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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이해편◑/Comprehensive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삶(요한일서 5:4).

by 고동엽 2026. 2. 6.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삶(요한일서 5: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삶”(요한일서 5:4)이라는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심장은 두 갈래의 소리를 동시에 듣습니다. 하나는 현실의 소리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크고, 죄는 여전히 끈질기며,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피곤하고,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다른 하나는 하늘의 소리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 말씀은 단지 교훈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단지 권면이 아니라 왕의 칙령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게, 이미 승리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세상이 말하는 승리와 결이 다릅니다. 세상은 이김을 “내가 더 위에 서는 것”으로 정의하지만, 복음은 이김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끝까지 버티는 것”으로 빛나게 정의합니다. 세상은 이김을 “남을 굴복시키는 힘”으로 부르지만, 복음은 이김을 “내 안의 죄를 십자가 아래로 끌고 가는 은혜”로 부릅니다. 세상은 이김을 “내 뜻을 관철하는 성취”로 노래하지만, 복음은 이김을 “하나님의 뜻에 항복함으로 자유를 얻는 기적”으로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5:4는 승리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승리의 본질을 재정의합니다. 성도의 이김은 자아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거룩한 결과입니다.

첫째,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게 주어진 생명의 표지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어떤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기질이나 성격, 타고난 담대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출생”을 말합니다. 위로부터 난 생명, 은혜로 낳으신 생명, 성령으로 중생한 생명. 이것이 승리의 뿌리입니다.

칼빈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복음의 맥박은 여기서 분명히 울립니다. 믿음은 구원의 대가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라, 거듭났기 때문에 믿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그가 세상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자랑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자리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승리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 찬송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것은 우리가 신실해서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단지 거리의 소음이나 문화의 유행만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속삭이는 체계,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아를 왕좌에 앉히는 욕망의 질서, 죄를 정상이라 부르고 거룩을 이상하다 부르는 가치관의 그물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이 전부”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은 “지금 당장 손에 쥐어라”라고 부추기지만, 믿음은 “영원한 상속을 바라보라”고 속삭입니다. 세상은 “너 자신을 증명하라”라고 몰아붙이지만,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너를 의롭다 하셨다”고 안겨 줍니다.

그러니 승리는 무엇입니까?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사라지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의 공기를 마시되, 그 공기 속의 독을 삼키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용하되, 세상에 사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길 위를 걸으되, 그 길이 목적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세상이 우리 안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싸움은 늘 조용하고, 늘 반복되며, 때로는 눈물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게는 그 싸움의 결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기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김이 단번에 끝나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도의 승리는 단거리 질주가 아니라 긴 순례입니다. 어떤 날은 환하게 이긴 것 같고, 어떤 날은 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본문은 느낌을 근거로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존재의 근거로 말합니다. 감정의 파도가 높아도, 생명의 뿌리는 뽑히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일어나게 하는 손이 있습니다.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손으로 자기 영혼을 구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손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그 붙드심이 믿음을 통해 숨 쉬고, 그 믿음이 세상 앞에서 결국 승리로 드러납니다.

둘째,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지만, 그 믿음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 이어지는 말씀의 흐름에서 요한은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합니다.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즉, 믿음의 힘은 믿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붙드는 대상, 곧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복음의 금맥이 열립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기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깁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보기에는 패배였지만, 하나님께는 결정적 승리였습니다. 세상은 왕을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웠지만, 하나님은 그 가시관 위에 만왕의 왕의 영광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수치로 세웠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구원의 깃발로 세우셨습니다. 부활은 하늘이 땅에 보낸 최후의 선언입니다. “죄가 끝났다. 사망이 무너졌다. 의가 서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새로 승리를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승리 안으로 들어가 그 승리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말하면, 요한일서 5:4의 승리는 에덴 이후 계속되던 전쟁의 결말을 보여 줍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여자의 후손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성취가 성령을 통해 우리의 심장에 적용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자”로 불립니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를 쟁취하는 싸움이 아니라, 승리하신 주님의 행렬에 참여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영적 전쟁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결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이기셨고, 그에게 속한 자들이 이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이깁니까? 믿음은 먼저 “진실”로 이깁니다. 세상이 거짓으로 화려할 때, 믿음은 진리를 선택합니다. 믿음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단 하나의 시선을 지키기 위해, 달콤한 타협을 거절할 줄 압니다. 믿음은 또 “인내”로 이깁니다. 세상은 즉각적인 결과를 요구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립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이깁니다. 세상은 편리함을 최고의 선이라 말하지만, 믿음은 거룩을 최고의 선으로 붙듭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이깁니다. 세상은 이익을 따라 사랑을 계산하지만, 믿음은 십자가를 따라 사랑을 흘려보냅니다. 믿음은 “소망”으로 이깁니다. 세상이 끝이라고 말할 때, 믿음은 끝 너머의 나라를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긴다는 것은, 삶에서 고난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고난을 통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꿉니다. 같은 폭풍을 만나도, 믿음은 우리를 파괴하는 대신 우리를 단련합니다. 같은 눈물을 흘려도, 믿음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대신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믿음은 고난을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로 해석하지 않고,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빚으시는 자리”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세상은 고난 앞에서 의미를 잃고, 사람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붙잡습니다. 의미가 붙잡히면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니, 무너지는 것 같아도 다시 세워집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의 중심에 십자가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삶은 “승리의 확신”과 “거룩한 싸움”이 함께 걷는 삶입니다. 본문은 승리를 말하지만, 요한일서 전체는 성도의 현실적인 싸움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도는 빛 가운데 행하되, 죄와 씨름합니다. 성도는 사랑하되, 미움의 유혹과 싸웁니다. 성도는 진리를 믿되, 거짓의 속삭임과 싸웁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삶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더 깊은 현실 직면입니다. 그 현실 직면 속에서 성도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복음의 숨을 쉽니다. 나를 낳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계시고, 내 안에서 믿음을 숨 쉬게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이 승리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가장 먼저는 마음의 왕좌에서 드러납니다. 세상은 마음에 자리를 잡으려 합니다. 염려로, 탐심으로, 비교로, 인정욕으로, 분노로, 정욕으로, 게으름으로. 그러나 믿음은 그 왕좌를 비워 하나님께 드립니다. “주님, 제 마음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새로이 올려 드리는 제사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 붙잡히려 할 때마다, 믿음은 다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나를 사셨다. 그러니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 소유의 고백이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은 “네가 너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믿음은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승리는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세상은 관계를 거래로 만들고, 사랑을 소비로 바꾸고, 사람을 도구로 바꿉니다. 그러나 믿음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봅니다. 그래서 상처받을 때에도 복수의 칼을 쉽게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칼을 내려놓는 데 필요한 은혜를 구합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며, 결단은 믿음에서 태어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복음의 사실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나도 용서하겠다”는 길로 걸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세상은 더 강한 미움으로 이기려 하지만, 믿음은 더 깊은 사랑으로 이깁니다. 사랑은 약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강함입니다.

또 승리는 시간과 돈과 몸의 사용에서 드러납니다. 세상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자극적으로”를 외칩니다. 그러나 믿음은 “거룩하게, 정직하게, 절제하여”를 선택합니다. 믿음은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주일을 소중히 여기고,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지키려 애씁니다. 믿음은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눔의 기쁨을 배웁니다. 믿음은 몸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쾌락의 명령에 무릎 꿇지 않고 성결의 길을 택합니다. 물론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넘어짐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회개로 돌아옵니다. 회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문입니다. 회개는 사탄의 고발을 끊고, 은혜의 품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줄 아는 성도가 세상을 이깁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느라 평생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빛 가운데 가져와 십자가로 던지는 사람이 이깁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예화를 들고 싶습니다. 바닷가 작은 마을에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밤,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하늘처럼 치솟았습니다. 배들은 항구로 들어오려 했지만 길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때 등대지기는 자신의 집 창문을 더 단단히 닫고 잠자리에 들 수도 있었지만, 등대의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바람은 문을 때리고, 소금기 어린 물보라는 얼굴을 찢을 듯했지만, 그는 불빛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한 점 빛이 어둠의 바다 위에서 길이 되었습니다. 배들은 그 빛을 따라 항구에 이르렀고, 많은 생명이 살았습니다. 등대지기가 폭풍을 멈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폭풍 속에서 빛을 지켰고, 그 빛이 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폭풍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빛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빛은 내 안에서 만들어낸 불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빛입니다. 성령께서 기름 부으신 믿음의 등불입니다. 우리가 그 빛을 붙들고 서 있을 때, 세상은 우리를 삼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통해 길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삶은 자기 확신의 과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확신의 깊이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는 강하시다. 나는 변덕스럽지만 주는 신실하시다. 나는 흔들리지만 주는 흔들리지 않으신다. 이것이 믿음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깊어질수록, 세상은 더 이상 우리를 조종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겁을 주며 끌어당기지만, 믿음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더 크게 듣습니다. 세상은 유혹으로 미끼를 던지지만, 믿음은 “그리스도가 더 귀하다”는 달콤한 진리를 더 사랑합니다. 세상은 죄책으로 짓누르지만,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 아래 다시 일어섭니다. 세상은 죽음을 마지막이라 말하지만, 믿음은 “부활”을 마지막이라 말합니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은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우리를 믿음 자체로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보냅니다. 믿음은 손이고, 그리스도는 붙드는 분입니다. 손이 자랑할 것이 아니라 붙들리신 분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승리의 삶은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삶”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세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빼앗아 가려 하지만, 복음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붙듭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죄의 사슬을 끊고, 세상의 매력을 바래게 하며, 영원의 향기를 우리의 숨결로 바꿉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결단의 문 앞에 섭니다. 나는 무엇으로 세상을 이길 것인가? 내 성격으로? 내 경험으로? 내 노력으로? 그러면 우리는 결국 지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게 주신 믿음, 그리스도를 붙드는 믿음, 십자가와 부활에 기대는 믿음으로 살면,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그 믿음은 오늘도 우리를 이기게 합니다. 화려한 이김이 아니라, 거룩한 지속의 이김으로. 박수 받는 이김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는 은밀한 이김으로. 그리고 마침내 주 앞에서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음성을 듣는 최후의 이김으로.

그러니 오늘도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 믿음을 붙들어 주소서. 세상이 크다고 느껴지는 날, 더 크게 계신 주를 보게 하소서. 죄가 달콤해 보이는 날, 십자가의 사랑이 더 달게 하소서. 마음이 꺾이는 날, 부활의 능력이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그리고 제 삶이, 제가 이겼다는 노래가 아니라, 주께서 이기셨다는 찬송이 되게 하소서.” 아멘.


 

요약

요한일서 5:4는 성도의 승리가 인간의 의지나 기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중생의 은혜에서 비롯됨을 선포한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지만, 믿음의 능력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이 붙드는 대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에 있다. 성도의 승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거룩한 지속과 인내, 회개와 순종으로 드러나며, 마음·관계·시간과 물질·몸의 사용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결국 세상을 이기는 삶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함으로 세상의 매력을 이기는 복음적 삶이다.

묵상 포인트

  1. 내 마음의 왕좌에는 지금 무엇이 앉아 있는가: 염려, 인정욕, 비교, 탐심, 혹은 그리스도?
  2. “세상”이 내게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영역은 어디인가: 관계, 돈, 성공, 쾌락, 두려움?
  3. 나는 믿음을 ‘내 결단’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믿음이 중생의 열매임을 붙들고 있는가?
  4. 내게 승리처럼 보이는 것이 वास्तव은 세상의 방식은 아닌가: 이김의 정의를 복음이 새로 쓰게 하는가?
  5. 회개의 자리로 자주 돌아오는가: 회개를 수치가 아니라 은혜의 문으로 보는가?

강해

  •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승리의 근거는 ‘출생’이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존재이며, 믿음은 그 새 생명의 숨결이다.
  • “세상을 이기느니라”: 승리는 단회적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성과 최종 결말을 포함한다. 성도는 싸움을 겪으나 궁극적으로 패배로 귀결되지 않는다.
  • “세상을 이기는 승리… 우리의 믿음”: 믿음은 수단이자 통로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믿음을 통해 성도에게 적용된다.
  • 문맥적 강조: 요한일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고백, 사랑의 실천, 죄와의 싸움(회개), 진리 안에 거함을 ‘참된 생명의 표지’로 제시한다. 세상 이김은 추상적 승리담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사랑·거룩이 삶에 구현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주석

  • “하나님께로부터 난”(γεννάω 계열 개념과 연관): 요한은 ‘거듭남’을 윤리적 개선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화로 다룬다. 새 생명은 새 방향을 낳는다.
  • “세상”(κόσμος):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아를 중심에 두는 가치·욕망·체계의 총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요한문헌 전반의 사용을 고려).
  • “이기다”(νικάω): 단순한 우월감이 아니라,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며 그리스도의 진리에 서는 승리를 포함한다.
  • “승리”(νίκη): 성도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접붙여진 승리이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승리의 현재적 선취다.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본 구절은 신약(헬라어)이지만, 구약적 배경으로 “이김/승리”의 신학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흐름을 묵상할 수 있다. 구약에서 승리는 종종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선언되며, 인간의 무기보다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 신실하심이 핵심이다. 이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다는 요한의 논지와 조응한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πᾶν τὸ γεγεννημένον ἐκ τοῦ θεοῦ”: “하나님에게서 난 모든 것/모든 자”의 포괄적 표현으로, 승리의 주체가 ‘특별히 강한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성도’임을 강조한다.
  • “νικᾷ τὸν κόσμον”: 현재형 뉘앙스를 고려하면, 삶의 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세상에 대해 ‘승리의 방향성’을 유지하는 모습까지 포함해 읽을 수 있다.
  • “ἡ νίκη… ἡ πίστις ἡμῶν”: 승리의 내용이 “우리의 믿음”으로 명시되지만, 요한은 곧바로 그 믿음의 내용(예수의 신분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믿음의 대상 중심성을 드러낸다.

금언

  • 믿음은 승리를 만들어내는 마술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손이다.
  • 세상을 이기는 가장 깊은 능력은 세상을 미워하는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더 큰 사랑이다.
  • 회개는 패배의 낙인이 아니라, 십자가 승리로 다시 들어가는 문이다.
  • 성도의 승리는 요란한 과시가 아니라 거룩한 지속이다.

신학적 / 주제별 / 목회적 정리

  • 신학적: 중생(하나님께로부터 남) → 믿음(그리스도를 붙듦) → 성화(세상 속에서 거룩을 지속) → 영화(종말에 완성)라는 구속 적용의 흐름 속에서 본문을 읽을 때, 승리는 인간 공로가 아니라 은혜의 사슬로 이해된다.
  • 주제별: “세상”은 외부 환경만이 아니라 내부 욕망의 공명판이기에, 성도의 전쟁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삶 전 영역으로 확장된다.
  • 목회적: 낙담하는 성도에게 본문은 “너의 상태가 아니라 너의 출생”을 보게 한다. 유혹 앞의 성도에게 본문은 “너의 결단”보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더 크게 보게 한다. 죄책 아래의 성도에게 본문은 “숨김”이 아니라 “회개”로 승리를 경험하게 한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1. 매일 한 번, 마음의 왕좌를 점검하며 “주님이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겠다.
  2. 유혹의 순간마다 ‘즉시 기도’로 방향을 바꾸겠다(짧아도 진실하게).
  3. 관계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는 세상의 방식 대신, 십자가의 사랑을 한 가지 구체적 행동으로 선택하겠다(말 한마디, 용서의 시도, 섬김).
  4. 시간과 소비를 재정렬하겠다: 말씀·기도·예배·나눔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작은 규칙을 세우겠다.
  5. 넘어졌을 때 변명하지 않고 회개로 돌아가겠다: 회개를 습관으로 만들겠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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