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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세례 /마태복음 27:45-54

by 【고동엽】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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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45-54

얼마 전에 안타까운 사고소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중심교회 라고 하는 Y교회 부속 성전에서 천장에 있는 석고보드가 떨어져서 사고가 났습니다. 석고보드가 일 톤 정도되는 무게였다고 하는데 1층에서는 칠백 명의 학생들이 예배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고등부 교사되는 분이 떨어진 그 석고보드를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사고가 될 뻔한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게 때문에 떠밀려서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 교사는 현직 교사였습니다. 대형사고로 인명피해가 날 뻔한 천정의 석고보드를 버티고 있다가 애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 성전은 입당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새 건물인데 날림공사로 인해 천장이 떨어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저는 교사되신 그 집사님의 죽음을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고 본인은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속죄적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버티다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승리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이미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 기도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2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의 소원을 구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는 주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실 대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먼저 구했습니다. 나의 소원이 결과가 되어 그것에 얽매이면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런 실수를 하시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의 깊은 기도가 십자가를 지는 능력을 입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기분으로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것세마네의 목숨을 건 기도의 시간이 바쳐져야만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의 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속죄의 죽음입니다. 그저 한 사람이 이 땅에 나서 살다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없는 메시야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또 죽을만한 죄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일곱 가지 징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로자(Via Dolorosa)라고 합니다. 즉 슬픔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 관저에서 갈보리까지 폭 사미터 길이 오백미터 정도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에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셨습니다. 그 비아 돌로로자에는 일곱 가지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정죄가 있었습니다. 무죄한 자를 사형으로 정죄했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눅23:23-24)
   둘째는 조롱이 있었습니다. 백성들과 관원들이 조롱하고 군병들도 조롱하며 한 강도도 조롱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매맞음과 침뱉음과 손으로 침과 가시관을 받음과 홍포를 입힘으로 조롱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죽음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넷째는 긍휼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눅23:28)
   다섯째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23:47)
   여섯째는 구원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일곱째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한 낮에 어두움이 임하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은 성도들이 일어나는 이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광경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오전 9시, 숨을 거둔 운명의 시간은 오후 3시로 6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동안 세 가지 큰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두움이 임하다

   첫째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45절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제 육시는 12시 정오를 말합니다. 제 구시는 오후 3시입니다.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태양이 가장 강렬하게 비취는 한 낮에 세 시간 동안 태양이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왜 그런 이적이 일어났을까, 그 이적의 의미가 무엇일까 라고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애도라고 해석합니다. 창조주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멸망에서 구원시키기 위하여 죽임 당하는 그 죽음이 너무도 장렬하기 때문에 태양을 비롯한 모든 우주의 만물들이 창조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시적입니다.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인류의 고통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 하는 그 무시무시한 죄 값에 대한 고통을 홀로 지고 죽으신 주님의 고통에 대한 인류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오후 3시가 가까웠을 때 마지막 고통의 절정에 절규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주님의 절규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절정을 이 대목에서 발견합니다. 그 고통의 절정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순간입니다. 죄 값으로 심판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 값 때문에 메시야가 심판을 당하는 그 순간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아야 될 것을 주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 절규와 함께 온 세상은 세 시간 동안 어두움으로 애도를 했습니다. 그 애도에는 우리 자신의 죄 값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 값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고통의 절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그 고통 속에는 나의 죄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

   두번째 이적은 성전 안에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습니다. 이 두 곳을 구분하는 것이 휘장입니다. 가운데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이 하나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만약 메시야의 죽음이 없었다면 아직도 대제사장을 통하여 기도해야 하고 대제사장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 함께 예배당에 왔으며 또 영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온 것입니다.

   죽은 성도들이 일어나다

   세번째 징조는 성전 밖에서 일어났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또한 전무후무한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그 순간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아무나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물론 성도가 다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골고다 근방에 있는 성도들의 무덤이 열리고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기한 이적입니다. 그러나 이 이적에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적이 동반되는가? 이제는 죽음의 권세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옥으로 몰고 가는 그 죽음의 권세가 예수님의 속죄로 인하여 끝났다는 것이고 죽은 성도가 부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는 부활한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 날 부활한 성도들은 그 길로 하늘나라에 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적인 설교입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살아났던 성도들 중에는 욥도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근거는 구약 70인역의 욥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주께서 일으키는 자와 함께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 날 부활했던 성도들 중에는 욥이 포함됐을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 분은 죽을 필요도 없고 죽음을 알지도 못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의 죄 값을 대신하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징조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우리들의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우리의 죄 값을 지고 부르짖었던 주님의 속죄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고난에는 세례의 의미가 있다

   세례는 죄 사함 받은 것을 표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녀됨을 표하는 예식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성도들이 살아나서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이 놀라운 이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예표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가족됨을 표하는 예식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표하는 예식입니다. 이와 같은 세례는 주님의 속죄사역의 의미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맺는 말

   세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세례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리스도와 연합된 영적인 표식입니다. 세례의 믿음은 일평생동안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시켜 주는 표식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여러분들과 세례를 지켜보는 가족들, 세례 교인들을 영접하는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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