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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꿈을 이루는 길 (신명기 3장 23-29절)

by 【고동엽】 2022. 12. 19.

평생의 꿈을 이루는 길 (신명기 3장 23-29절) < “노 ! ”도 잘해야 합니다 >

 요새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일까요? 바로 최순실을 단호히 멀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최순실 같은 사람을 끝까지 품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끊을 사람은 단호하게 끊는 ‘공의로운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끊을 사람을 단호하게 끊지 못하면 나중에 반드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목회자도 좋은 신앙 동료와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편애나 차별이 아닙니다.

 사랑을 동정이나 어울림으로 여기고 악인을 멀리하지 못하면 평생 고생을 합니다. 불행은 사랑을 오해해서 자초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대통령이 나쁜 사람에 대해 “노!”를 못한 것도 잘못이지만 자신의 나쁜 인식과 성향에 대해 “노!”를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대통령은 자기가 선의로 한 일을 가지고 뭘 잘못했느냐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적인 선의가 공적인 불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기에 이번 국정 농단 사태가 생긴 것입니다.

 이번에 발표된 대통령의 혐의 중 액수는 작아도 가장 치졸한 혐의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초등학교 친구 아버지 L씨의 자동차 부품 회사 청탁 혐의입니다.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최순실이 현 정부의 실세임을 알고 L씨는 고가의 핸드백을 선물하며 접근했습니다. 계산적으로 친분을 쌓으려고 접근한 것입니다. 요새는 청탁을 위한 친분 쌓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이기도 합니다. 금방 청탁하면 의심하고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몇 년 동안 끈질기게 접근해 미혹하는 것이 거의 스토커나 제비족 수준이고 심지어 사이비교주 수준입니다.

 청탁할 때도 직접 청탁하기보다 동정심과 과시적인 정의감을 교묘하게 자극해 청탁의 마수를 뻗치며 대략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선생님! 억울해요. 우리 회사가 너무 불이익을 받고 제품이 공정한 평가를 못 받고 있어요. 경쟁사는 큰 빽이 있나 봐요. 사회는 참 부조리한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불의한 사람도 과시적인 정의감을 가지고 나설 수 있습니다. 그처럼 위세를 과시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교묘하게 불의한 청탁을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사전작업을 마친 L씨가 최순실에게 2014년 10월에 현대자동차 납품에 힘써달라고 청탁했습니다. 그처럼 친분을 청탁에 이용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면 같이 다치기에 그런 청탁자를 멀리하십시오. 교회에서는 교인들 사이에 불의한 인사 청탁이나 금전 청탁이 없어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나 유명인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익에 사용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동정심을 이용하는 사람도 잘 분별해 멀리하십시오. 의인은 불의한 청탁자를 멀리하지만 악인은 불의한 청탁자와 어울려 다닙니다.

 L씨의 청탁을 받고 최순실이 그 얘기를 대통령에게 했습니다. 그때 대통령은 이렇게 했어야 합니다. “최순실 씨! 앞으로 이런 얘기를 하려면 다시는 오지 마세요.” 그러나 대통령은 경제수석에게 지시했습니다. “K라는 훌륭한 회사가 납품상의 불이익을 받는 것 같아요. 현대자동차 납품이 되도록 알아봐주세요.” 얼마 후 대통령, 경제수석,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과 부회장이 모처에서 만납니다. 그때 대통령 옆에 있던 경제수석이 정 회장에게 말합니다. “K라는 괜찮은 회사가 있으니 현대차그룹에서 협력회사로 채택해 줬으면 합니다.”

 현대자동차는 그 후 나흘 만에 계약을 추진했고 경제수석은 특별 문건까지 만들어 계약 진행상황을 꼼꼼히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결국 현대자동차는 제품성능 테스트, 공개입찰 등의 절차를 무시하고 K사와 수의계약으로 10억여 원의 납품계약을 체결했는데 속으로는 “이런 정부 밑에서는 정말 기업하기 힘들다.”고 탄식하면서 억지로 계약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부품을 납품 받은 후 버리고 손실처리를 했을 것입니다. 그 계약 후 L씨는 최순실에게 4천만 원을 주었고 최순실은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 L씨를 경제사절단에 넣어주었습니다.

 L씨에게 대통령은 자기의 작은 일까지 신경써주는 의로운 백기사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가 교인이라면 “하나님이 기적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라고 간증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 사람 편에서는 대통령이 미담의 주인공이고 왕정시대에 사랑이 넘치는 시혜를 베푸는 따뜻한 왕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대통령도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려운 회사에 시혜를 베푼 이 미담이 왜 잘못한 것이냐?”

 대통령이 오해하는 것은 자기가 누군가에게 시혜를 베푼 미담과 선의를 국민들도 미담과 선의로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탁을 들어준 것을 선의로 여기는 공익의식의 부족이 문제입니다. 불의한 청탁과 의로운 선의를 분별하지 못해 아부꾼의 불의한 청탁을 들어주는 것을 선의의 시혜로 여긴다면 얼마나 불행한 리더의 모습입니까? 리더가 그런 구분을 못하면 불의한 청탁자들의 이용거리가 되고 전체 공동체도 망치며 자신도 언젠가는 추락합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공의와 사랑’ 및 ‘공익과 사익’에 대한 분별의식이 없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친척인 김종필 전 총리가 얼마 전에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지금 혼자서 울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울면서 자기 성찰은 하지 않고 남 원망만 할 것입니다.”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 못하고 “내가 남에게 선의를 베푼 좋은 일을 했는데 왜 그래?”라고 나오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리더는 사랑과 공의를 잘 구분하고 공익과 사익을 잘 구분하고 은혜와 진리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혹시 불의한 청탁을 받으면 잘 구분해서 단호하게 “노!”라고 하십시오. 매정하고 사랑이 없다는 오해를 받아도 공의와 진리와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은 단호히 멀리하십시오. 그것을 구분할 줄 모르고 자기중심적인 선의와 불의한 동정심을 사랑으로 오해하면 리더의 자격이 없게 되고 결국 전체 공동체는 그런 리더 한 사람 때문에 망가집니다.

 성도는 더욱 그런 분별력을 갖춰서 악인을 멀리하고 악행을 거절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공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터전 위에서 빛을 발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진리의 터전 위에서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도할 때도 무조건 “예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예스!”라고 해주신다는 기복적인 믿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회의에 빠뜨렸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는 때로 “노!”도 있습니다. 기도를 불의한 청탁으로 악용하는 기복주의자들에게 미혹되지 마십시오. 때로는 하나님의 “예스!”보다 하나님의 “노!”가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어떤 때는 신실한 성도의 간절한 기도에도 “노!”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노!”라고 하는지 잘 몰라도 그런 조치에도 감사하고 그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 평생의 꿈을 이루는 길 >

 40년의 광야생활이 끝날 무렵, 모세는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칭송한 후 기도했습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이 구절에서 ‘요단 저쪽’은 약속된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을 뜻합니다. 모세는 자신도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 그 아름다운 땅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모세에게 진노하심으로 그의 기도를 듣지 않고 “그만해도 족하니 더 이상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6절). 그때까지의 은혜만으로도 족한 줄 알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고 하셨습니다. 기도응답이란 ‘자기 소원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고 ‘최상의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상의 결과를 주시려고 때로는 사람의 소원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응답의 결과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노!”라고 하실 때 자기를 성찰한 후 자기에게 주어진 꿈과 비전과 사명을 향해 계속 달려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는 것은 모세에게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의 성취를 바로 눈앞에 두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왜 모세는 평생의 꿈을 눈앞에서 놓쳤을까요? 도대체 평생의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분노를 다스리십시오

 왜 하나님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거절하셨을까요?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르비딤 반석 사건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원망하자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그때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며 말했습니다. “패역한 너희는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그때 모세의 가장 큰 실수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분노도 하나님이 주신 감정으로서 거룩한 분노는 필요하지만 절제 없는 감정적인 분노는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각오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만 인정하셨습니다. 르비딤에서의 모세의 분노는 짜증 섞인 분노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가나안 땅에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40분의 분노를 참지 못해 40년간 기다렸던 꿈을 완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적인 분노의 때입니다. 그 분노를 지금처럼 차분하게 잘 다스려 표출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우리 민족사에 그런 국정농단이 없도록 역사적인 기틀을 잘 세워야 합니다. 살다 보면 개인적인 분노의 때도 겪습니다. 그 분노가 의로운 분노라도 파괴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잘 다스려 표출되게 해야 합니다. 의로운 분노가 되게 하려면 분노의 표출 전에 오랫동안의 참는 기간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진실은 한참 후에 밝혀질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분노를 잘 승화시키는 사람이 평생의 꿈도 이루게 됩니다.

2. 말씀대로 행하십시오

 르비딤 사건에서 모세가 저지른 또 하나의 잘못은 입으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 지팡이로 두 번이나 반석을 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성도가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고 하면서 마치 자기가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얼마나 교만한 모습입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하면 수많은 길이 막힙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비스가산은 사해 북동쪽 약 3Km지점에 있는데 그 정상인 느보봉에서는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이 보입니다. 출애굽 역사의 최대 공헌자였던 모세가 눈앞에 가나안 땅을 두고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착잡했을까요?

 가나안 땅은 사람의 공로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죄와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이기에 늘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에서 겸손은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교만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킨 모세를 최종적으로 가나안 입성에서 배제시켰습니다. 불순종 때문에 얼마나 많은 평생의 꿈이 좌절됩니까? 그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십시오.

3. 담대하고 강하십시오

 모세의 평생의 꿈이 좌절되었기에 절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세의 꿈을 계승시킬 새로운 인물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거주했던 곳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였습니다(29절). 벧브올은 '브올의 집'이란 뜻인데 모압의 신인 바알브올의 산당이 있던 모압 평지의 성읍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담대하고 강하게 하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28절).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담대하고 강한 믿음입니다. 손해와 손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고 강하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믿음이란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는 삶을 두려워하니까 미움과 한이 생기고 상처를 입었다고 하고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로 가기 위해 그리고 의로운 편에 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니까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는 최고의 헌신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한 위대한 리더였지만 하나님은 그런 정상참작도 해주지 않습니다. 가나안은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입니다. 율법으로는 가나안으로 향하는 안내자는 되어도 결국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 능력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원천입니다. 그처럼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고 강하게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가도 때로는 하나님이 “노!”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노!” 앞에서 실망하지 않고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라고 믿고 그럴수록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더 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려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노!”가 “하나님의 예스!”로 바뀔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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