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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69쪽에 있는 글입니다.
39.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간관계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올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장 14~21절
우리가 사회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능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두뇌를 갈고 닦고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을 잘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10%인 데 비해 대인관계를 뛰어나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85%에 이른다." 대인관계를 덕스럽게 잘함으로써 성공하는 사람이 머리가 좋고 똑똑해서 성공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조사 자료를 보면 직장에서 일을 능력 있게 하지 못해 해고 당하는 경우보다, 대인관계를 잘하지 못해 해고당하는 경우가 거의 두 배나 된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대인관계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인간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가지고 중요한 진리를 하나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신자들과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 결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교회 안에만 갇혀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 흩어져서 매일매일을 삽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와 사귀려고 하기보다는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더 많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결코 친해지기 쉬운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친해질 수 없는 가능성이 더 큰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이 이미 사회생활을 통해서 많이 경험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이번 휴가를 이용해서 중국에 잠깐 들렀습니다. 한중수교가 되어서 그런 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길림성에는 연변 조선족자치구가 있습니다. 그 자치구에 우리 교포가 약 2백만 명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의 중심 도시가 연길 시입니다. 연길 시에 제가 며칠 동안 묵으면서 그 지역의 고위 공산당 간부와 교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연변 자치구의 공산당 서기장이라면 그곳에서 지위가 제일 높은 사람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 세계에서는 아주 막강한 사람인데 그분이 김진경 박사님과 저를 특별히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아 아주 큰 고급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 밑에서 일하는 7, 8명의 공산당 간부들도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목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거기서는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저는 '옥 선생'으로 통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는 골자는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술을 즐겨 마셨습니다. 그 독한 술을 옥 선생 앞에도 따라 놓는데 초면에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사가 시작되면서 "자,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건배합시다!" 하는데 제가 평소에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해 본 일이 있어야지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건배 정도는 해 주어야 하겠는데 이것도 자주 해 봐야 능숙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건배를 하긴 했지만 술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건배를 한 번만 하고 끝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건배 횟수는 자꾸 늘어 갔습니다. 약 2시간 동안 식사하고 대화하면서 아마 건배를 대여섯 번은 한 것 같아요. 저는 그 일을 겪으면서 우리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우리 남자 교우들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겪을까 하는 것이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제가 끝까지 술을 안 마신다고 하니까 서기장이 "옥 선생 같은 분은 어려워서 사귈 수가 없어요." 그러더라구요. 반농담이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서기장 양반, 말은 바로 하는군요. 그래요, 우리는 호락호락하게 사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랍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자
우리는 불신자와 쉽게 사귈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신자와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와 불신자와의 인간관계에 두 가지 대원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8절).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급적이면 적을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려고 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잘 지내다가 끝내 원수가 되는 사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주님께서도 인정하신 사실입니다.
그래서 "비록 한계가 있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 수 있거든'입니다. 비록 어려움이 따른다 할지라도 가능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 원리대로 살지 않는 분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자매가 전도를 하려고 이웃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분이 불쑥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우리 아파트에 사랑의교회 순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싸움을 너무 잘해요. 저는 우리 동네에서 그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어요. 그런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저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싸움을 잘합니까?"
전도하러 갔다가 날벼락을 맞아도 유분수지, 그는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혹시 이 사람이 어떤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모함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주변의 몇 분들에게 확인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사회에서 그렇게 적을 만들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 우리가 불신자들을 대면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악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이 악하게 대한다고 똑같이 악해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불신자들이 설혹 악하게 대한다 할지라도 선으로써 그 악을 이기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악하다고 해서 똑같이 악해지면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모든 사람들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악하게 대한다 할지라도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본문에는 이 두 개의 큰 원리가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두 원리를 유념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이웃이 되라
이 두 원리를 중심으로 실제적인 행동 지침이 나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행동 지침을 본문은 네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네 가지 지침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논리적인 순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을 내용상 쉬운 것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말씀을 대하면 기가 죽어버리니까요.
첫째, 겸손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16절).
즉 잘난 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웃을 보고 '나는 너하고는 달라' 하는 식으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인간은 누구나 다 으스대고 싶어 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기를 꺾이지 않으려는 본능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남에게 짓밟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 못 견디는 본성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나는 너보다 낫다는 우월 의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고, 또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릅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합니다만 실제로 "네가 겸손한 이웃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어 보실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교만한 자 앞에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부끄럽게 여기는 문제는 겸손하지 못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별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되어도 별수가 없습니다. 저도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합니다. 그러나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보면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 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목사지만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이 겸손한 이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백두산을 관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연길 시에서 백두산까지 가려면 장장 네 시간 내지 다섯 시간을 자동차로 달려야 합니다. 비포장 도로여서 편안한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저희 일행 중에는 미국에서 온 어떤 목사님과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일하는 박사 두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근사한 밴을 타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난데없는 불청객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택시로 갈 예정이었는데 우리를 발견하고는 우리 자동차에 동승하기를 원했습니다. 택시로 가면 참 고생스럽거든요.
밴은 운전자 옆자리가 특별석입니다. 그 좋은 자리에 제가 앉아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오길래 제가 인사를 하려고 내렸는데 그 둘 중에 한 사람이, 그것도 젊은 사람이 "이 자리에는 내가 타겠습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저의 짐을 뒷자리로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 자리에서 싸울 수도 없고... 그래서 "타십시오" 하고는 뒤로 밀려났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요. 제가 진짜 겸손한 사람이라면 안 믿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을 텐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네 시간 동안 계속 제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저런 고약한 사람이 어디 있어? 정말 얌체족이야' 라고 그 사람을 욕을 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그러고도 네가 목사냐?' 하고 자책을 합니다. 이 둘이 계속 싸우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 꼴이라면 평신도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하는 것을 저는 그때 많이 느꼈습니다.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이웃 앞에서는 겸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교만하지 말라. 잘난 체하지 말라. 이웃을 위해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라
둘째,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5절).
우리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는가, 안 주는가를 테스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웃이 아주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울어 줄 수 있는가, 또 이웃이 참 좋은 일을 만났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면 마음을 주는 이웃인가 아닌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상대가 어떤 이웃이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집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이웃이 슬픈 일을 당하면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이웃이 비극적인 일을 당했을 때, 그때에도 진정으로 이웃의 슬픔에 동참하며 위로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양심적으로 대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볼 때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동정을 표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비해 아주 어려운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웃이 기쁜 일을 당했을 때 진정으로 축하해 주며 기뻐하는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살았던 크리소스톰이라는 설교자는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마디 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 쉽다. 우리가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매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
그의 말이 옳습니다. 이웃이 당한 슬픔보다 이웃이 당한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논을 사서 부자가 되면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이 잘되는 것을 은근히 싫어하고 견제하는 심리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형제를 보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들 형제는 두 분 다 목사입니다. 그러나 동생이 시무하는 교회는 부흥이 잘되는 편이고 형님 교회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형님이 동생 교회가 잘되고 은혜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끼리도 이런데 남남끼리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랑은 "다른 사람이 진정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참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비극은 형제가 예배 드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동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형이 그 동생을 죽이는 데서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그들은 형제였습니다. 그것도 오늘날처럼 사람이 많아서 발에 차이는 시대가 아니라 인구가 극히 희소한 시대에 그러했습니다. 사람 하나가 너무 귀하고 소중한 시기였는데 가인은 자기보다 동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못 봐 주고 결국 그를 해치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의 비극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십니까?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웃에 우는 자가 있으면 진정 슬퍼하는 자가 되고, 기뻐하는 자가 있으면 진정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웃이 잘되는 것 때문에 은근히 마음속에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서 그의 상처를 고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형통하게 보이는 이웃을 볼 때마다 질투가 생기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께서 그의 마음도 다스려 주시고 깨끗케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
셋째,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
핍박은 원래 신앙의 문제로 인해서 받는 박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아무 이유 없이 믿는 우리를 괴롭히고 암암리에 손해를 입히는 온갖 외부적인 압박을 일컬어 핍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핍박을 가하는 사람을 놓고 과연 축복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는 정말 가슴이 답답합니다. 저는 사실 경험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좋은 물건을 빼앗긴 적도 없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적도 없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뺨 한 대도 맞아 본 적이 없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핍박을 당할 때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전도사님은 유신 정치 때에 붙잡혀 가서 모진 고문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당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 소리를 듣고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할 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저주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전도사를 떠나서 한 인간입니다. 그분 말에 의하면 자기도 모르게 계속 저주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네 처를, 네 자식을 가만히 둘 줄 아느냐?" 하고 저주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핍박을 당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베드로전서 2장 23절 말씀이 가르쳐 줍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은 핍박을 당할 때 결코 저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부름받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는 복을 빌어야지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신분에 저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말대로 쉽게 잘 안 되지 않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이 말씀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당신의 입에는 저주가 많습니까, 축복이 많습니까? 야고보가 탄식한 것처럼 우리는 저주를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 3:9, 10).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마땅치 않은 짓은 안 하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된다고 믿습니까? 내가 축복하면 상대방이 복을 받고 내가 저주하면 상대방이 저주를 받게 되나요? 누가복음 10장 5, 6절을 한 번 보십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 10:5, 6).
평안을 빌 때 평안을 받을 사람이 그 집에 있으면 축복하는 것이 그 집에 임하게 되고, 만약에 그 집에 있는 사람이 받을 자격이 없으면 그 축복이 복을 비는 사람에게 돌아온다고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축복을 하면 상대방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축복받을 자격이 없으면 대신 복을 비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축복은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저주로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저주를 하면 상대방이 저주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닐 때는 그 저주가 저주하는 사람에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저주는 하면 할수록 저주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는 안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축복을 많이 해야지 저주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우는 이웃이 되라
넷째,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우는 이웃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19, 20절).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원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술에 취해서 함부로 운전하다가 내 사랑하는 아들을 평생 불구자로 만들어 놓았다면 심적으로 벌써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어렵습니다. 중상모략을 해서 아버지의 정치 생명을 끊어 놓은 모리배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얼굴을 돌려버립니다. 벌써 심적으로 원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남의 이야기로만 보지 마십시오. 나에게는 절대 원수가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다 원수가 있을 수 있고,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능에는 강한 보복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복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 복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원수가 생길 수는 있지만, 그 원수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권리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갚으려다가 잘못하여 더 큰 화를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우리에게는 이렇게 공정하게 원수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더 갚았으면 갚았지, 덜 갚지는 않습니다. 공정하게 원수 갚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맡겨야지 우리가 스스로 칼을 들고 나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갚지 말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를 주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계 13:10).
칼을 가지고 복수를 한 사람은 반드시 칼로 망합니다. 설령 원수를 갚았다고 합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들입니다. 결국은 서로 죽이고 해치는 일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연속될 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평안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억울한 일 모두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좋은 이웃으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재산을 꽤 모아서 한때 세겜 성 앞에서 거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외동딸인 디나가 세겜 성을 구경하려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관광을 하는 중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겜 성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한 이스라엘 사람이 할례도 받지 못한 이방 사람에게 욕을 당했으니 그 충격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들은 야곱의 열한 아들 가운데 레위와 시므온이 분을 참지 못해서 결국은 복수를 단행합니다. 밤에 들어가서 그 성 안에 있는 남자들을 다 죽여버렸습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속이 후련할텐데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경건한 족장들은 복수하는 것을 대단히 경계했습니다. 야곱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복수를 한 두 아들을 장하다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건은 그에게 한시도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그 사건이 터진 지 70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야곱의 나이 147세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숨을 거두는 임종의 자리였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는 복수의 피를 흘린 두 아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음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6, 7절입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6, 7).
후손의 복을 비는 자리에서 야곱은 두 아들을 저주했습니다. 그만큼 복수하는 것을 죄악시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8).
형제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향한 철두철미한 신앙으로,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원수에 대해서 복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이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갖다 주면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얹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뜨거운 화로를 머리에 얹은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화들짝 놀라며 길길이 뛰겠습니까?
머리에 숯불을 얹는다는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공감하는 견해는 이렇습니다. 원수인 줄 알면서도 가서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면 그 사람은 머리로부터 전신이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불에 녹아버린 마음에는 복수의 칼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공급하면 원수의 마음을 녹일 수 있고,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할 수 있다
저는 이 설교를 위해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주님, 저는 못해요. 이 말씀대로 못 살아요. 저는 안 됩니다. 제가 안 되는데 어떻게 설교합니까? 겸손한 이웃이 되라고요? 그것은 조금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라고요? 그것도 조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고요? 안 당해 봐서 모르겠지만 참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원수에게 먹이고 마시우라고요? 아직 안 당해 봐서 모르겠지만 제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목사인 저도 못하는데 제가 이 설교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왜 이처럼 엄청난 명령을 하고 계시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이것은 한결같은 부모의 욕심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자기 자녀 삼으시고는 바라는 바가 대단히 많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불신자들과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자기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4, 45).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의 모습을 본받아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이토록 어려운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어려운 명령을 하시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 명령이 어려워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억울하게 죽으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을 보고 이를 갈며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하고 오히려 원수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중심을 다스리면 우리는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고, 축복하는 이웃이 되고, 원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이웃이 되고, 축복하는 이웃이 되고, 원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어려운 명령을 하시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한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미운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결국 둘 다 망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할 수 없다고 체념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만약 순종을 안 하면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깨뜨리는 불행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출처] 39.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간관계|작성자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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