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의 빛이 되십시오// 20010107 주일낮예배
2001-12-08 18:03:17 read : 493
이사야 60장 1-3절(구약성경 1040쪽)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친절하고 명랑하고 밝은 표정으로 장사를 하기에 날로 번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의 상가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왜 잘 믿는 저 사람 가게에 불이 났을까?"
그런데 불이 난 다음날 가게가 있던 자리에 벽보가 하나 붙었습니다.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새로 시작해 보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벽보였습니다.
그 의지를 보고 사람들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금방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는 경우에 어떤 사람은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초심(初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초심입니다.
누구에게나 위기의 순간은 찾아옵니다. 그것은 초심을 회복하라는 경고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초심을 회복할 때 위기는 희망의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항상 가져야 할 영원한 초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을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환경과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주님 바라보고, 주님이 주신 꿈을 향해 앞으로 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넓히시고, 팔과 가슴을 펴시고, 멀리 보십시오.
우리의 가장 안타까운 죄는 우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죄입니다.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생각만 믿음의 생각으로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어나 열방의 빛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면 거기서 끝나서는 안되고 꼭 준비해야 합니다.
생각은 바뀌었는데 준비가 없는 미래는 결코 희망이 아닙니다.
생각이 바뀌고 바뀐 대로 준비해야 기회가 올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계야화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죽고 대신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친구 생각을 하면서 그 친구 아들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대통령 말이면 다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제 소원만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물쭈물 말을 못합니다. 준비한 것이 없으니까 말할 것이 없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밖에 나오지 못한 이 사람을 파출소에 취직시켜 주었습니다.
준비를 하지 못하면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축복의 기회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의 장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받을 준비를 하지 못하면 그 기회가 축복의 기회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축복의 기회를 잡고 열방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열방의 빛이 되려면 그리스도인다운 똑바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일어나서 빛을 발하는 것일까요?
아무 변화도 없이 마음만 붕 떠서 사는 것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일어나라!"는 말을
"믿는 사람으로서 똑바른 정신을 먼저 갖추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똑바른 태도가 생기고 열방의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을 믿고, 믿는 사람으로서 똑바른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믿음이 요구하는 인간상을 갖추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행위가 완벽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만은 똑발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똑바른 정신을 갖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바른 정신도 없이, 바른 인간이 되지 않고 성공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큰 것에서보다는 바른 것을 성공으로 알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비본질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의 믿는 사람들이 실수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외적인 것, 큰 것, 비본질적인 것에서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크냐? 자체 건물이냐? 교인 숫자가 많으냐?
자체 기도원을 가지고 있는 교회냐? 높은 사람들이 많으냐?"를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주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 병든 마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기보다는 일단 먼저 바른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그와 같은 목적이 뚜렷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자기만 복 달라는 자기중심적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부가 기도하는데, 남편은 큰소리로 "오 하나님 채워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전혀 반대로 "오 하나님! 가져가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너무 이상해서 나중에 목사님이 그 부인에게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채워도 자기만 알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살겠다고 달라고 할 바에야 차라리 가져가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은 삼 순위입니다.
기도의 일 순위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의 이 순위는 하나님의 뜻에 더 잘 복종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해결 이전에 그런 기도를 한다면 얼마나 바른 성도가 되겠습니까?
인천에서 목회 할 때 라디오에서 어떤 여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부모님들로부터 한번도 파괴적인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는 그런 영향을 받아서 결혼해서 지금까지 한번도 출근하는 남편에게
마음이 상해서 직장으로 출근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하니까 만약 자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이 상해서 나가면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에야 "나 하나 속 썩는 것이 낫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진짜 바른 교인입니다.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남편의 기분도 못 맞추면 어떻게 합니까?
남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무슨 큰 일을 하고 왔다고 집에 와서 소리칩니다.
"갔다 놔! 받아!" 그처럼 아내를 종처럼 대하고 수시로 낮추는 발언을 합니다.
요새 아이들이 그냥 큽니까? 그런데 자기만 큰 일 하는 줄 알면 됩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바른 정신, 바른 태도를 가지고 바른 길을 좇아야 합니다.
그처럼 원칙에 충실해야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축복 후의 부작용도 없게 됩니다.
지난 번 교회를 이곳 본당으로 옮길 때 마침 형님이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형님을 돕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형님에게 인테리어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일을 정당하게 요구할 수 없게 되고, 결국 교회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간판을 할 때에도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 간판사업을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싸고 잘 하는 다른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분이 있다는 것으로 원칙이 흔들리면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래도 형님이나 그분은 절대 속상해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바른 분들입니다.
교회가 그런 원칙에서 흔들리면 교회는 곤란해지고, 성도에게는 상처가 남습니다.
교회에서는 이윤관계에 의한 관계설정이 없어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인천에서 목회 할 때 신학교 강의하면서 처음 교회를 개척하니까
제가 가르치는 신학생들이 몰렸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10명까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교인들이 부담스러워합니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들 돕겠다고 옵니다. 그렇다고 정식 전도사로 쓸 수가 없습니다.
교인이 백 명도 되지 않았는데 신학생만 10명이라면 보통 인플레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이 저를 도우러 오겠다고 하면 가슴이 덜컹 합니다.
한 학기에 4곳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이 대학원생까지 4백 명이 넘으니까
매 학기마다 불러만 주면 오겠다는 신학생들, 전도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목사님 교회에 방문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다음 번에 오지!"라고 거절하는 경우가 한 학기에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게 피해 다녀도 좋다고 스스로 찾아오는 신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천의 작은 교회에 전도사급 신학생만 10명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개척 초기에는 사모하고 갈등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모는 저의 속도 모르고 "왜 신학생들을 교회로 불러모으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강의 듣고 배우러 오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막느냐?"고 말합니다.
사실 그 10명의 신학생 중에서 제가 오라고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누구보고 오라고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을 오라고 부르면 나중에 인사조치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런 질서 없는 행동, 강단 없는 행동은 절대 하지를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졸업시킨 신학생 중 아는 사람만 7백 명 정도 됩니다.
지금도 제가 부르기만 하면 우리 교회 와서 무보수로 와서 봉사할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교회 질서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협력 전도사가 많다고 해서 교회 부흥이 될 것 같습니까? 오히려 더 안됩니다.
그것은 통계적으로 그렇습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머리만 많으면 잘 안됩니다.
무엇이든지 원칙에 충실하지 않고 편법을 동원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깁니다.
또한 평신도 중에서도 제가 직분에 대한 어떤 암시를 주면 올 분도 있습니다.
가끔 교회가 힘들 때마다 그런 편법이 생각나지만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어떤 직분을 걸고, 어떤 자리를 걸고 그분들이 온다면 당장에 좋습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안합니다.
다만 사심 없이 저에게 찾아오면 같이 길을 열어 보려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원칙에 충실하려고 하고, 또한 정직하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특히 교회는 좋은 것을 얻으려고 모인 곳이라기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하니까 불평이 많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를 개선하지 않고 불평하면 스스로 성숙의 기회를 차는 셈이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 한마디로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너의 부족함을 알고 너부터 개선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저 자신이 헌신의 의미를 아는 건강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런 사람이 되어야 우리는 열방의 빛 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열방의 빛이 되려면 밝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본문에서 "빛을 발하라!"는 말을 "밝게 살라!"는 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기뻐하는 모습, 밝은 표정이 있을 때 진정한 빛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은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그때 축복도 다가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은 성을 내는 모습입니다.
그처럼 성을 내면 그와 동시에 축복의 기회도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공하려면 김정 관리, 표정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표정이 곱고 언어가 겸손해야 자기가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실력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호감도 매우 중요합니다.
잘 생기지 않아도 좋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바뀔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다가 주님 얼굴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성전 건축 공사장에서 즐겁고 기쁘게 일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의 밝은 얼굴을 모델로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하는데 어느 날 술주정뱅이가 술에 취해 옆 사람에게 화를 벌컥 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까 영락없이 가룟 유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가 바로 예수님 모델로 그렸던 그 청년이었습니다.
인상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미소와 열린 마음을 가진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과 자유라는 책에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 또 하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고독하고, 교만하여 결국 늘 절망감에 고민합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겸손하고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특히 열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정당한 책망을 들을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공자가 제자들과 길을 가는데 길옆에서 한 사람이 소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를 불러 아주 크게 호통을 치고 난 뒤 계속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 대로에서 한 사람이 큰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벼락이 내릴 줄 알았는데 공자는 본척 만척 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들이 상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이는 더 잘못했는데 왜 그냥 지나치죠?"
그러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저 인간은 야단 쳐도 들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때로 책망을 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포기한 사람에게는 책망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책망 받을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책망 받을 때 정당한 책망인 경우에는 그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내 맘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책망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린 마음을 가진 분들을 하나님이 다듬어, 열방의 빛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3. 열방의 빛이 되려면 조용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는 언제 나타납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닌 의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는 고통까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며칠 전 어떤 사모님의 간증을 인터넷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소망은 빨리 시집을 가서 그 집을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어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고통이 전보다 훨씬 심해졌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일찍 출타하시고 사모님이 아이들을 등교시키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냉장고에서 1000ml 우유를 꺼내 다 마셨습니다.
치매 노인들은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빈속에 약한 몸으로 그 많은 우유를 다 마셨으니 그 다음에 설사를 합니다.
사모님이 집에 와 보니까 시어머니가 온통 오물에 범벅이 되어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사모님의 입에서 짜증이 아닌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이 찬송을 하면서 하루 종일 오물 청소를 했습니다.
정말 고통스런 마음이었지만 주님께서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보다도 사랑이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뭐라 물었습니까?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믿음이 소중한 것이지만, 더 깊은 삶과 신앙의 기초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워낙 사랑이라는 말을 가볍게 하다 보니까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 전 유행했던 컴퓨터 바이러스의 이름이 "I LOVE YOU"였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사랑이 특히 많은 부분이 바로 자식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자녀가 겪어야 할 어려움까지 면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정입학이 생기는데,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이 때로 방황하고 실패를 해도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큰 테두리만 치고 그들이 자기 삶을 혼자 처리하도록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방황은 가슴아프지만, 방황의 여지까지 주지 않겠다는 것은 구속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사랑을 보십시오. 때로 그냥 내버려줍니다.
그래서 혼자 깨닫고 혼자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도 우리를 불꽃같이 지켜봅니다.
우리는 사랑의 방법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말 바른 사랑법인지 말입니다.
어떤 주인이 개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우유가 좋다는 말을 듣고 우유를 줍니다.
그래서 개의 머리를 꼭 붙잡고 그 좋은 우유를 먹입니다.
그런데 개가 그 우유를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인은 안타까워합니다.
어느 날도 여느 때와 같이 개의 머리를 잡고 먹입니다. 개는 고개를 흔듭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우유컵이 땅에 떨어져 우유가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까 그 개가 땅에 흩어진 우유를 핧아먹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개가 싫어했던 것은 우유가 아니라 우유를 먹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방법에 틀리면 구속이 됩니다.
오늘날 부모들의 사랑 중에는 그런 구속하는 사랑이 많습니다.
어떤 학원에 청년 기도가 있는데 학생들을 무섭게 다룹니다.
학생들은 그 학원에 오면 꼼짝없이 밤 12시까지 붙잡혀 공부해야 합니다.
어느 날 그 청년이 인성이 망가질 것 같다고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자기도 학생들에게 친구처럼 대해주면서 잘 지내고 싶은데
문제는 부모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하니까
그런 식으로 학생들을 몰아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문제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인가요? 그것이 정말 아이들이 잘 되게 하는 조치인가요?
그러면서도 공공장소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내버려둡니다.
그것을 제지하면 아이들의 기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질서를 가르치고, 남을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기가 죽습니까?
그런 기가 살면 그 아이는 크게 따돌림당하게 됩니다. 망치는 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법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을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함께 가까이 한 사람은 모두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도 달라졌고, 요한도 달라졌고, 세리, 창녀들이 다 달라졌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의 잔을 넘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계신 곳도 달라졌습니다. 나사렛도 달라졌고, 갈릴리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도 작은 빛이지만 사랑으로 주님의 빛을 열방에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충분히 원망할 것이 많습니다. 아쉽습니다.
그러나 원망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아쉬운 것입니다.
참여하고, 빛을 밝히고, 몸을 불살라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는 시작됩니다.
나의 조그만 빛, 너의 조그만 빛이 모이면 우리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는 사람답게 빛을 뿌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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