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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랑과 배신/요한복음 13장 21-30절

by 【고동엽】 2022. 8. 30.

사랑과 배신// 20010411

2001-12-08 17:18:24 read : 172

 

수요일 저녁예배// 요한복음 1321-30

 

자기의 죽음의 때를 알고 잘 준비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인 모습입니다.

유월절 전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죽음을 준비하시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13:1).

이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그 끝까지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감동이 될 텐데

가룟 유다는 그 주님의 모습에 감동하지도 않고 오히려 삐딱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은 지극하신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줍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주님의 지극한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발을 씻겨주시고 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주님께서 마지막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겸손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니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리고 15절에서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죽고 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겸손을 잃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1316절 말씀도 자세히 묵상해 보면 결국 겸손해야 된다는 말이고,

17절 말씀도 계속해서 겸손한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의 핵심은 바로 겸손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한 유언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하는 당부입니다.

 

이 세상에 왜 사단이 있게 되었습니까?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게 되었습니까? 18절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을 보면 유다의 배신도 교만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말로만 "주님의 영광!"을 외치면서 겸손한 척하는 그런 겸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말로는 겸손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겸손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무엇인가 겸손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스스로는 그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니까 그 생각 차이에서 항상 상처와 갈등이 생깁니다.

 

높은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부딪칩니다. 잘 부딪치는 것은 결국 겸손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환경과 상황이 펼쳐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들과 이리 저리 자주 싸우고, 부딪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겸손한 모습일까요?

겸손이 없으면 갈등이 많고 겸손하면 갈등이 적다는 우리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인도 답답할 노릇입니다. 자기는 스스로 분명히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과 오래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주 갈등이 생기니 답답합니다.

그 이유는 본인은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하지만 남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에 대한 안목을 갖추지 못하니까 교회생활에서 여기저기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상처와 갈등이 많으면 문제점을 인식하고 최대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지혜인데

여기저기 갈등이 생기는데도 자기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니 문제 해결이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처럼 겸손한 사랑을 강조한 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아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제자들이 서로 쳐다보면서 누구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인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의심하면서 주님께 질문하는 장면에 4복음서에 다 나와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 2622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묻습니다.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이 말을 자세히 묵상해보면 하나같이 자기는 아닐 것이라는 그런 식의 질문입니다.

자기 성찰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남 탓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남 탓만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어떻게 공동체의 평화가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주님께서 "서로 발을 씻기라"고 마지막 유언의 당부를 하셨겠습니까?

 

오늘날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책임과 핑계와 남만 탓하는 비판입니다.

일을 맡으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일을 책임지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고 떠넘기는 사람만 있으니 남 탓만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서로 탓하면 어떻게 됩니까? 싸움과 갈등과 상처가 끊임없이 생깁니다.

아무리 깊은 애정관계라도 무책임과 핑계만 있으면 그 관계는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곳에 두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가정에서는 날마다 기쁨과 웃음이 넘치는데 다른 가정은 자주 싸웁니다.

어느 날 싸우는 가정의 남편이 화목한 가정의 남편에게 화목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화목한 가정의 남편이 "우리 집에는 죄인만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무슨 잘못이 생기면 그 가정에서는 서로 자기 잘못이라고 합니다.

즉 문제가 생기면 부부간에, 고부간에 서로 "내가 잘못해서"라고 생각하고 말하니까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때 "정말 당신이 잘못했지요?"라고 윽박지르겠습니까?

아닙니다. 상대방도 "당신이 무슨 잘못이요. 내가 더 잘못했지."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정에도 문제가 생기기는 하지만 문제가 있어도 항상 화목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을 보십시오. 이 원리는 어디에 가든지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의인이 넘치는 곳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잘못해서 그렇지."라고 말하는 죄인이 많은 곳에는 싸움이 금방 그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경험해서 잘 아는 바와 같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높은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에서는 갈등과 불화와 상처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낮은 사람들만 모인 곳에는 갈등과 불화와 상처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기독교의 또 하나의 역설적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높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결국 영적으로 낮은 사람이고,

영적으로 낮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결국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설적이지만 당연한 진리이고,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그렇게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 프랜시스가 한 말을 길이 되새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성 프랜시스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예수님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그 질문을 받고 그가 대답합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네."

제자들이 다시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겸손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가 다시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한 번만 진실하게 쳐다보게나. 그러면 교만할 수 없네."

 

성자의 삶은 의인을 자처하고, 높은 사람임을 자처하는 자세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좋은 일이 생기면 "당신이 잘해서!"라고 말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내 탓!"이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의 비결입니다.

 

그때 가룟 유다도 자기 속마음을 감추고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묻습니다(26:25).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한 존경심이 넘쳐서 "주여 내니이까?"라고 하는데(26:22),

오직 가룟 유다만은 일상적인 어투로 주님에게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합니다.

벌써 이 호칭에서 예수님에 대해 비뚤어진 시각을 가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팔 계획을 해 놓고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진실하지 못한 모습입니까? 이런 모습은 차마 보아주기가 힘듭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는데 뉴저지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해줍니다.

"교회에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에너지는 빼지만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진실하지 못한 것은 저는 목회하면서 참을 수 없습니다.

즉 사람 앞에서는 친절한 척 하면서 그 사람 뒤에 가서는 온갖 불평을 다하며

잘못된 영, 잘못된 공기를 주변에 퍼뜨리는 사람을 보면 정말 참기가 힘듭니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그 목사님은 어떤 한 분에 대해서 그렇게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을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 뒤에는 이상하게도 항상 그분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견디기 힘들어서 다른 분을 통해서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분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는 악한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뒤에서는 또 다른 행동을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싹싹하고 친절한데 모든 문제 뒤에는 그분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목사님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밤늦게 함께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린 것은 앞에서 싹싹하고 뒤에서 찌르는 것은 야망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런 분들은 삶의 기본 틀이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힘을 키우는데 관심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싹싹하게 보여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항상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처럼 삶의 기본 틀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으니까 본인도 모르게 그 야망이 표현됩니다.

자기는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나중에 보면 교회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가는 곳마다 교회에 잘못된 공기가 퍼지고 공동체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삶의 틀에 교회적 자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는 오늘날 많은 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보편적인 어려움인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죽고 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참고 또 참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에 어려움이 예상될 만한 행동은 최선을 다해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물론 완벽하게 진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고, 한 사람의 앞날을 위해서 진실을 덮어둘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과 불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고, 공동체를 흔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어떻든 우리는 항상 진실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마귀의 조종으로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가졌다가

주님께서 떡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순간에 완전히 사단의 포로가 됩니다.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장면에서 은혜의 공동체에서 철저히 따돌림당하는 유다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여기에서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기 야망이 컸던 한 인물이 비뚤어지게 행동하다가

스승을 배신하고 은혜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가는 쓸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고 겸손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왜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했을까요?

어떤 분은 주님의 모습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어떤 분은 똑똑하고 계산에 밝은 가룟 유다가 자기 앞날을 계산하고 배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팔고 죄책감에 젖어 있다가

스스로 목매어 자살한 것만 봐도 그가 생각 없는 가벼운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자기가 생각하는 의에 대한 신념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즉 자기 의의 기준으로 볼 때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심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배신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자칭 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가지고 비판을 잘하는 사람들이 대개 배신을 하는 것을 봅니다.

 

가룟 유다가 얼마나 의인인 체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으니까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왜 그 아까운 돈을 허비하느냐? 차라리 가까운 사람에 주면 좋지."라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그 말을 옳은 것 같고, 그 말에 동조하는 사람이 꽤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구원의 의미, 사랑의 의미, 헌신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 사랑, 헌신의 문제에서 "! !"하면서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 생각은 가룟 유다가 가진 사람 중심적인 생각이 될 수 있고,

그런 생각이 자기 의가 되어 비판하다 보면 결국 주님까지 배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잘 싸우고 입을 삐죽거리는 사람은 대개 어떤 사람들입니까?

교회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의의 기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의의 기준이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가지고 잘못 사용하는 일이 많아진다면

차라리 나의 의의 기준을 잠시 놓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일을 잘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하는 요건이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주고, 소망의 말을 하고, 위로와 격려는 주는 성품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누가 이렇대."라고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2천년 전에 주님을 못박았던 사람들의 행위와 사실상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덮어줄 줄 아는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비판하기보다는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정말 우리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봐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는 담임목사가 있고, 그 주변에는 최측근의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교회의 분위기를 상당히 좌우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분들입니다.

사람들은 담임목사가 교회를 섬기면서 뻔뻔하게 돈 얘기를 마구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 뒤에 교회 재정부의 요청이 있는 것까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돈 얘기를 하기까기는 그 얘기가 이면에 수많은 사연이 숨어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연들은 다 거두절미하고 "목사님이 강단에서 돈 얘기를 했다"고 불평을 하면서

마음이 돌아선 분도 있는데 그런 모습을 진정 의롭고 깨끗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돈 얘기를 안 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성도가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태에서

돈은 없고 수술비는 2천만원이 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얘기까지 안합니까?

우리는 사물을 단편적으로 보는 시야와 성급한 판단을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인간관계의 갈등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불평이 예상되는 조치를 내릴 때에

담임목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이유 없이,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 파악이 없이

그런 조치를 내리는 줄로만 생각합니다. 담임목사도 정상적인 인간인데 과연 그럴까요?

이 세상의 모든 담임목사는 철로 된 심장을 가진 사람입니까? 왜 아픔을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담임목사 주변에 넓은 마음을 가지 사람, 비전의 눈이 열린 사람,

사랑과 용서를 아는 사람, 이해력이 넘치는 사람이 많이 포진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교회의 큰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이 교회에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도 한 때 주님을 사랑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어찌 주님의 12제자에 포함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의가 너무 지나쳐서 결국 그는 주님을 배신하고 실패의 길로 갔습니다.

우리에게도 가룟 유다에게 있는 본능이 다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서로 발을 씻기는 겸손한 성품'을 다시 새롭게 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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