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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나만의 행복// 마태복음 6장 1-4절

by 【고동엽】 2023. 1. 25.

은밀한 나만의 행복// 20010902

2001-12-07 23:40:49 read : 167

 

주일 낮예배// 마태복음 61-4

 

< 불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

 

지난 한 주간은 가난하고 없는 사람 사람들이 더욱 생각났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의 전세 값이 갑자기 이천 만원이나 폭등해 난생 처음으로

돈이 없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를 톡톡히 느끼고 있는 터에

교육관 자리로 쓰고 있는 장소의 주인이 계약기간이 끝났다고 재계약을 하자면서

지금보다 보증금과 월세를 각각 2배나 달라고 정말 무리한 요구를 해왔습니다.

 

게다가 폭등하는 전세값으로 이미 우리 중에 몇 가정이 이곳 분당을 떠났습니다.

돈 없는 설움을 안고 멀리 이사가는 성도의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참 쓰라립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앞으로 서민들은 어떻게 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끼니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지금 도처에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구걸하러 오는 분들이 이미 상당한 숫자에 이르렀습니다.

그분들이 오면 교회까지 올라오느라고 수고했다고 조금씩 차비를 주어 보내니까

이제는 매주 정기적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렀습니다.

 

신문을 보면 어두운 얘기가 많습니다. 별로 희망을 얘기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인데 왜 사람들이 절망을 더 얘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절망이 더 커 보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희망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민족성이 어떻다!"고 하는 모습은 절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자기 비하입니까? '질서!' 하면 일본을 떠올리면서 배워야 한다는데

역사를 왜곡하고 세계의 시선을 외면하는 그들의 민족성이 왜 더 낫다는 말입니까?

그런 자기 비하와 부정적 관점들이 우리의 마음까지 불쌍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까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의 처지가 더 불쌍해 보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자를 축복해주고 어려운 자들을 도우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나 중심적으로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속담에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채워져야 여유를 가지고 남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채워지지 않아도 남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의 차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몽고의 김재호 선교사님의 차를 마련해보려고 뛰고 기도하는 것이 타당합니까?

봉고차 한 대 값이면 교육관 자리의 월세 인상 분을 내고도 남는 돈입니다.

그런데 교육관 자리 월세는 고민하면서 선교는 하겠다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웃긴다고 합니다. "네 쌀독부터 먼저 채우라!"고 빈정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필요에도 민감한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선교사님들과 우리보다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54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 프랜시스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다가 거지 문둥병 환자를 보았습니다.

신비한 기운에 사로잡혀 그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돈을 주고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에 올라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뒤를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멀리서 돌아보니 거기에 거지는 없었고 주님이 미소를 띈 채 서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 어려운 자, 불쌍한 자를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보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인격입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작은 자를 존경하는 것은 주님을 존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작은 선물이고, 작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를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좋은 자리,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돈이 있다면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좋은 자리와 좋은 직업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나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없는 사람이 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붙여주신 사람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선물을 통해 주님의 환하고 따뜻한 미소를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릴 것입니다.

 

<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부한 것 자체가 행복이 아닙니다. 부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있고 사랑의 손길을 베풀 수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에덴 동산은 없는 것이 없는 풍요롭고 축복된 동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그것을 잘 아셨기에 사랑의 대상으로 하와를 주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아담의 행복은 시작되었고 하나님도 그것을 보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처럼 사람은 나눔과 헌신을 알아야 철이 든 것이고, 비로소 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부분 용돈이라고 합니다.

용돈 좋아한다고 해서 연로하신 분들을 '돈에 혈안이 된 분'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용돈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해 쓰는 경우는 별로 없고

헌금하는 재미로 쓰거나 어려운 아들이나 손자를 위해 쓰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힘이 떨어져 서럽긴 하지만 남에게 주는 재미가 정말 좋은가 봅니다.

 

그런 사실을 젊었을 때에 일찍 깨닫고 실천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는 돈을 보며 경제적 계산과 경제적 가치만 따지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돈은 나누어주는데 진정한 가치가 있고, 거기에서 진정한 돈의 힘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받는 가치관보다 주는 가치관으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받는 가치관은 <상처의 어머니>이지만, 주는 가치관은 <행복의 어머니>입니다.

 

왜 오늘날 상처가 많습니까? 서로 빼앗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돌보는 여유가 없습니다. 마치 방석빼기 게임을 하는 사회 같습니다.

방석빼기 게임을 해 보셨습니까? 재미는 있지만 성격 다 드러나는 게임입니다.

그 게임에서 항상 방석 숫자는 사람 숫자보다 한두 개 적기 때문에

빙빙 돌리다가 '스톱!' 할 때 방석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쫓겨나게 됩니다.

 

이 게임을 하면 목사도 장로도 다 필요 없습니다.

목사가 방석을 차지하고 앉으려는 순간, 집사가 잽싸게 방석을 빼앗아갑니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게임입니다. 그래서 정말 시험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도 그런 식으로 빼앗으며 사니까 상처와 아픔이 많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베풀면서 살고 복을 빌어주면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기다려 보십시오.

악한 것을 주면 응답은 금방 오지만, 선한 것을 주면 응답은 대개 더디 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랑의 응답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11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이 세상에 복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복 받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복을 추구하다가 자기가 가진 복까지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성도는 복을 더 빨리 받아보겠다고 점치는 사람에게까지 찾아갑니다.

천국 열쇠를 가진 사람이 사망의 열쇠로 복의 문을 열겠다고 하니 서글픈 일입니다.

 

복은 어떻게 옵니까? 내 떡과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던질 때 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 수고로 남이 잘되면 기뻐해야 하는데 "남 좋은 일만 했다!"고 투덜댑니다.

남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복을 얻는 비결인데 왜 복이 달아나는 소리를 합니까?

철학자들은 "소유냐? 존재냐?"고 물으면서 존재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냐? 관계냐?"고 물으면서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관계를 잘해야 하나님 관계를 잘하는 것이고 그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 구제하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

 

성경은 일관적으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일그러진 처지의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벗이 되어 주고,

살맛을 잃은 사람들에게 살맛을 주는 일이 이웃 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입니다.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느냐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분은 자기도 어려우면서 남을 돕는 일에는 정말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그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성령님께서는 바람처럼 다가오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멋지게 살면서도 나만 위해 살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그처럼 중요한지 알면서 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까?

이기심의 껍질이 너무 두꺼워 그것을 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욕에 빠진 자기 응석을 받아주느라 사랑을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이라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서를 어떻게 욕할 수 있습니까?

이웃 사랑을 말하면서 관념적으로 사랑하지 말고 진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처럼 사랑을 실천하다보면 마침내 천국의 열린 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의 불순물입니다.

보석이 어디에서 가치가 올라갑니까? 얼마나 불순물이 없느냐에 따라 올라갑니다.

우리에게도 사람에게 보이려는 불순물이 없어야 우리 신앙도 보석처럼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형식주의는 우리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서 가족들과 외식하는 것을 딱 끊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성경 말씀에 외식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중학교 때에 처음으로 성경을 보면서 외식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외식은 하십시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외식은 버려야 합니다.

 

진실함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생활에서 무엇보다 이 진실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수재의연금을 내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진실한 분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분들은 좋은 일은 도맡아 하고도 이름을 내기를 싫어합니다.

좋은 성품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식으로 살기를 보다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가끔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칭찬을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정받으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 경우에 "왜 내 이름을 냈느냐?"고 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이다!"는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태도입니다.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받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물론 그런 재미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신경을 쓰면 자기가 참 피곤해집니다.

그런 상태가 심해지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먼저 이웃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요새 여론이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그처럼 진실이 무섭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자세여야 합니다.

어떤 나쁜 여론도 사실이 아니라면 3개월 정도면 그 여론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억지로 인정받으려고 하면 더 인정 못 받습니다. 안간힘을 써 보지만 안됩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보고 계시는 줄 알고 묵묵히 최선을 다할 때 인정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우리가 하는 행동이 인정받으려고 하는 행동인지

선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행동인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욕심이 많구나! 내가 인정받으려고 하는구나! 정말 부끄러운 존재이구나!"

이러한 자기 인식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꼭 필요한 자기 발견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보다 진실하고, 보다 깨끗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땅의 영광보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의 진짜 행복은 은밀함 가운데 펼쳐져야 합니다.

그런 삶을 오늘 본문이 어떻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상식적으로 오른손의 일을 왼손이 모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자신도 모를 정도로 선을 행하고, 자기 자신부터 그 선행을 잊으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내가 한 선행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행복을 느낍니다.

왜 행복합니까? 그때에 하나님과 내가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은밀한 행복의 가치를 모른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 구제할 때 명예도 구제해야 합니다 >

 

그리고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하는 것이 좋은 중요한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밀한 구제가 구제 받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생각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도울 때 "우리가 김집사님한테 쌀 한 가마니를 드렸습니다"라고 하면서

전 교인이 박수까지 "짝짝!" 하고 쳐대면 그때 김집사님은 얼마나 비참하게 됩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아마 누군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저 나이에 쌀 한 가마니도 마련하지 못하다니...."

그처럼 구제를 광고할 때, 구제 받는 사람이 비참하게 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먹을 것 조금 주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우리가 돕는 교회>라고 하면서 주보에 그 명단을 싣습니다.

성도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도전을 주고, 자긍심을 심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명단에 속한 목사님과 그 교회 성도의 자존심을 배려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속사정도 모르고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책임감 없는 성도들이구나!"

한 교회가 돕는다는 것을 광고하고 자기의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순간,

도움을 받는 교회는 그만큼 이름이 내려가게 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는 남의 영혼과 자존심도 생각해주면서 구제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야 우리의 구제는 참되고 아름다운 구제가 될 것입니다.

구제는 자축하는 행사가 아니라 자기를 망각하는 삶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은밀하게 구제할 때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마음이 깨끗해지고 따뜻해집니다.

 

< 은밀하게 구제할 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

 

잠언 11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소리 없는 은밀한 구제를 통해 남의 영혼과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해주시고 그 구제한 이상으로 갚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구제를 기억하시고 반드시 은밀하게 갚아주십니다.

그 은밀한 보상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천국의 상급과 자녀의 축복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현재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정당하게 돈을 벌고 성공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부모나 그 윗대의 조상들이 소리 없이 선행을 많이 베푼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선행을 보고 배우면서 자녀들이 얼마나 사명감이 있게 자라나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얼마나 구제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기독교가 짧은 세월에 이렇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편견 없이 사랑의 나눔을 은밀하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례는 알려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선행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지금도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금산교회는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조세형 의원의 아버지 조덕삼 장로가 세운 교회였는데

경상도 출신인 이자익 목사님을 모시고 남도의 큰 민족적 교회로 키워냈습니다.

사실 조덕삼 장로가 큰 인물인 이유는 그분의 편견 없는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담임목사로 모셨던 이자익 목사님은 자기집 마부 출신의 고아였는데

그분을 담임목사로 정성껏 모시고 조용히 교회를 섬겼으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 마음을 가졌는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손을 축복하지 않겠습니까?

 

< 소리 없이 베푸는 삶으로 나만의 행복을 누리십시오 >

 

주님은 은밀한 섬김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넉넉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까?

주님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하는 은밀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 변화산상의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9:9)

신비로운 영상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고난을 이기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신비로운 영상과 나만의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제를 했는데 구제 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그 사실을 오직 하나님과 나만 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신비로운 행복입니까?

나만이 볼 수 있는 기쁨이 넘치는 창!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행복!

그러한 행복이 오늘의 고난을 쉽게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지 않겠습니까?

순교자들에게는 그런 행복이 있었기에 밝은 얼굴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밀한 구제를 통해 나만의 은밀한 행복을 가지기를 더욱 힘쓰십시오.

내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나의 선행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순간,

나만의 행복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행복의 질은 급속히 저하될 것입니다.

 

옛날에 한 성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을 성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 자신은 스스로 자신을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분이 가는 곳마다 사랑의 꽃향기가 가득 넘쳤습니다.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살면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보낸 미()의 천사가 내려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성자님! 무엇이든 원하는 것 있으면 말해보세요. 혹시 치유의 은사를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천사님! 하나님께서 친히 치료하시는 것을 저는 더 원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죄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천사님! 인간의 마음문을 두드리는 일은 저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구제를 많이 하여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천사님! 관심을 받기보다는 관심을 많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천사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꼭 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자는 결국 선물을 주는 분의 기쁨도 고려하여 한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 저를 통해 많이 이루어지되 저 자신은 모르게 해주세요."

 

그때부터 성자의 그림자가 지나는 곳마다 그곳이 치유의 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자가 닿는 사람마다 생기가 돌고, 그 땅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좋은 일을 하고도 그 일이 잊어버리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 마음입니까?

 

그처럼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면서 남들의 행복을 위해서 애를 쓰는 마음!

다른 소중한 생명들을 돌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무수한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 속에서 은밀한 나만의 행복을 즐기는 마음!

여러분 모두의 마음이 그런 아름다운 마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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