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성공적 삶을 위한 세 가지 약속//고린도후서 7장 1절

by 【고동엽】 2022. 8. 29.

성공적 삶을 위한 세 가지 약속// 20001231 주일낮예배

2001-12-08 18:01:49 read : 779

 

 

고린도후서 71

 

어느새 새 천년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정말 빠른 세월입니다.

항상 일년의 끝에 서서 살아온 나날들을 돌아보면 항상 아쉬운 맘이 듭니다.

금년에도 처음 시작할 때는 똑바로 주님을 보고 걷겠다고 약속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는 그 약속을 버리고 이리저리 갈지()자로 걸어왔습니다.

그 걸음을 뉘우쳐보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2001년 새해가 시작됩니다. 그 새해가 어떻게 펼쳐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하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약속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결하게 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약속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공적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세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1. 첫째는 자기와의 약속을 힘써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할 때 한해에 대해서 항상 다짐을 합니다.

"이번에는 더욱 충성해야지, 더욱 기도해야지, 더욱 잘해야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정 지나고 나면 슬그머니 그 다짐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세월은 절대 우리를 성공자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정말 빨리 흘러가는 세대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얼마 전 동아일보에 43세의 김과장 얘기가 실렸습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았더니 인터넷 공간에서 영토 뺏기 싸움을 하는데

자기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4만원 주고 무기 하나를 샀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레벨이 올라가면서 자기 나라를 확대시키려는 꿈을 꾸는데,

자기 패스워드가 해킹당해서 4만원 주고 산 무기를 빼앗겨서 울었던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이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중년 직장인이 집에 돌아오는데 중학생 아이가 본체도 안합니다.

그래서 컴퓨터 치고 있는 아이의 책상에 가서 자판을 세게 쳤는데

이 학생이 벌떡 일어나 "무엄하다! 어디서!"라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알고 보니까 이 학생은 컴퓨터 게임 안에서 왕의 자리에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이렇게 시대가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칫하면 노이로제 걸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변함없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약속을 잘 지키는 성실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려면 특히 자신과의 대화를 잘해야 합니다.

묘하게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그곳에서 많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류 소설가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자기가 묻힐 무덤을 미리 사 두고 울적할 때마다 그 무덤을 갑니다.

그리고 무덤 곁에서 중얼거립니다. "이제 곧 갈텐데 뭘 그렇게 바둥거리며 사나?"

그렇게 조금 있다가 보면 마음이 풀리고, 다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고쳐먹으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무덤 옆에서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항상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할 때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기와의 약속 중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헌신이 없으면 절대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려운 순간을 만나지만 그때에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삶이 힘들 때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십자가를 져야 자기도 살고, 그의 삶도 빛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 십자가를 지면 죽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내려놓을 때에 그것이 위험이고 결국 죽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5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자기 십자가를 지고 믿음으로 정면 돌파하면 삽니다.

어려울 때 자기 십자가를 회피하면 오히려 더 어려움을 당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사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면 고생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기쁨과 보람이고,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곳에 가든지 항상 중심적 인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면 손해 볼 것 같지만 사실상 그것이 성공비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힘든 자리 다 외면하고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

내세울만한 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무엇이 있다해도 다 초라할 뿐입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인도 헌신을 모르는 본인을 초라하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힘든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결국 복의 중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때로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힘들고 어려운 때에 모른 척 하고 외면하다가

교회가 성장하고 안정되면 염치없이 중심에서 큰소리치려는 분들입니다.

분명히 교회를 건축할 때가 되었는데 그때는 이리 저리 교회를 순례하다가,

교회를 다 완공하고 난 다음에는 와서 편하게 중심에 서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얌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본성은 결코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 가서 헌신해도 좋고, 큰 교회에 가서 헌신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 본성을 가지고 큰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복된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십자가 덕을 보면서 살지 않고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끊임없이 자기와 약속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교회는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중심에 세워주어야 합니다.

십자가 지기 싫어하는 분들이 교회의 중심에 서면 그 교회는 정말 무기력한 교회가 됩니다.

 

우리 교회는 평소에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이 중심에 서고,

어렵고 힘들 때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이 중심에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하면서도 그런 강단과 심지가 있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 교회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현재 큰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오히려 복의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때야말로 우리가 십자가를 질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마태복음 20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분들에게는 힘이 되는 말씀이지만.

먼저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경고와 책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런 법칙을 주님이 말씀하셨을까요?

그 말씀은 먼저 되었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된 자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결국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앞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면 먼저 된 자가 나중에도 먼저 된 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의 중심이 되고, 이 땅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십자가를 지겠다는 자기 다짐을 잘 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약속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약속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마치 약속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약속을 지킬 줄 알아야 우리에게 자유와 평화와 여백이 생기게 됩니다.

 

한 심리학자가 울타리 있는 운동장과 울타리 없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놀게 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없는 운동장에서는 운동장 중앙에서만 노는 반면에

울타리가 있는 운동장에서는 전체 운동장을 다 쓰면서 노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울타리가 있어야 사람의 폭이 넓어지고 오히려 더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 사회의 약속은 바로 이 울타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지켜야 우리에게는 더욱 폭넓은 자유와 기쁨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웃과 살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감동대로 이웃을 돕는 것은 차라리 쉽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웃과 살면서 약속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꿈을 꿨습니다. 꿈속에서 어떤 분과 교회 건물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신나게 감동적인 마음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고 다른 목사님에게 그 건물을 넘겼습니다.

그때 꿈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약속을 어길 수 있는가" 하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약속도 잘 지킬 줄 아는 신뢰받는 인간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약속을 다 지킬 수는 없지만 힘써 지지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삶과 그 가정에 은총과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약속을 깨면 수많은 사람들과 그가 속한 공동체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가정도 사실상 법조문이 없는 무언의 약속 공동체입니다.

뚜렷한 약속이 없어도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한 약속을 깨기 때문에 가정의 위기, 관계의 위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교회도 따지고 보면 아주 소중한 약속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그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합니다.

그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때 리더십이 필요하고, 정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리더십이란 사람이 자기의 약속된 자리를 잘 감당하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꾼들이 자기의 일을 잘 맡아 감당할 때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특권이란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특권이란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특권이 생겨나면서 교회에서도 특권층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특권이 어느 정도의 선을 넘게 되면 교회의 발전에 지장이 됩니다.

 

그래서 때로 많이 봉사하면서도 특권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 봉사자의 핵심적인 자세이고, 그것을 잘 조절하는 것이 리더십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봉사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설치지 않고,

파당을 만들지 않고, 임무가 끝나면 조용히 물러가고,

조용히 물러난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잘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새로운 사람들이 재미를 붙여서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진정한 교회의 일꾼이요, 무언의 약속을 지킬 줄 아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자가 이러한 원리를 모르면, 언젠가 한번은 크게 실족하게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실족하지 않는 믿음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양보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리더십과 전체 결정을 존중하면서

아름답게 세워 가는 교회가 바로 약속을 잘 지키는 하나님의 교회가 됩니다.

그러한 공동체의 원리를 존중할 줄 아는 것이 약속을 지키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공동체는 힘이 있고 복 받는 공동체가 됩니다.

 

미국의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파워 그룹인 와스프(wasp)에서 나옵니다.

와스프(White Anglo-Saxon Protestant)란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인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에게 엄격하고 절제된 교육을 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자기보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기주의와 상업주의로 미국이 무너질 것 같지만

미국 내면을 흐르고 있는 도도한 약속과 질서의 물결이 미국을 지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통순경이 딱지를 떼면 큰소리를 치면서 대듭니다.

미국에서는 그러면 큰일 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총을 쏴도 되는 사회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지만 약속의 권위가 주어진 공권력에 대항하면

그것은 미국에서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무작정 큰소리치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질서를 지키면서 법 테두리에서 소리를 내든지, 변호사를 통해서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시나 극한 혼란상황도 아니면서 데모하면서 경찰을 때립니다.

이런 모습은 아마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면일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무언의 약속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보다 큰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게 하는 교육! 이러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번은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인 조나단이 야구에서 홈런을 쳤습니다.

그러자 집에 와서 자랑합니다. "엄마! 제가 홈런을 쳤어요!"

그때 어머니가 심하게 꾸짖습니다.

"너무 네 자랑이 심하다! 중요한 것은 네 팀이 어떻게 됐는가 하는 거야!"

 

그처럼 지도자는 개인보다 전체를 생각하고, 당보다는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 정신과 희생적 사고의 바탕 위에 지도자의 권위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도자뿐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리가 의미하는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자신과 공동체에게 고통이 찾아오게 됩니다.

 

1923년 영국의 초호화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그곳 근처에 캘리포니아 호라는 또 다른 선박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타이타닉 호가 기울면서 무전사들은 필사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호의 무전사는 잠깐의 실수로 무전기를 꺼 놓았습니다.

결국 한 무전사의 무책임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무전기가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혹시 믿음 생활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영적 무전기가 잠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사고와 실패, 아픔과 어려움은 대개 사소한 부주의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부주의보다 더 큰 재앙의 원인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사실상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는 "내가 이 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약속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자기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난 사각형 공동체가 아닌 서로를 감싸주는 원형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중요한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려지 않고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약속을 깨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공동체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너무 낭비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손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자기 본분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리더는 어떻게 하면 움직이게 할까 이모저모 생각하며 노력을 합니다.

사실상 그것이 리더십입니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에너지가 또 소모됩니다.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그 힘을 자기의 할 일을 하고 과업을 이루는데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지키지 않으면 기분 나쁘지 않게 말을 듣게 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기에

정작 할 일은 못하고 리더십을 세우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거기에 소모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도움보다는 짐이 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주어진 자리에서 충성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처럼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상 신앙은 내 마음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이 수없이 뒤집혀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삶과 그 가정에 은총과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이름이 왜 드와이트인 줄 아십니까?

그의 어머니가 흑인 부흥사인 드와이트 무디에게 은혜를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도 무디처럼 되라는 의미에서 드와이트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께 한 자기의 약속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고,

아이젠하워도 하나님과 약속한 것은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했습니다.

 

한번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폭탄이 무수히 떨어지는 곳에서도 그는 꼭 주일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폭탄 속에서도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원칙과 삶의 원칙! 그러한 원칙이 있는 사람이 크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지키면 절대 손해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 더욱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살다보면 때로 길이 막힙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에게도 정말 탄식이 나옵니다.

그래도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우리가 먼저 약속을 버리기 때문에 문제와 고통이 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들로 가득한 약속문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환경이나 처지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약속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있고, 평안히 신뢰할 때 응답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가 처음 가설될 때 대단한 난공사였습니다.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가 70미터이고, 수면에서 물밑까지 다리깊이가 70미터인데,

그 엄청난 140미터의 교각을 세우느라고 공사할 때 1년에 23명이 추락사를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비상대책으로 공사현장 밑에 안전망을 설치했습니다.

그러자 공사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안정되어서 작업능률이 현저히 올라갔다고 합니다.

안전망에 대한 믿음이 현실을 극복하는 능력을 현저히 키워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영원한 안전망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약속하셨습니다. 믿고 줄기차게 전진하면 분명히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 어려움이 있어도 견디지 못하고 애굽을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래도 가나안으로 가자!"라고 하면 광야 40년 기간은 짧아졌을 것입니다.

 

그 원리는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믿지 않는 사람도 저런데."하고 애굽을 돌아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에게 가나안의 축복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 "주님! 그래도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라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쁘게 보시고 그에게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약속이 많이 주어졌어도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을 잘 지켜서 나 자신이 나를 신뢰할만한 사람,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