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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는 자에게 있는 것/ 누가복음 2장 8-20절

by 【고동엽】 2023. 1. 25.

은혜 받는 자에게 있는 것/ 20001220 삼일밤 예배

2001-12-08 17:59:35 read : 358

 

누가복음 28-20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어둠이 걷히고 환히 밝아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주님이 나심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천사가 목자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누구일까요?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평범한 목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평범한 목자들이었지만 정말 복된 목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처럼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의 모습을 통해서 몇 가지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1. 성실성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이 무슨 이유로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밤에 양떼를 지키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자기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와 그들의 성실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보면서 저에게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가서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일곱 명의 아들들이 모두 사무엘 앞에 섭니다.

그런데 일곱 명 중에서 지도자로 기름 부을 자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여기에 당신 아들들이 다 모였느냐?"고 묻습니다.

이새가 대답합니다. "막내가 있는데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급히 양을 지키는 그를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 양을 지키는 여덟 째 아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을 급히 데려 오자 사무엘은 즉시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붙습니다.

 

그 장면을 보십시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갑니까?

사무엘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새의 일곱 명의 아들들은 재빠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형님들이 가 보십시오. 저는 양을 지키고 있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됩니까? 들에서 양을 지키던 다윗이 은총을 받게 됩니다.

 

복을 추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할 일을 망각하고, 자기의 본분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제가 가끔 말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최선의 땀을 지향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언제 부름을 받았습니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왜 그리고 언제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땅 갈릴리 땅 출신들입니다.

그리고 직업적으로도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선택했는데, 언제 그들을 선택했습니까?

 

마가복음 116-20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그들을 부르셨고(16)

야고보와 요한은 배 안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그들을 부르셨습니다(19).

 

주님은 시간이 남아서 빈둥빈둥 노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일과 책무에 바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남아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의 주어진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대개 신앙생활도 바르게 잘합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생활을 잘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실직해서 놀고 책임이 없는 사람만 교회에 다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한 오해를 우리는 풀어 주기 위해서 있는 처소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처럼 평소에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 믿음만 들어가면 교회생활도 잘 합니다.

자세히 보면 일거리가 있는데 일하지 않고 놀면서 시간이 많은 사람보다

일하면서 시간을 쪼개는 사람이 더 교회생활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교회에 한 주일학교 여자 선생님이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내년에는 주일학교 교사를 못할 것 같으니 빼 주세요."

알고 보니 주일에 할 일이 많아 너무 바빠서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 물어보았더니 친구도 만나고, 빨래도 해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그렇게 바쁠 때 제일 먼저 내 버리는 것이 주일학교 선생님입니까?

주일학교 선생님이란 하나님의 일이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이었습니까?"

 

다른 소중한 일로 바쁘다면 이해가 되어도 그런 일로 바쁜 것이라면

잠을 한 시간 줄이든지, 친구를 덜 만나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일학교 선생님 하는 것보다 친구 만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그런 믿음을 어떻게 잘 봐 주어야 합니까?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는 것이 소중한 일이고,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며

실질적으로 바쁘게 지내는 분들이 오히려 교회생활도 잘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 둔 것은 직장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하겠다고 모든 것 버리고 무조건 신학교 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먼저 배와 그물을 버렸다는 말은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자의 땀을 반드시 기억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대단한 믿음을 가진 목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크게 무서워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그 목자들은 그저 평범한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킬 정도로

책임감이 있고, 희생의 의미를 알고, 땀을 흘릴 줄 아는 목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실한 목자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2. 결단성

 

그때 목자들은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소식을 듣고,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주님의 나심에 대해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를 듣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 목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신기한 체험했네."라고 하면서 그냥 그 사건을 흘려 보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베들레헴에 가서 보자"라고 말하며 그곳으로 출발합니다.

 

그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래서 밤에 양떼를 지키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때는 양떼만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목자들을 불성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그들이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양떼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더 중요한 일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에도 양떼만을 생각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평소에 양떼를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잘 돌보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너무 중요한 일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일에 결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떼를 생각하는 착한 마음은 좋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급히 부르시는데 그때도 주저하면 역사의 현장을 놓치게 됩니다.

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정 때문에 사명을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다시 한번 마가복음 116-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것을 봅니다.

그때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니까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과감한 결단력입니다.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장면은 더욱 극적입니다.

그들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주님이 부르니까 어떻게 합니까?

마가복음 120절에서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삯군들을 버려 둔 것과 배를 버려 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아버지를 버려 두고 아버지에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는 모습은 이해가 안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불효자입니까?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정을 생각하고 이유를 생각하고 사정을 보면 더 큰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보다 큰 사명과 보다 큰 일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줄 아는 것!

거기에 바로 정과 사랑의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과 사랑은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은 따뜻한 정이 있으면서도 거룩한 일, 소중한 일에 대한 시야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은 따뜻하긴 하지만 더욱 큰 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나 정에 얽매여서 소중한 일을 그르쳐서는 안됩니다.

 

일제 시대 때 독립투사들은 어머니에게 절대로 비밀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형사들이 아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면 어머니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들이 알고 있는 비밀을 누설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정이 문제가 됩니다.

정말로 아들을 사랑한다면 아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소중한 뜻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과 사랑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너무 정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결단할 때는 과감히 해야 합니다.

그러한 결단성이 없어서 흔들리는 삶을 살면 항상 고민뿐입니다.

그러한 고민을 통해서 사람이 행복해집니까?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과감히 결단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을 보십시오. 우유부단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과감한 결단력만은 거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 정을 잘 관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바나바와 같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항상 보다 큰 뜻, 보다 소중한 가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중한 가치를 위해 결단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많은 것을 팔아 하나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가 과연 무엇일까요? 너무나 소중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가진 것을 어떤 것이라도 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삶이 단순해집니다. 단순해지면 힘이 생깁니다.

그처럼 좋은 의미로 단순해지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생깁니다.

왜 힘이 생깁니까? 정신과 생각이 쫓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들은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분들로부터 힘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시장을 활보하는 사람, 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힘을 느낍니까?

왜 어떤 지식인들은 분명 지식은 있는데 삶이 무력해 보입니까?

지식인들이 무기력해 보이는 이유는 정신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처지에 있든지 진리 안에서 확고히 살면 당당해지고 힘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단할 때는 결단할 줄 알아야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발전이 있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삶

 

천사의 음성을 듣고 목자들이 급히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가서

모든 상황을 듣고 본 후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그들이 무엇인가 큰 역사를 본 것이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초라합니다.

만약 그들이 외적인 큰 기대를 하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말구유에 놓인 주님의 모습을 보고 "별 것 아니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말구유에 놓인 주님으로부터 미래의 큰 역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생명의 씨앗만 보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 이런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화려한 역사를 꼭 봐야 영광 돌리는 삶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만 보고, 조그만 겨자씨만 보고도 영광을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과 감사가 있어야 그 겨자씨는 큰 겨자나무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삶이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감사는 일시적으로 감사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사는 누구나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삶을 꾸준히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개 믿는 사람들은 고통스런 병에 들면 반쯤 천사가 되어 있습니다.

다른 적절한 시련과 고통, 살만한 시련과 고통 앞에서는 불평하는 사람도

육신에 고통이 찾아오면 거의 대부분 대개 마음이 천사와 같이 깨끗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병이 나으면 정말 감사를 아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으면 감사하는 모습이 어느덧 세월과 함께 금방 사라집니다.

어떤 목사님 말에 의하면 그 유효기간이 1달쯤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은 유효기간이 한 달로 끝나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연습을 하고 감사하는 삶을 체질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생활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감사를 아는 삶과 직결되어 있다."

여러분!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통해 은혜를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는 아주 평범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평범하지만 은혜 받기에 합당한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의 바른 자세를 가짐으로

항상 주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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