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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누가복음 15장 8-10절

by 【고동엽】 2022. 8. 30.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2001-12-07 23:34:54 read : 364

 

// 20010805

주일 낮예배// 누가복음 158-10

 

< 인간은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들은 <잃어버린 인간의 실상><찾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려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동전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인간이 잃어버려질 때 얼마나 연약하고 처량한 존재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때로 잃어버려지는 상황에 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자기를 붙잡아주는 분에 대한 감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썽꾸러기 자녀가 청개구리처럼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집이 멀어 객지에서 자취를 하는데 부모 품을 떠나니까 처음에는 참 신났습니다.

그녀는 자취방에서 스스로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자취방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그때에서야 어머니의 고마움을 얄미울 정도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자취방으로 어머니의 전화가 왔는데 전화하다가 다시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때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엄마에게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엄마! 오래 사세요."

 

사람에게는 반드시 낮은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패에도 감사하고, 연약함에도 감사하고, 수치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하나님은 약한 곳부터 찾아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약함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거하는 토양이 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신앙은 오히려 깊이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신앙을 원하면 자기 실존의 깊이로 내려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깊이 깊이 내려가다 보면 무엇인가에 목말라하는 내 영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혼을 보는 순간, 그곳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예수님이 없으면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 작은 하나의 의미 >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약혼녀에게 10개의 드라크마로 만든 장신구를 주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러면 약혼녀는 그것을 잘 간직했다가 결혼식 때에 머리에 장식하고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구에 있는 10개 드라크마는 사랑의 정표로 모두 다 소중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의 정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가치, 한 영혼의 가치>를 우습게 알면 안됩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킵니다. 이곳에 그런 작은 불꽃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그분들에게 잘 보이십시오. 특히 약한 자에게는 더욱 잘 보이십시오.

혹시 그분이 보답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늙은 걸인이 오웅진 신부님에게 찾아와 구걸을 했습니다.

약간의 돈을 주어 보냈는데, 그 다음날부터 그분은 매일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무엇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며칠 후 신부님은 그 걸인을 뒤따라가 보았습니다.

그 늙은 걸인은 몇 군데 더 구걸한 후, 공터의 으슥한 천막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을 슬쩍 쳐다보니까 천막 안에는 몸이 불편한 아홉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그 거지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모습을 보고 신부님은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오 신부님은 구걸 온 할아버지와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9명 돌보느라고 힘들지 않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그래도 걸어다닐 수 있는 제가 돌봐야지요."

그 말에 감격하여 신부님은 고통받는 자는 손과 발이 되어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복지 공동체가 바로 충북 음성의 꽃동네입니다.

 

고통받는 자를 위해 누가 그들을 돕겠습니까? 남에게 미루지 마십시오.

고통받는 자를 보면서 무엇인가 나의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그때부터 나의 삶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나라는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분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높은 사람들은 부르지 않고 낮은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이 많이 은혜에 감동할 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용서받은 자가 감동으로 일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약한 드라크마 하나도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

 

그 소중한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상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그 드라크마 하나를 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드라크마를 찾습니다.

 

왜 등불을 켭니까? 그 드라크마가 지금 어둠 속에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왜 집을 씁니까? 그 드라크마가 지금 죄악의 먼지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드라크마가 자기 자리를 벗어나면 죄와 어둠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에덴의 행복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남편의 남편의 자리에, 아내의 아내의 자리에 있어야 가정이 행복합니다.

군인도, 정치가도, 기업가도, 모든 사람들도 자기 자리에 있어야 복이 옵니다.

 

성도에게 가장 소중한 자리는 어디입니까? 주일에 예배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주일에 강단에 올라갔는데 빈 자리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분이 있습니다. 정말 든든합니다.

큰 능력이 없어도 좋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분이 더욱 소중한 분입니다.

 

얼마 전 개그맨 전유성이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에게는 정말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어합니다.

먹지 말라는 것은 더 맛있는 것 같고, 하지 말라는 것은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재미있게> 살려고 하기보다 <의미있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조금 재미없어도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불행의 예고편입니다. 그것이 드라크마의 불행입니다.

 

<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려진 드라크마가 자기가 잃어버려진 존재라는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죄악과 먼지가 가득한 그곳이 행복한 곳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필요한 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드라크마는 비극적이고 불행한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를 찾는 여인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마음에 기억된 존재가 되는 것처럼 더 소중한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게 된 우리는 항상 행복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가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야 합니다.

다른 말은 낭비가 심하고 부작용도 심합니다. 그런 말은 할수록 손해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일깨우는 말을 많이 하십시오. 그런 말은 할수록 이익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해야 하는 말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교인이 교회에 잘 나오다 안나오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아마 그가 잘 나오다가 안나오는 무슨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찾아가서 위로한다면서 엉뚱한 질문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저에게만 말해보세요.

교회에서는 별 사람 다 있어요. 혹시 누구한테 시험 든 거 아니예요?"

 

그런 말은 상대방을 생각해주는 말처럼 들리고 위로해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자기 인기에만 관심이 있는 말이고, 교회 전체로는 바람직한 말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시험 들었다는 그 말을 들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같이 그 말한 사람의 편이 되어 시험 들게 한 사람을 욕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누구 때문에 시험 들었다는 말을 들어도 그 사람 편에 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한테 시험 들었다는 말을 굳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심방 가서 해야 할 말은 "당신이 소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고통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게 하심으로

"내가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문제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고통의 이유를 알려고 여기저기 상담하러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대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살면서 삶의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듣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이며, 누구의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곧 먼지로 돌아갈 존재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차원이 높게 된 짐승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그 가능성은 현실이 되어서

우리는 이제 멋들어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 영혼 구하는데 힘쓰십시오 >

 

우리를 향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영혼을 찾기에 힘써야 한다는 도전을 줍니다.

우리도 등불을 켜야 합니다. 열심히 구석구석을 관심과 사랑으로 훑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에 나오는 대로 부지런히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합니다.

전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도 있고, 변명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 나의 신앙의 나태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과 사랑과 충성을 우리는 무엇보다 전도의 현장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1921년 뉴욕 할렘가 싱싱 교도소에 루이스 로웨스라는 사람이 소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캐더린 로웨스였는데 그녀는 재소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캐더린은 재소자 중 한 명이 장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 그를 찾아가 캐더린은 점자책을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점자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얼마 후 캐더린은 재소자 중에 귀머거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곧 그녀는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성경을 알려주었습니다.

점차 재소자들은 그녀를 하나님이 싱싱 교도소에 보낸 사랑의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1937, 캐더린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그 사실이 교도소 전체에 알려지자

그날 하루 종일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는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장례식이 치러질 때 교도소 정문에는 재소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임시 교도소장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눈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교도소 문을 열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장례식장에 참석해도 좋소. 그러나 오늘 밤 안으로는 다 돌아와야 하오."

그리고 그날 밤 재소자 점호가 있었는데 한 사람도 이탈자가 없었습니다.

 

그 뒤 악명이 높았던 싱싱 교도소는 가장 모범적인 교도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증인의 삶을 살았던 캐더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성도는 삶의 현장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증인의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삶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이 사랑하는 영혼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말만 하지 마십시오. 생각만 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으로 찾아 나서십시오.

믿음은 말이 아닙니다. 생각도 아닙니다. 믿음은 실천이요 행동입니다.

그럴듯한 신앙인의 모습보다 한 영혼을 구하려는 자세가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 전도는 하지 않는다면 모순이 아닐까요?

 

해방 전후에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말을 잘 하는 논객이 두 명 있었습니다.

한 분은 양주동 박사와 또 한 분은 채필근 목사님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어느 토론장에서 말 대결을 합니다. 관객이 보니까 막상막하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양주동 박사가 조금 나은 것 같았습니다.

결국 채필근 목사님이 토론에서 패배를 시인하며 말합니다.

"졌다! 졌어! 양주동이 양 주둥아리로 공격하니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다!"

그 마지막 말 한마디로 채필근 목사님이 토론에서 판정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최권능 목사님이 평양시내에서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채필근 목사님이 지나가니까 최권능 목사님이 채필근 목사님에게

항상 하듯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대뜸 소리를 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채필근 목사님이 "제가 채필근 목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압니다! 그러나 전도 못하면 벙어리 목사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도하지 않는 벙어리 신자는 아닌지 항상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몇몇 그리스도인에게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첫 번째 기적이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기적이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세 번째 기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도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며 사는 정상적 성도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

 

결국 이 여인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다고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아마 잔치를 벌이느라고 수십 드라크마가 들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혼을 찾기에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대가를 치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거지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찾아 왔습니다. 천 원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돈이냐고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천 원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저보고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고 저에게 핀잔을 줍니다.

얼마의 돈을 가지고는 거지의 마음도 얻기 어려운 각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몇 푼의 물질을 가지고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하나님이 가진 자세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은 정말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대가를 치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또한 줄 줄 알아야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의 유머입니다. 만두 장사가 제일로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속 터진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 유머를 듣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속이 터질까?"하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만두피가 든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신앙의 속이 터집니까? 실천의 옷을 입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없으면 그 인생은 속 터지는 인생이 됩니다. 부끄러운 인생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사랑의 실천이라는 옷도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 진실한 사랑의 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그 옷을 갑옷처럼 만드십시오.

 

어떤 분은 그런 옷은 입지 않고, 교회에 와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논쟁거리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주보에 오자가 있나? 예배 시간에 복음성가를 꼭 불러야 하나?

피아노는 왜 저쪽에 놓았나? 왜 예배 형식이 이런가? 왜 이런 행사를 하는가?"

정말 속 터지는 인생이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상하게 하는 인생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종류의 것들에 신경을 쓰고 집착하면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그것을 사수해 보겠다고,

파당을 만들고, 교회정치를 하고,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 있다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줄 알고 사는 인생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생명이고, 소망이고, 평화와 사랑임을 알고 따르는 인생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우리가 정말 그런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주님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획기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면

이제는 비본질에 집착하기보다는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처럼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 때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들어주시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축복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사랑 받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널리 확산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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