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를 겸비하십시오 (신명기 4장 41-49절) < 도피성 구별 및 2차 율법 선포 >
모세는 첫 번째 고별설교를 마친 후 요단강 동편에 도피성 3군데를 구별해 지정했습니다(41절). 도피성은 고의가 아닌 과실로 살인한 자가 도피해 생명을 보호받도록 지정된 성입니다(42절).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도피성 제도’는 어떤 곳으로 도피하면 무조건 보호해주는 고대 이방지역의 ‘성역 제도’와는 다릅니다.
구약 때는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신 19:21).”는 계명에 따라 살인을 통한 개인적인 복수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복수가 복수를 낳아 원한이 깊어지면서 개인의 싸움이 가문의 싸움과 씨족의 싸움으로 커지는 것을 방비하려는 사회적 중재 제도로 도피성 제도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격려하는 제도로서 죄인의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제도입니다.
요단강 동편에 지정된 도피성 3군데는 르우벤 지파를 위한 베셀, 갓 지파를 위한 길르앗 라못,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를 위한 바산 골란이었습니다(43절). 그렇게 도피성을 지정한 후 모세는 2차 고별설교를 합니다(44절). 그 설교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상기시키고 적용시키기 위한 설교였습니다(45절). 왜 모세가 2차 고별설교에서 이전의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다시 상기시켰습니까? 반복된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약속과 규례와 법도를 확실히 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발달된 세상 문화와 젖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 수도 있기에 가나안 땅에서 그 문화에 젖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고 미리 말씀준비를 확실하게 시키려고 그 설교를 한 것입니다. 말씀이 삶에 뿌리내리도록 진리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 안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
< 은혜와 진리를 겸비하십시오 >
‘도피성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얻는 은혜 체험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도피성의 은혜 체험만 너무 좋아하면 세상에서 도피하는 도피자처럼 되기에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얻는 진리 체험도 동시에 필요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겸비된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도피자’가 아닌 ‘세상 속에서 세상을 극복하는 인물’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체험신앙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습니다. 체험신앙이 가진 분열 이미지 때문입니다. 은혜 체험을 중시하는 만큼 진리 체험도 중시하고 전통적인 사역방식도 존중하십시오.
오늘날 교회 분열의 핵심 요인은 영성의 한 측면을 강조해 1급 신자, 2급 신자로 구별한 것입니다. 체험을 내세우는 성령운동은 그동안 교회가 잊었던 부분을 깨우쳐주고 잃었던 부분을 얻게 해주는 공헌도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런 부작용으로 인해 성령운동 자체에 대해 과도한 방어적 면역체계를 작동시키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할 확률도 줄어듭니다. 결국 해답은 은혜와 진리가 겸비된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체험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종교체험이 때로는 정신건강에 역효과를 미치고 정신적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정신적 혼란을 영적 체험으로 믿습니다. 그처럼 병적인 혼란을 순수한 종교 체험으로 혼동하는 것처럼 기독교에 피해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종교 집회에서의 종교 체험이 정신병을 유발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 가짜 신비주의 때문에 신비의 세계를 부인하지는 마십시오.
영적인 능력으로 자기도취에 빠진 인간을 깨워 자신을 직시하게 하고 양심의 불안을 피해 세상에서 도피한 사람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겸손한 십자가의 능력이 아닌 능력은 큰 정신적 문제를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잘못된 영적 능력을 추구하다가 심한 심리적 불균형으로 파멸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어떤 감정적 충격이 가해지면 자기를 다 태워버리는 길로 가기도 합니다.
신앙이 감정의 세계에 머물게 하면 안 됩니다. 영혼의 병은 선한 결단으로 현저히 치유됩니다. 왜 그런 결단을 두려워합니까? 영혼의 병이 종교적인 열광주의로 변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신앙은 나중에 환멸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음의 결단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은 비현실적인 공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체험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현실은 물질주의자의 인격분열을 낳지만 현실이 없는 믿음은 신비주의자의 인격분열을 낳습니다. 믿음도 있고 현실도 있어야 합니다. 은혜도 있고 진리도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겸비된 삶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자기 멋대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주의자나 이상주의자가 되기는 쉽지만 참된 성도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참된 성도가 되려면 영성 추구가 일종의 도피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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