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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 /요한복음 6:47-51

by 【고동엽】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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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47-51

요즘 사람들은 세 가지 방면에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첫번째 영역은 환경관리입니다. 현대사회는 열린 사회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가정, 우리가 머무는 공동체에 온 세상의 것들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환경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낭패를 당하는 사례들을 많이 봅니다.
   몇 가지 시대적인 현상을 보면 신용카드를 잘못 사용해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신용카드는 없으면 너무도 불편하기 때문에 사용이 점점 늘어가지만 잘못 관리해서 빚을 지게 되는 등 카드로 인한 사회문제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카드를 열 장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게임과 도박과 미신의 중독현상이 인터넷을 통해서 번져가고 있습니다.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 인터넷 미신에 중독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역기능 때문에 인터넷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터넷을 관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외에도 현대문화의 각종 산물들을 잘 관리해야 됩니다. 자동차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잘못 부리다가 사고를 내면 장애자가 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또 핸드폰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쓰고 있는 전기, 가스 등 온갖 이 시대의 문화적인 환경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이웃관리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웃도 잘 관리를 해야 합니다. 내 주변에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한 사람도 있습니다. 불우한 사람도 있고 존귀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이웃들을 잘 대할 줄 알면서 살아야 됩니다.
   어느 귀부인이 백화점에서 가방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도둑이 그 가방을 열어 보니까 현금도 있고 각종 보석이 들어 있었습니다. 귀금속상에 가서 감정을 받아 보니까 가짜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 도둑이 가방 안에 있는 주소를 보고는 전화를 합니다. "왜 가짜를 가지고 다니면서 실망을 시키는 거요. 우리 같이 바쁜 사람들에게 장애를 주느냐 말이요." 하고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합니다. 그 전화를 받은 귀부인은 자기도 가방을 소매치기 당해서 기분이 안 좋은데 그런 전화를 받고는 화가 나서 맞받아 쳤습니다. "너 같은 도둑놈은 처음 봤다. 도둑도 양심이 있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만 그 집 딸이 실종이 되었습니다. 5일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온 몸에 흉칙한 문신을 한 채로 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슨 소설 같은 이야기 같지만 모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그 도둑을 어떻게 대했을까? 생각건대 평소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해서 선을 베풀 줄 알아야 위기 때에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에 이웃을 잊고 살면 위기의 순간에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만 가꾸고 사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도 바로 대할 줄 모르고 선한 사람도 바로 대할 줄 모릅니다. 가난한 자를 상대할 줄도 모르고 부한 자도 상대할 줄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모든 면에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환경관리를 잘 하고 살아야 합니다.

   건강관리

   두번째로 우리는 건강관리를 잘 해야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 나를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물론 신령한 양식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건강관리에 필수적인 음식은 떡입니다. 곧 밥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먹습니다. 사람들의 식성이 다르고 입맛이 다 다릅니다. 목사님 중에 한 분은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합니다. 또 어떤 분은 단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맛의 형태가 다릅니다. 그러나 밥맛은 모두 다 공통입니다. 밥을 먹으면서 짜다, 달다, 시다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모든 사람이 먹는 밥, 그리고 매일 먹는 밥, 상한 밥이 아닌 신선한 밥을 매일 매일 먹어야만 우리의 건강이 유지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자는 누구에게든지 영생이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매일 먹어야 하는 생명의 떡입니다. 육신을 위해서 건강관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몸의 결점을 고치기 위해서 성형수술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무분별하게 성형수술을 하다가 부작용이 일어나는 사건들도 많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무모한 성형수술은 건강관리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건강을 관리하되 그런 방면으로 잘못 관리해서는 안됩니다.

   신앙관리

   세번째로 오늘 설교의 중심이 되는 메시지는 신앙관리를 잘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경관리를 잘하고 건강관리를 잘하고 거기에 신앙관리를 잘 하셔야 됩니다. 성찬예배는 우리의 믿음을 한번 성찰하고 관리하는 기회입니다. 주일예배는 믿음을 관리하는 작업장입니다. 주일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수선되어야 합니다. 때묻은 것이 벗겨져야 합니다. 고장난 것이 고쳐져야 합니다. 상한 것들이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망가진 것들이 수선되어야 하고 신령한 믿음의 관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주일예배입니다. 그 예배 가운데 특별히 성찬예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내 자신의 잘못된 집착에서 돌이키고 생명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그러한 회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관리가 이루어지는 성찬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오면 회개기도를 안 하는 주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찬송 속에, 설교 속에 회개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회개한다는 것입니까? "주여, 내가 불의합니다. 불충합니다. 부족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말이 회개의 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회개의 본질은 그런 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할 때 받은 은혜대로 살지 못한 일에 대해서 회개를 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면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는 받은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소멸시켜버린 불신앙과 불의함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회개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소멸시키는 불신앙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를 달라고 사모할 때 "야, 아무개야. 지난 주일에 네게 은혜를 주었느니라. 그런데 한 주간 너는 그 은혜대로 살지 않고 오늘 또 왔느냐? 지난 주일에 준 은혜는 다 쏟아버리고 또 새삼스럽게 은혜를 달라는 것이냐?" 그렇게 말씀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은혜가 왜 소멸됩니까? 범죄하면 소멸됩니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아도 소멸됩니다. 영적으로 게으르면 소멸됩니다. 은혜를 받고 그 은혜대로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영적으로 활동을 하셔야 합니다. 게으르면 받은 은혜가 다 소멸됩니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으면 은혜가 다 소멸됩니다. 겨자씨 만한 은혜를 받았으면 그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고 거기에 맞도록 그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쓰지 않거나 게으르거나 범죄해도 은혜는 소멸됩니다.
   이런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찬예배에 우리가 해야할 회개의 자세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큰 죄를 짓고 여기에 나왔습니까? 검찰청으로부터 소환장도 받지 않았는데 우리가 무슨 죄인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죄인인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우리가 높이고 살아왔는가, 주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하면서 살았느냐 하는 것을 돌아보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주님만 높여야

   어느 목사님이 주례를 서는데 신부를 보러 신부대기실로 갔습니다. 마침 거기에 친구가 한 명 와 있었는데 주례자 목사님 눈에는 신부 친구가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너무 예뻤던 것입니다. 자기 교인이니까 바깥으로 불러내서는 농담 섞인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얘, 너 오늘 화장을 좀 지워라. 오늘의 주인공은 신부야. 네가 그렇게 잘 꾸며 가지고 나오면 신부가 못 나 보이지 않겠니?"  
   이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이지만 우리 신앙생활을 가만히 검토해 보면 예수님은 안중에 없고 나만 치장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혼식 날은 신랑 신부가 돋보여야 합니다. 그 날은 다른 사람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가 자꾸만 돋보이고 치장에만 몰두하는 삶이라면 이것은 우리가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자세를 우리가 늘 정비해야 됩니다.
   제가 한번은 차의 정비를 부탁하고 주차장에 주차를 부탁해 놓았는데 어디에 주차해 두었는지 정확하지 않아서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전부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가 크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어느 동의 주차관리하는 분은 저하고 끝까지 차를 찾는데 차가 없다고 걱정을 해 가면서 수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오히려 외부에서 온 사람인 것처럼 마지못해서 상대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의 자세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미 대륙은 칠면조가 굉장히 많은 나라입니다. 또한 켈리포니아 해안의 멕시칸 안에는 펠리건이라는 새가 굉장히 많이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새는 살아가는 형태가 정 반대라는 것입니다. 칠면조는 이미지는 좋고 순해 보이는데 다른 새가 몸을 다치면 이놈 저놈이 달려들어서 상처를 쪼아서 죽인다고 합니다. 일본의 '이지메', 우리나라의 '왕따'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펠리건이라는 새는 종말이 참 감동적이라고 합니다. 먹이가 없는 새끼를 위해서 어미새가 스스로 굶어서 자기 몸을 새끼에게 제공하는 이런 감동적인 종말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칠면조형인가 펠리건형인가 두 유형 밖에 없습니다. 이웃을 상하게 하다가 남에게 짐이 되어 마치느냐, 이웃을 유익하게 하다가 한 평생을 마치느냐 그 두 유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게

   성찬식은 일 년에 두 번 맞이하고 주일예배는 매 주일 맞이합니다. 무엇을 회개하자는 것입니까? 받은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가? 이것을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매 주마다 받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서 진정으로 주님의 영광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선한 열매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불의한 삶을 돌이키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회개의 날입니다. 우리의 불신앙과 불의함을 돌이키는 날입니다. 이것을 그냥 안고 월요일을 맞이하면 받은 은혜를 또 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못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안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혜 받은 우리가 은혜대로 살지 못해서 그렇지 언제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것에 인색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의 분량은 적어도, 우리의 기도의 분량은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도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우리의 불신앙의 흔적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그것을 돌아보는 시간이 성찬예배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하나님께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무엇을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됨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찬예배에 함께 참예한 하나님의 가족됨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에는 회복이 일어납니다. 육체가 상한 자들이 나음을 입는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 침체상태에서 새로운 서원의 다짐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새 출발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소망을 확인하기 바랍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소망의 확인, 내가 지켜본  진리, 내가 실천해본 복음, 내가 만나본 예수,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나눌 그 예수로서 확신된 진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성찬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기준입니다. 성찬예배를 거행하는데 장애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은혜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오면 성찬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로마의 핍박 하에서 순교를 당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숨어서 성찬예식을 거행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의 소원은 자유롭게 성찬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놓고 소신껏 성찬예배를 드리면서도 감격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믿음은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찬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의 정점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를 우리가 이 시대에 더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껏 성찬예배를 드리고 마음껏 전도하고 마음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환경에 처한 우리에게는 더 이상 구할 은혜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주를 위해서 충성되게 살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오늘도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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