧 스스로 계신 하나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찬송의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입니다. 우리가 기쁘지 않은 날에도 여호와는 여호와이십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날에도 그분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찬송은 감정의 흔들림을 따라 흔들리는 종이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바다 위에 띄워진 견고한 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닻을 내립니다. 그리고 찬송은 그 닻을 붙든 손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즐거운 찬송”은 소리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성격을 말합니다.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로움입니다. 그 자유로움은 방종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담대함입니다. 죄인은 본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은 빛이며, 죄는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빛 앞에서 숨고, 도망치고, 변명합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없이는 불가능한 말입니다. 어떤 근거로 나아갑니까? 우리의 의로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착함은 쉽게 금이 가고, 우리의 선행은 교만과 불순물이 섞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대속의 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고, 의를 이루시고, 부활로 승리를 선포하셨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찬송”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의 자유”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라는 말은 찬송을 단지 입술의 행위로 좁히지 않습니다. “섬기며”라는 단어 속에는 예배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 예배는 주일 한 시간의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살아가는 전 존재의 방향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예배를 매우 엄중하게 다룹니다. 예배는 인간이 창작한 감동의 쇼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응답입니다. 하지만 엄중함이 곧 냉랭함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따라갈 때, 인간의 억지와 과장은 줄고, 진짜 기쁨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여신 예배입니다. 그러니 기쁨은 예배의 적이 아니라 예배의 열매입니다. 진지함이 기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지함이 거짓 기쁨을 몰아내고, 참된 기쁨을 세웁니다.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기에는 예배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예배는 정지된 관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행로입니다. 그러나 이 행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닿는 여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여정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언약을 세우시고, 먼저 아들을 보내시고, 먼저 성령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의 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초대받은 자의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노예처럼 끌려가는 발걸음이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입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서 돌아올 때, 그의 발은 무겁지만 방향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를 꾸짖기 위해 뛰지 않고, 그를 끌어안기 위해 달렸습니다. 우리는 그 품 안에서 “노래하면서” 나아갑니다. 노래는 모든 것이 쉬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이 열려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주 찬송을 잃어버립니다. 찬송이 사라질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말라갑니다. 왜 찬송이 사라집니까? 죄가 기쁨을 훔치기 때문입니다. 죄는 늘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속삭입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 인정, 성공, 돈, 관계, 명예를 붙잡게 합니다. 그 손에 찬송은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는 또 다른 방식으로 찬송을 막습니다. 실패와 상처가 올 때, 죄는 “하나님은 너를 잊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독입니다. 우리는 그 독을 마시고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잊으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잊히심을 당하실 이유가 없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버림받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죄인의 절망을 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슬픔 속에서도 찬송의 불씨를 잃지 않습니다. 불씨는 작아도 살아 있습니다. 성령이 불씨를 지키십니다.

장례의 자리에서 우리는 특히 이 시편의 명령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기쁨으로 찬송하라”는 말이, 마치 슬픔을 금지하는 명령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눈물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성도는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합니다. 다만 복음은 눈물의 의미를 바꿉니다. 슬픔은 절망의 깊이로 떨어지지 않고, 소망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성도의 슬픔은 “끝”을 보지 않고 “주님”을 봅니다. 그러므로 장례의 찬송은 감정의 부정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울면서도, 동시에 부활을 믿습니다. 그 믿음은 차가운 이론이 아니라, 찢어진 마음을 붙드는 생명의 끈입니다. 그 끈을 붙든 손이 떨리며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기쁨으로 드리는 찬송”입니다. 기쁨은 여기서 슬픔을 제거하는 약이 아니라, 슬픔을 삼켜 버리는 더 큰 소망입니다.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여기 한 가지 예화를 드리겠습니다. 한 교회에 오랫동안 찬양대에서 섬기던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겨울,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난 뒤 권사님은 한동안 교회에 나오기 어려워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힘드시겠지” 하고 조심스레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주일, 권사님이 예배당 맨 뒤에 조용히 앉아 계셨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는 시간이 되었는데, 권사님은 책을 펼쳐 놓고도 한참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분이 “괜찮으세요?” 하고 묻자 권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입이 안 열려요. 목이 막혀요. 그런데 오늘은… 하나님 앞에 그냥 앉아 있고 싶지 않아요. 남편을 뺏어간 죽음이 내 입까지 뺏어가게 두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권사님은 아주 작은 소리로, 떨리는 숨을 섞어 찬송을 시작했습니다. 완벽한 음정도 아니고, 크게 울리는 목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예배당에서 가장 무거운 곳을 뚫고 올라가는 고백이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날 이후 권사님은 자주 울면서 찬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의 기쁨은 남편이 돌아온다는 기쁨이 아니라, 남편을 잃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다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눈물과 함께 있었지만, 눈물에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시편 100편은 우리를 예배로 초대하면서, 동시에 예배의 근거를 우리 안에서 찾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쉽게 식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불은 우리의 심장에서 자연발화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을 주셔야 합니다. 그 불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진짜 이유를 “내가 오늘 기분이 괜찮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셨기 때문에”에서 찾습니다. 그때 찬송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상황이 흔들려도, 근거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섬기며”라는 말이 우리에게 예배가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고 예배당을 나가면서 곧바로 불평과 원망으로 돌아가기가 쉽습니다. 찬송이 예배당에만 머물면, 그것은 진짜 찬송이 아니라 잠깐의 분위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찬송은 삶으로 흘러갑니다. 억울함을 당할 때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호소하되 악으로 갚지 않게 하십니다. 손해를 볼 때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더 크게 보게 하십니다. 자녀를 키우는 고단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맡기신 생명을 거룩하게 돌보게 하십니다. 직장과 사업의 자리에서도 정직과 성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쁨으로 섬김”입니다. 기쁨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힘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기쁨을 회복합니까?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기쁨은 멀리 도망친 영혼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영혼에게서 나옵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기도 앞에 서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 속에 서야 합니다. 성찬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쁨이 없다고 느끼는 많은 순간은, 사실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든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인색하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샘에서 멀어지면 목이 마릅니다. 샘으로 돌아가면 물이 있습니다. 그 물을 마실 때, 우리는 다시 찬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찬송의 궁극적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참된 예배자이십니다.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순종하셨고, 이스라엘이 넘어졌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셨고,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으로 찬송하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승리의 근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교회의 특권입니다. 세상은 잠깐의 웃음은 만들 수 있어도, 죽음을 넘어서는 찬송은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부활의 주를 아는 자만, 무덤 앞에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으로 드리는 찬송”을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기쁨의 근거를 주셨습니다. 죄 사함을 주셨고, 의롭다 하심을 주셨고, 양자 됨을 주셨고, 성령의 내주를 주셨고, 하늘의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기쁨은 억지로 짜내는 감정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는 믿음에서 자랍니다. 그러니 마음이 무너질 때, 먼저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내가 기쁨이 없구나”라고 끝내지 말고, “내 주님이 누구신지 다시 보자”라고 말하십시오. 십자가를 보십시오. 빈 무덤을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라도, 떨리는 목소리라도, 한 줄이라도 찬송하십시오. 작은 찬송이 큰 바다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 작은 찬송을 기뻐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찬송은 우리 공로의 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로를 붙드는 믿음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편의 명령은 우리에게 예배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의무가 아니라, 가장 복된 특권입니다. 여호와 앞에 나아가 노래하는 자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의 언어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장차 올 영원한 예배의 전주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눈물이 없습니다.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더 이상 이별이 없습니다. 그날에는 찬송이 완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의 찬송을 오늘부터 시작하게 하십니다. 완전하지 않은 목소리로도 시작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음정을 보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먼저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가”십시다. 우리의 찬송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구원받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더 이상 명령 때문에 찬송하지 않고, 사랑 때문에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기쁨으로 드리는 찬송을 올려 드립시다.


설교요약
시편 100:1–2는 예배가 개인의 취미가 아니라 “온 땅”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부르심임을 선포하며, 찬송의 방향이 감정이 아니라 “여호와께” 맞춰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기쁨은 억지 웃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열렸다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예배는 소리만이 아니라 “섬김” 곧 삶 전체로 이어져야 하며, 장례와 고난 속에서도 성도의 찬송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되 부활의 소망으로 슬픔을 삼키는 더 큰 기쁨을 드러냅니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찬송의 근거를 “상황”에서 찾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습니까?
  •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두렵기만 합니까, 은혜로 열린 “초대”로 느껴집니까?
  • 내 찬송은 예배당을 나선 뒤 “섬김”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 슬픔이 내 입을 닫게 할 때, 나는 어떤 약속을 붙들고 다시 노래할 수 있습니까?

강해
시편 100:1은 예배의 범위를 “온 땅”으로 확장하여 여호와의 주권과 창조주 되심을 전제합니다. “즐거운 찬송”은 분위기가 아니라 예배의 성격이며, 기쁨의 근거는 피조물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구원의 실재에 있습니다. 2절의 “섬기며”는 예배가 단지 노래가 아니라 헌신과 순종을 포함하는 언약적 응답임을 보여 줍니다.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는 죄인이 본래 불가능한 자리이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열렸음을 복음적으로 드러내며, 성도는 이 담대함 속에서 노래하며 나아갑니다.

주석

  • “온 땅”은 예배의 보편성을 말하며, 구속사의 열방 지향성을 내포합니다.
  • “즐거운 찬송”은 단순한 정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와 환희를 뜻하며, 언약 백성의 응답입니다.
  • “섬기며”는 예배와 삶의 결합을 보여 주며, 참된 찬송이 인격과 행위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는 접근(approach)의 신학을 담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감은 희생 제사와 더불어 성취되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성취됩니다.

원어 주석 (히브리어-구약)

  • “즐거운 찬송”에 해당하는 표현은 흔히 רֻעָה/הָרִיעוּ(하리우) 계열의 “환호하다, 큰 소리로 외치다” 뉘앙스를 띱니다.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승리의 함성, 왕을 맞이하는 환호처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공적 고백의 색채가 있습니다.
  • “기쁨으로”는 **בְּשִׂמְחָה(브심하)**로, 성경에서 언약의 복을 누리는 기쁨,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즐거움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섬기다”는 עָבַד(아바드) 계열로, 노동·봉사·예배적 섬김을 포괄합니다. 예배는 단지 감상이나 관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의 전인적 헌신을 포함합니다.
  • “나아가다”는 בּוֹא(보) 계열로 “들어오다/오다”의 의미가 있으며, 예배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실제적 움직임임을 드러냅니다.

원어 주석 (헬라어-신약)
시편 100편 자체는 히브리어 본문이 중심이지만, 신약적 예배 이해를 비추는 관련 어휘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 “기쁨”의 대표 어휘 χαρά(카라): 복음으로 말미암은 기쁨(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기쁨)을 자주 가리킵니다.
  • “섬기다”의 대표 어휘 λατρεύω(라트류오), λειτουργέω(레이투르게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적 봉사/섬김의 의미를 담아, 찬송이 삶과 예배의 봉사로 이어짐을 보여 줍니다.
  • “찬송/노래”와 관련하여 **ὑμνέω(휩네오)**는 하나님께 찬송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예배적 노래 전통을 연결해 줍니다.

금언

  • 찬송은 기분의 꽃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입니다.
  • 눈물은 찬송을 지우지 못하고, 복음은 눈물을 찬송으로 이끕니다.
  •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열렸기에, 성도는 떨리는 목소리로도 노래합니다.

신학적 정리

  • 예배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부르시고 길을 여십니다.
  •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 그 근거는 칭의와 화목, 곧 그리스도의 대속입니다.
  • 예배는 언약적 응답으로서, 말씀과 성례, 공동체적 찬송 속에서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주제별 정리

  • 기쁨: 상황의 호전이 아니라 구원의 확실성에서 솟는 영적 실재
  • 찬송: 하나님께 향한 왕권 인정과 감사의 고백
  • 섬김: 예배의 연장이며 일상의 순종과 헌신
  • 나아감: 그리스도의 중보로 열려 있는 은혜의 접근

목회적 정리

  • 슬픔을 억누르지 말고, 슬픔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십시오. 찬송은 슬픔의 부정이 아니라 슬픔의 방향 전환입니다.
  • 찬송이 메말랐다면 자신을 책망하기 전에, 복음의 샘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말씀과 기도와 공동예배가 샘의 자리입니다.
  • 예배의 감동을 “소리의 크기”로 측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의 진실한 고백을 기뻐 받으십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하루 한 곡의 찬송을 “기도처럼” 드리겠습니다.
  • 예배당에서 부른 찬송이 집과 일터에서 “섬김”으로 이어지도록, 말과 태도와 선택을 점검하겠습니다.
  • 슬픔이 몰려올 때 “기쁨이 없다”로 끝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길을 여셨다”는 복음의 사실을 고백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 찬송의 이유를 내 느낌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에 두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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