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13 주일설교(에베소서 강해 6)
가장 흥분되고 놀라운 소식
엡 2:8-10
어제 밤 월드컵 축구 첫 경기 결과 승리한 소식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월드컵 승리와 패배로 삶의 분위기가 좌우되는 것을 서글픈 일입니다.
우리에게 월드컵 소식과 비교되지 않는 흥분되고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말씀은 누구나 천국에 갈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의하여” 라는 구절의 정확한 해석입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 선물이란 뜻입니다. 완전히 무료라는 뜻이고,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결사적으로 지옥에 가겠다고 우기는 사람만 제외하고는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흥분되고 놀라운 소식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영이 죽어 마귀의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죄사함과 영생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면서 “너는 지옥에 가야해!” 하는 사람도 본인이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천국에 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흥분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2장 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이 이전에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동과 흥분을 모든 사람이 깨닫고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에는 열광하지만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에 대하여는 무덤덤합니다.
그것은 영생과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불치병에 걸렸지만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 병의 치료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덤덤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의 교수이며 마취제와 방부제의 발견자인 심프슨 박사에게 어느 날 기자들이 "당신의 일생 중 최대의 발견이 무엇이었습니까?"고 물었습니다. 이때 경건한 과학자인 심프슨은 확신이 넘치면서 "그것은 내가 죄인의 괴수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시라는 것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고 대답했다. 기자가 이해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도 반드시 우리가 믿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내리실 때 “감사합니다.” 하며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물을 주시는 것을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을 공로라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물을 주셔도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지만 실제 구원받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역시 얼마나 흥분되고 놀라운 소식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 죄를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쳐 본 사람만이 압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빌 3:7-8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힘든 길을 갔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누린 은혜의 감격이 얼마나 컸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죄에 오염되어 있는지 깨닫고 절망했습니다.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받을 수 있음에 감격한 것입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감리교회를 세우신 웨슬리 목사님은 어려서부터 경건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길렀습니다. 대학교가 타락했던 당시에 옥스퍼드 대학 안에 "홀리클럽"을 만들어 시간을 정해 놓고 성경을 읽고, 감옥에 가서 전도했고 금식도 하고 경건서적도 읽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여겨 미국에 가서 2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보통이 아니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살았던 것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죄를 용서받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에겐 마음의 평안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 작은 모임에서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어나가는 도중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교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거듭나게 됩니다. 그는 일기에 기록하기를 "구원을 위해 단지 그 분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과 주께서 나의 죄를 다 거두어 가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라고 썼습니다. 이것을 웨슬리의 회심, 성령체험이라고 합니다.
죤웨슬리 목사님에게 있어서 올더스게잇 체험은 무엇입니까?‘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믿기만 한다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웨슬리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목사님은 올더스케잇에서 좀 더 착해진 것도 아니고, 더 열심히 봉사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면서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달랐습니다. 그 이튿날 눈을 뜨는 순간 웨슬리의 입에는 “주 예수여!”라 고백하였고,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은혜받은 자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9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시려는 것은 우리가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0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죽고 난 다음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믿는 순간부터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이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얼마나 잘 받아주는 사람입니까? 를 묻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교우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롭지 못한 것 같다면 원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이 초청한 모임에 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과 인사를 하는데, 인사하는 태도가 사람마다 다름을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반가와서 손을 몇 번이나 흔들며 인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볍게 웃으며 악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하실 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실 것이라 믿어지십니까? 그러리라는 생각이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지 못하였다는 생각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 없이 하나님께 나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4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 “너는 내 것이라”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다”
이 말씀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고 믿음 좋은 백성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8절 말씀에 보면 그들은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한 것입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무섭고 까다롭고 인색한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성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녀를 가만히 보십시오. 얼마나 뻔뻔합니까? 자기 방 정리도 안하고, 해달라는 것은 많고, 공부는 지독히 안하면서도 저녁이 되면 당당히 집으로 들어옵니다. 양심이 있다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나같은 놈도 들어가도 되나요?” 전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양심도 없고 뻔뻔한지 몰라도 ‘내 아버지 집은 내 집이다.’ 하는 믿음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아들이 초등학생인데, 한번은 대단히 혼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먹을 때, 목사님 마음이 너무 아프더랍니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도 방에서 나오지 않아서 “와서 밥먹어라!” 했더니 “예!” 하고는 밥상에 와 앉더랍니다. 가만 있길래 “밥먹어라!” 했더니 “예!” 하고 밥만 먹더랍니다. 그래서 “고기 반찬도 먹어라.” 했더니 “예!” 하고 먹더랍니다. 밥먹고 일어서기에 “과일도 먹어라.” 했더니 “예.” 하고 그리고는 공부하러 책상에 가 앉더랍니다. 보기가 측은하여 “만화영화 보고 공부해라.” 그랬더니 “예.”하고는 TV 앞에 앉는데, 그 동안 아들이 ‘말 잘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답니다. 이건 아들이 아니라 로봇이더랍니다. 이런 태도는 아버지의 기쁨이 아니더랍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누리는 것이 먼저더랍니다.
주위 사람들이 여러분을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하다면 오히려 까다롭고, 굳은 사람으로 느낀다면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율법생활에 매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레이몬드릴리라는 난폭하고 악한 흑인 청년이 목사를 때려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벽돌을 한 장을 싸들고 교회에 들어갔었습니다. 목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이 청년의 마음을 찌르셨습니다. 벽돌로 목사의 머리를 치겠다고 들어간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세계의 최대 자선병원인 시카고의 쿡크 카운티병원에서 질병에 시달리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목사가 되었는데, '선한 사마리아의 흑인 릴리 목사.'로 불리었습니다. 릴리 목사의 장례식 때, 예배당에는 손때가 묻은 벽돌 한 장이 전시되었습니다. 그것은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자기와 같은 살인자를 구원하시고 은혜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마워, 밤마다 어루만지며 눈물을 떨어뜨리며 기도하던 그 벽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받고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U-DTS 강의 후 한 자매가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모태 신앙입니다. 열심히 교회 다녔고, 교회를 떠난 적도 없고, 예배에 빠진 적이 없지만, 너무나 바리새인과 같은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기쁨과 감격이 없었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을 비판만 하고 살았습니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부모님도 교회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보니, 얼마나 감사한 사람들인지, 허물조차 사랑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제게는 영적 질병이 있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또 장남으로 자라면서, 제게는 어려서부터 보이지 않는 억압이 늘 따라 다녔습니다. 제게 있어서 욕구나 감정 표현은 금기였습니다. 항상 참아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되고, 공부도 잘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참 은혜와 풍성한 살을 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을 닮아서인지 성격은 온순한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으로는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저 자신도 바로 살려고 애썼고, 남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상해 했고, 정죄하였습니다.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치 공부를 하면 꼭 1등을 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노력했습니다. 취미 생활도, 여가 생활도 제게는 없었습니다. 휴가 한 번 마음 편하게 가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는 성장했지만 은혜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제게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는 체험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모욕들, 엄청난 슬픔, 외로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독, 양손과 발, 머리에 흐르는 피, 그리고 옆구리와 심장이 찔리면서 쏟아지는 피를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너무나 슬펐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불쌍했지만, 결국은 저 자신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저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을 하고 난 뒤, 모든 조급함과 원망과 불평, 그리고 성공에 대한 열망 조차 다 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비로서 제가 받은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또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감사만 나왔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주시는 은혜를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흘려 보내는 자가 됩니다.
더 이상 위로받을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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