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롬 3:9~20)
제가 대학교 입학했던 첫해에, 저자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한 번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교과 과정에 필요하거나 교수님이 읽으라고 권해서가 아니라, 그냥 서점에 갔다가 그 책을 우연히 보는 순간 그 책의 제목이 너무나도 멋있고 호기심이 끌려서 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때에는 그 책을 아무리 읽어보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그때 내가 읽어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몰랐던 그 책이 도대체 무슨 책이었을까?’하고 한 번 다시 찾아보려 했더니, 꼭 같은 제목의 책들이 여러 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정말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져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이 질문에 대한 책을 쓰게 되고, 그런 책 제목만 보고도 도대체 어떤 대답이 쓰여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서 당장 한 권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하여 스스로의 판단과 정의를 내려 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지만, 아무도 명확한 답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식으로 인간 자신이 모든 철학의 대명제가 되어서, 인간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고, 인간 자신이 중심이 되고, 인간 자신만을 사용하여 그 질문에 대한 사색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보려고 하니까 정확하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옷 한 가지를 입어도 남이 보아 주어야 전체의 매무새와 뒷모양까지 더 잘 보아 줄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묻고 스스로 판단하려 하니 자연히 어려운 질문이며 불완전한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가장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남의 눈’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정확하게 인간을 관찰하고 인간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대전제’를 먼저 세운 후에 사람을 그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고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3장 1-8절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주이시다.’라는 대명제로 모든 불신앙적인 질문과 불의한 반발을 물리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이러이러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이 인간의 모든 논리나 이해를 초월하는 절대적 진리 선포인 것입니다. 바로 그 전제,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고 오직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그 대전제를 가지고 ‘그렇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라고 질문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요긴한 대답, 즉 ‘성경적 인간관’을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쳐 주는 두 가지 대답을 함께 깨닫고 기억하고자 합니다.
1. 인간의 본성은 다 죄 아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 그 자체입니다. 바로 로마서 3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증거한대로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사도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조금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의 8절에서도 「우리」라는 말을 있는데, 거기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당하고 있는 ‘사도 바울과 기독교인’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본 9절 하반절에서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할 때의 ‘우리’도 물론 ‘사도 바울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될 것이므로, 9절 상반절의 「우리」 역시 같은 뜻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과 헬라인 즉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근본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단언했습니다. 「다 죄 아래 있다」고 했으니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 자신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더 나은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든지 안 믿는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꼭 같은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사람이 죄 아래에 있다.’는 표현은, 죄가 사람 위에서 사람을 지배하고 있고 사람 위에서 사람을 내리 누르고 있고 사람 위에서 사람을 파괴시키는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생이 예외가 없이 다 이 죄 아래 묶여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구약 성경에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0절로 18절의 말씀은 구약의 시편, 전도서, 그리고 이사야서의 말씀들 중에서 이와 같은 사람의 죄성(罪性)을 진단해 주는 구절들 예닐곱 개를 뽑아서 한데 모아 놓은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3장 10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들이 사람의 본질적인 죄성에 대하여 선포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 그 이유가 무슨 윤리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거나 결여가 되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된 사람이 그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찾지 않는’ 바로 여기에 죄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편에서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을 먼저 찾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자기 딴에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교만하는 가운데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타락성’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죄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그 심령과 감정과 양심과 의지와 판단과 행동에 이르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타락시킨다는 뜻입니다. 혀와 입으로 나오는 말, 그 발이 달려가고자 하는 방향, 그리고 그런 행위 끝에 결국 파멸과 고생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 인생 전 과정의 구석구석에 바로 이 죄가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심령과 신체의 그 어느 한 부분이라도 죄로 인한 타락의 더러운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이 인용된 구약 성경 구절들에서 셋째로 밝히는 것은, ‘죄의 보편성’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에서 시작하여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라는 말씀, 그리도 계속 재삼재사 반복되는 표현들, 「없고, 없나니, 없도다」라고 한 말씀들이 이 사실을 여지없이 증거해 줍니다. 즉 이상과 같은 죄성은 ‘모든 사람에게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성별에, 인종에, 혈통에,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이러한 죄성을 다 꼭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죄성들을 종합해서 한 마디로 말할 때, 신학적 용어로 ‘완전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불의한 존재이며 그 인격으로부터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 타락해 있으며 이런 죄성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사람마다 다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켜,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바로 ‘완전 타락’이라는 이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이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먼저 절실히 깨닫고 겸손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직 기독교만이 이런 인간관을 가르칩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에 대하여 논할 때, 이 죄 문제를 먼저 인식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냥 바로 선의 단계로 뛰어넘어가려 합니다. ‘사람이 종교를 통하여 얼마나 착해질 수 있는가?’ ‘사람이 어떤 선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라는 것에만 처음부터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는 결국 ‘윤리적인 종교’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안에도 그런 수준의 종교생활에 머무는 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교회의 제일 사명이 사회사업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그 예산 중에서 구제에 쓰이는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해서 그 교회가 마치 가장 이상적인 교회인양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난이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결코 가난과 병이 아니라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교회는 바로 그 죄 문제 해결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하며, 그 십자가 대속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전도와 선교에 교회가 가진 모든 힘과 정성과 물질까지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함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 아무리 신심이 깊다 하는 종교인이라 해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이것부터 먼저 철저하게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의 최고 은혜인 이 십자가가 왜 은혜롭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게 됩니다. 십자가 은혜는 바로 ‘죄 용서함’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십자가라는 것이 무슨 은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인죄론’이 없는 종교는 회개 없는 종교, 은혜 없는 종교, 눈물 없는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 자복’의 애통과 ‘죄 사함’의 은총 없이, 그저 ‘선’만 내세우는 종교는 그야말로 바리새적인 율법 종교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죄 아래 있다.’라는 이 성경 말씀의 선포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정확하게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고 그 죄사함의 은총,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만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이 최고 최대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인간의 운명은 다 심판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 된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만 사람에게 꼭 같이 임하게 되어 있는 미래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과 20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율법 아래 있는 자」라는 말은 ‘법적으로 율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율법이 적용되는 모든 영역에 속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법의 관할하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결국 ‘율법이 선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율법이 말하는 바」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타락한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이라는 요소는 바로 이런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선행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커트라인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구원 얻을만한 의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만큼 사람은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사람이 그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확실하게 인정하고 겸손하게 고백하게 된다면, 율법이 말하는바 또 하나의 사실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라는 사실 역시 자동적으로 믿게 됩니다. 여기 「온 세상」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온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말 역시 아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의 권위, 영향력, 지배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그 죄로 인하여 심판 받아 마땅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아예 「모든 입을 막고」 선포합니다. 즉 자기 딴에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 자기는 결코 죄인도 아니고 심판받을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든 교만한 입들을 막아 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의를 그 어떤 사람도 결코 완벽하게 이룰 수 없음을 명백히 드러내 줌으로써, 자기 양심만 가지고도 하나님과 같은 수준의 의에 이를 수 있으니 자기는 하나님 안 믿어도 심판 따위는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 건방진 ‘입들이’ 감히 그런 소리 꺼내지도 못하도록 아예 처음부터 꽉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 여기에 그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없고 그 어떤 이의를 달 수도 없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일 많이 하고 사해동포주의로 살려고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자기 같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지옥 간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된다고 대어드는 사람 역시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완전타락’을 믿으면 ‘전 인류의 심판’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추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너무 심한 일’이라든지 ‘하나님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심판이 내려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약하거나 하나님의 이해심이 부족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사람이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필연적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한 명도 예외가 없이 각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자신의 최종적 운명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있어야 만이 그 마지막 심판을 위해서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있으며, 그렇게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야 만이 그 인생을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날을 대비하면서 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평생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역사적 최종 권위가 바로 심판에 집약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생명에 대하여 소유하고 계시는 주권의 최종 적용 행위가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런 심판권을 인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변명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지극히 만만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심판 아래 있다.’라는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의 최종 미래를 바로 깨달음으로써,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며 생활에서는 진짜 의와 선을 행하고 살 줄 아는 신실하고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 - 이보다 더 사람의 근본적인 본성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는 말씀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 아래 있다.’ - 이보다 더 사람의 필연적인 운명을 정확하게 일러 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 인생과 이 인간 사회에 정말 가장 큰 문제, 제일 심각한 문제가 과연 무엇입니까? 식량 부족, 자원 고갈, 환경 오염, 핵무기 등이 인류 사회가 당면한 최악의 문제라고 떠드는 소리들이 우리 귀에 매일 같이 왕왕거립니다. 민족 감정, 인종 갈등, 윤리 부재, 도덕 타락, 교육 부족, 소외감, 실직이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급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종교 창시자는 소위 크게 깨달았다면서 말하기를 사람에게 욕심이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의 시작이고 그 욕심만 없애면 모든 고통도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어떤 세상 철학자들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존경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고 나아가서 전인류애를 함께 나눌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들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 틀린 말이며 완전히 빗나간 진단들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문제는, 우리 삶의 문제와 우리 존재의 문제점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어 있다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 하면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길이 없을 만큼 극도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라는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있으며, 다른 부차적인 문제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이 사실을, 이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며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심판 아래에 있다.’ - 성령께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내려 주시는 이 진단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십자가 대속을 통한 은혜을 충만히 누리며 심판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석시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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