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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샘의 축복과 아랫샘의 축복/여호수아 15장 13-19절

by 【고동엽】 2023. 1. 25.

윗샘의 축복과 아랫샘의 축복// 20010228

2001-12-08 17:45:03 read : 418

 

수요일 저녁예배// 여호수아 1513-19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돈을 신앙의 적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일만 악의 뿌리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어느 구절에서도 돈 자체를 사악한 것이라고 탓한 곳은 없습니다.

다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딤전 6:10).

 

돈의 성격은 소유자의 인격과 마음먹기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돈은 악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선한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무작정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축복만 주시면서 물질은 무조건 외면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갈렙이 드빌 거민을 공략하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때 갈렙은 드빌을 취하는 자에게는 자기 딸 악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옷니엘이 드빌을 취하여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사가 출가하면서 아버지 갈렙에게 복을 구하며 샘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샘은 커다란 상속물이었고 부를 상징하는 소중한 부동산이었습니다.

그러자 갈렙은 악사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약속의 표상으로 해석합니다.

즉 윗샘은 <영적인 축복>을 상징하고, 아랫샘은 <삶의 축복>을 상징한다고 여깁니다.

지나친 해석이라고 여기는 분도 있겠지만 원리 자체는 틀린 것이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은 삶의 문제도 도우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돈 자체를 무조건 나쁘게 보고 무작정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선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정직하게 돈을 추구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는 물질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28).

우리들은 그 명령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나깨나 돈 생각만 하며 물질세계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때로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한눈을 팔거나 눈을 딱 감고 외면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경제 영역을 다 빼앗긴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내 영혼 평안해!"도 노래해야 하지만 사명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에 눈을 뜨고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깊은 의미의 평안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육간에 최선을 다하는 최선책을 기뻐하시지

사명을 잊고 영적인 삶에만 최선을 다하는 차선책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의로운 부자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사명에 대한 경각심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는 사이에

지금 너무나도 아까운 돈이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숱한 사람들이 돈을 탈취 당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돈 때문에 생기는 미담은 적고 돈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가난한 것이나 나 혼자 평안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세상적인 욕심은 버리되 사명적인 추구와 관심은 꼭 있어야 합니다.

의로운 부자들이 많아야 의로운 일이 많아지고 의로운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1984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탈피하고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그때부터 저는 저에게 생기는 거의 모든 돈을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서 썼습니다.

대학 졸업 후 한 때 직장생활을 했는데 월급이 너무 많아 쓸 곳이 없었습니다.

남자 청년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술 담배도 안하는데 어디에 돈을 씁니까?

그 경우에는 대개 결혼을 대비해 저축하는데 저는 그런 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보면 똑똑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아마 목회자가 되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유학을 갈 때도 거의 무일푼으로 퇴직금만 받고 유학을 갔습니다.

그러나 4년간의 미국 생활에서 신학교를 다니며 7개의 직업을 가지고 공부했는데

나중에 졸업하고 보니 오히려 저의 손에는 3500불이라는 거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중에 2000불을 LA에 계신 부모님에게 송금하고 다시 무일푼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래서 무일푼으로 결혼을 하고, 무일푼으로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마음은 풍족했고, 물질은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게 주어졌으며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 어려운 신학생들을 도우며 저축 없이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저축 없이 사니까 정작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년 가을에 저는 그 동안 아내와 계획했던 셋째 아이 입양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 많은데 목회자가 한 명을 맡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입양을 결심하고 아내와 함께 전국 각지의 복지원에 수소문해 아이를 찾았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입양대상자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금방 대상자를 찾을 줄 알았는데

입양 대상자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전국 수십 군데에 전화를 했습니다.

간신히 안양의 한 사회복지시설에서 대상자를 찾아 입양을 하려고 상담을 하는데

그때야 저희들은 아이를 입양하는데 상당히 많은 돈이 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집에 돌아와 심각하게 그 문제에 관해 고민을 했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날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천사를 생각하면 꼭 그 천사를 데려와야 하는데...

그때 어느 입양 부모의 시에 나타난 심정이 내 마음속에도 메아리가 되어 울렸습니다.

 

서로 알지 못했던 두 여인이 있었지.

한 여인은 네가 기억하지 못하고

또 한 여인은 네가 엄마라고 불렀단다.

 

서로 다른 두 삶이 하나로 묶어져

한 삶은 너를 인도하는 별이 되었고

또 다른 삶은 너의 태양이 되었단다.

 

첫 여인은 너에게 생명을 주었고,

또 한 여인은 너에게 삶의 슬기를 가르쳐 주었지.

첫 여인은 너에게 사랑의 필요를 깨우쳐 주었고,

또 한 여인은 그 사랑을 너에게 주었지.

 

한 여인은 세계를 너에게 주었고,

또 한 여인은 이름을 너에게 주었단다.

한 여인은 너에게 재능의 씨앗을 주었고,

또 한 여인은 너에게 삶의 목적을 주었지.

 

한 여인은 너에게 감정을 주었고,

또 한 여인은 너의 두려움을 달래 주었단다.

한 여인은 너의 사랑스런 첫 미소를 보았고,

또 한 여인은 네 눈물을 닦아주었단다.

 

한 여인은 너를 포기했고 -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단다.

또 한 여인이 아기를 위하여 기도했을 때

주님이 발걸음을 바로 너에게 인도해 주셨단다.

 

이제 네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묻는구나.

네가 지난 몇 해 동안 살며 간직해오던 의문을

유전과 환경 - 너는 어느 것의 산물일까를....

얘야 아니란다. 너는 그 어느 쪽도 아니고

단지 두 가지의 다른 사랑의 산물이란다.

 

그때 저는 빚을 내서라도 입양하는 문제에 관해 아내와 진지하게 상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뜻이 있고, 대상자가 있어도 재정 문제로 입양을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우리는 그때 입양 문제는 계속 뜻을 두되 시간은 조금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처럼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재정 문제로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과 더불어

소중한 일에 쓰기 위한 목적으로 건전한 재산증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삶도 기뻐하시지만

땀을 흘리고 노력함으로 하늘나라의 확장에 기여하는 것도 동시에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건전한 재테크에도 관심을 써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경제력을 활용해 믿음의 원리로 사회를 계도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개인적인 축복에서 사회적인 축복의 영역으로

축복의 영역을 확대시켜 우리 모두 잘 사는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지난 30여 년 동안 교회적으로 여러 가지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의로운 부자가 많아지는 축복은 별로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의로운 부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법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추구를 세속적인 일이라고 외면했기에 경제권을 빼앗긴 것입니다.

 

경제적인 영역을 확대시키고자 노력하고 땀흘리는 것이 왜 세속적인 일입니까?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속적인 일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은 성직인 줄 알아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정치하는 것은 성직입니다.

학생이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고자 공부하는 것도 성직입니다.

가정 주부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 가정을 꾸려 가는 것도 성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돈을 버는 것도 성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다 성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다 성직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게 벌고 바르게 사용할 목적이라면

돈을 버는 것도 소중한 성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다 쓸모 있는 나무로 헌신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은 땅을 정복하고 물질적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산상팔복은 모두 영혼의 복을 말하지만 온유한 자의 복은 조금 특이합니다.

그 복에는 윗샘의 축복과 아랫샘의 축복을 포괄하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물질을 얻는 가장 소중한 원리 중의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 원리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할 것입니다.

"온유하면 어떻게 재물을 모으나? 빼앗기지 않으면 다행일거야."

그래서 시장 바닥에서 머리채 붙들고 싸우면서라도 악착같이 돈을 모읍니다.

 

그처럼 악착같이 살면 일시적으로는 재물을 모을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재물을 모으고 난 후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적들뿐입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온통 적들만 보이니 그 재물이 오래 가겠습니까?

악착같은 행동은 재물보다 더욱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돈 때문에 불행하게 되고 말로는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모든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연계를 보십시오. 강한 사자와 호랑이는 거의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반면에 약하다고 생각되는 개미나 진딧물은 사방에서 번성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자연계의 원리는 다윈의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르는 것 같지만

최종적이고 영원한 승리의 원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유의 원리'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얻으려면 자신을 온유한 인격체로 관리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관리가 있어야 물질적 축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지 않겠습니까?

온유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근처에 어떤 부동산 주인이 있습니다. 그분과 대화하면 마음이 왠지 불편합니다.

반면에 다른 부동산 주인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친절하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손님들이 몇 마디 대화를 해 보고 나서 다 친절한 분에게 몰려갑니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는 나름대로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온유함의 반대말은 성내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강한 것이다"라는 결론입니다.

 

물론 부동산을 오래 했으니까 손님보다는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을 가지고 손님의 말을 퉁명스럽게 되받아 치면 신뢰가 갈까요?

손님이 모르는 말을 해도 그런 말까지 감싸안아야 신뢰감이 형성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기에 우리들을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시고,

더 나아가 그 준비하신 것을 주시려고 수없이 우리들에게 기회의 문을 여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만큼 우리들에게 소중한 자원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식도 자원이고, 돈도 자원이고, 친구도 자원이고, 건강도 자원이지만

이런 자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는 자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자원이 우리에게 오는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우리에게 기회가 늦게 오는 것을 가지고 걱정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세에게 기회가 오는 데에는 40년 걸렸습니다. 그런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정작 걱정할 것은 내가 기회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여긴다면 기회는 조금 늦는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도록 준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준비를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바로 '자기 관리'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믿음을 관리하고, 자기의 소명을 관리하고, 자기의 꿈과 환상을 관리하고,

그와 더불어 자기의 인격과 시간을 철저히 관리할 때 우리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사실상 자기 관리가 철저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자기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꿈을 잃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때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꿈을 꺾고 싶은 강한 충동이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의 일터, 자기의 자리, 심지어는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때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충동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관리가 너무 어렵고 인간만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내일의 소망이 넘치는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바로 거기에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이 담겨있기에 어떤 현실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어떻게 표현되어 나타날까요?

여러 가지 표현 중에서도 믿음의 가장 집약적인 표현은 아마 이런 선언일 것입니다.

"나는 꿈을 가졌다! 나는 미래에 대한 환상이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이런 선언은 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의외로 온유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실패하는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위대한 꿈을 꾸시고,

동시에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함으로 땅을 기업으로 얻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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