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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기는 믿음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by 【고동엽】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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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기는 믿음  (베드로전서 4장 12-14절)

1993부터 3년 동안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은 괌 아래의 축(Chuuk)이란 섬에서 선교사로 있었습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습도가 높은 곳에서 냉장고도 없이 3년 동안 살며 선교사님의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근육무력증까지 생겼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몸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1년을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원래 살던 뉴욕으로 철수했습니다. 뉴욕은 미국에서 제일 소득도 높고 물가가 비싼 곳입니다. 10년 전에도 원 베드룸을 얻으려면 한 달 월세가 1000불 이상 들었습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월세를 살기보다 차라리 장기 모기지(mortgage, 주택저당융자)로 집을 사겠습니다. 그런데 모기지로 매달 1000불 이상 낼 능력이 없습니다. 1000불 이하가 되는 살만한 집을 주세요.”

엉뚱한 기도였습니다. 원 베드룸 월세가 1000불이 넘는 지역에서 1000불도 내지 않고 집을 살 수 있다면 누가 월세를 삽니까? 다 집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뉴욕 퀸즈의 베이사이드 지역에 30만 불이 넘는 쓰리 베드룸 2층집이 27만 불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싸게 나온 이유는 동네 사람들에게 귀신 나오는 폐가로 소문났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이 가보니 정말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완전히 쓰레기 더미였고, 마약을 하던 동네 폭력배들의 아지트였습니다. 목사님이니까 귀신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무섭지 않았고, 곧 흥정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을 유산으로 거저 받은 아들은 빨리 집을 팔아 라스베가스로 달려가고 싶어 하염없이 깎아주었습니다.

결국 30만 불짜리 집을 19만 불까지 깎아줘서 흥정이 성사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집값은 싸지만 수리비가 많이 들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겠다.” 그 말을 듣고 집 주인은 급히 그 자리에서 만 불을 더 깎아주었습니다. 결국 18만 불에 그 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은행에 장기 모기지를 얻어 매달 돈을 냈는데 매달 내는 모기지 비용이 998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교사님의 기도를 정확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 집을 산 후, 선교사님은 건강 회복을 위해 틈틈이 직접 집수리를 하며 망치질을 하고 잔디를 깎았습니다. 집수리에 거의 1년 걸렸습니다. 집은 깔끔하게 되었고 동시에 집을 수리하면서 선교사님의 건강도 거의 회복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흉가라고 하는 집이 선교사님에게는 목숨을 살려준 생가가 되었고, 귀신이 나오는 집이 말씀과 기도로 충만한 성령 충만한 집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집이 82만 불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남의 회피하는 불루오션에서 승부를 내면 됩니다. 남의 회피하는 곳이 장기적으로는 기회의 땅입니다. 누가 귀신 나오는 불길한 집이라고 하면 성도는 믿음으로 그런 곳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귀신이 나오면 어떻습니까? 성도는 귀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고난이 와도 고난을 이기는 믿음이 있으면 고난은 축복의 산실이 됩니다. 성도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매일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 째 날이니라.” 하루의 시작을 밤부터 말하는 것을 보면 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밤은 무익한 시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고난의 밤은 결코 무익한 시간이 아니고 오히려 꼭 있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 고난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 >

성도는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본문은 고난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고난을 자연스럽게 보십시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베드로전서를 쓸 때 베드로는 곧 다가올 네로의 대 박해를 예견하고, 이제 곧 불 시험이 와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불 시험은 순금과 찌꺼기를 분리하는 시험이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을 감사와 기쁨과 믿음을 잃지 말고 잘 통과하는 사람이 진짜 성도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난은 성도의 삶을 정화시킵니다. 고난 속에서 성도는 신앙과 인격이 제련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불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시험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한계를 겸손히 자각하게 하고, 새롭게 도약하게 하는 디딤돌이 됩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기도를 배우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왜 하나님이 시험과 가시와 기도제목을 주십니까? 더 하나님을 붙잡고 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조금만 성취해도 자기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때 시험이 오고 가시가 찌르면 다시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시험과 가시와 기도제목이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일찍이 엄청난 입신체험을 하고, 그 체험을 14년 만에 고백했습니다. 왜 그런 엄청난 체험을 14년 동안 감추어두었습니까? 그 체험을 자랑하려고 하면 어느새 간질병이라는 몸의 가시가 자기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그 가시에 찔리면 고통스럽지만 그럴수록 사도 바울은 더 주님처럼 변해갔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인생에 있어서 가시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진실한 성도는 가시밭에 핀 백합화입니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찔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 가시에 찔리지만 그럴수록 예수님의 향기가 나와 주변에 퍼집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난이 올 때 불평이나 비판을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십시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는 성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고통스럽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생을 함께 하면 더 가까워집니다. 잘 나갈 때 함께 한 사람들은 쉽게 잊을 수 있어도 고난의 시간에 함께 한 사람들은 쉽게 잊지 못합니다. 교회도 작고 연약할 때 함께 한 사람은 더 깊은 관계가 됩니다. 인간관계는 고난 중에 함께 할 때 더 깊어지듯이 주님관계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더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재를 생생하게 느끼며 살려면 반드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 구절을 보면 주님이 주신 두 가지 은혜가 믿음과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고난도 선물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고난 중에 주님은 더 가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에게 고난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참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대개 주님의 고난과 나의 고난이 함께 만나는 곳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어려움이 생기고 교회생활로 어려움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것을 통해 내가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게 되는구나!” 그러면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 “내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수준에서 머물지 말고 이제는 능동적으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즉 주님을 위해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무엇이든 헌신해야 작품이 나오고, 좋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교회생활에서도 헌신해야 교회생활의 보람과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힘쓰고, 자주 교회에 나오고,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권투 선수들이 탐색전을 할 때 손으로 툭툭 치면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저런 주먹은 아무리 날려도 소용없습니다.” 왜 소용없습니까? 그 주먹에 몸 전체 체중을 싣지 않고 툭툭 날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중을 실은 펀치에 맞으면 상대가 케이오가 됩니다. 그처럼 교회생활에서도 몸 전체를 실어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생활의 기쁨을 알게 되고, 결국 그런 삶에서 사단 마귀와 문제를 넘어뜨리는 힘이 나올 것입니다.

3. 고난의 결과를 인식하십시오.

본문 13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결국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고난의 결과를 분명히 인식해서 고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IMF 직후에 이런 공익광고문이 있었습니다. “한민족에게는 어려움을 이기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그처럼 성도에게는 고난을 이기는 영적 유전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지방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귀가하는데 옆집에 사는 몸집이 큰 사나운 수탉이 암탉을 몇 마리 데리고 놀다가 목사님이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목사님에게 사납게 덤벼들었습니다. 아마 암탉들에게 과시하려고 그런 것 같았습니다. 수탉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덤비는데 목사님은 수탉이 그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습니다.

목사님은 수탉이 무서워서 급히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 수탉이 너무 괘씸하고 얄미웠습니다. 수탉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니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말씀과 기도가 꽉 막혔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다른 집에 있는 조그만 잡종 개를 데리고 수탉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여러 마리 암탉을 데리고 놀던 그 수탉은 개를 보자마자 체면도 차리지 않고 먼저 순식간에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개에게는 닭을 이기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개가 도망만 안 가면 반드시 닭을 이깁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는 고난을 이기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고난 중에 도망치지만 않으면 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을 이기는 영적 유전자를 주셨습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서 있으면 고난은 결코 성도를 이기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성도를 망하게 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고난과 영광은 쌍둥이입니다. 고난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을 원한다면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영광을 원하면서 고난을 피하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고난을 피하려고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박정 어학원의 박정 원장은 내 대학교 같은 과 동기동창입니다.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 학원이 짧은 시간에 거대한 학원이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친구를 만났을 때 단기간에 성장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 학원을 시작할 때 아무 것도 없어서 3천만 원을 빌려 학원을 차리며 그 돈을 그냥 버릴 각오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공하려면 버릴 각오부터 해야 합니다. 얻을 생각부터 하면 얻지를 못합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자세를 가졌기에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계속 전진해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대신에 영광을 주시지 않고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주십니다.

4. 고난을 극복하며 사십시오.

다시 한번 본문 14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언급합니다. 성령님은 고난 받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교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힘으로는 순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순교의 순간을 극적으로 벗어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때 성령님이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코리 텐 붐 여사의 고백입니다. 2차 대전 때 코리 가정은 유대인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 일로 점차 코리 가정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어린 코리가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죽는 게 두려워요! 어떻게 죽을 수 있어요?” 코리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코리야! 우리가 기차를 타려면 뭐가 필요하니?” “기차표요.” “언제 표를 사지?” “기차 타기 전에요.” “그래! 그처럼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주님이 잘 죽도록 기차표를 주실 거야.”

주님은 고난에 순간에 우리를 결코 그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이 고난과 고독의 순간에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국 학생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던 데니어(Danyer)란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분이 교단 편지에 이런 간증 문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기쁨 중에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일 중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고통 중에서는 우리에게 소리치신다(God whispers to us in our pleasures, speaks to us in our work, but shouts to us in our pains).” 즉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은 뚜렷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1980년 1월 1일 아침 7시 30분에 미국 뉴욕 인근의 나약(Nyack)에 있는 심슨 기념교회에서 철야를 끝낸 아들을 차에 태우고 귀가 중에 다른 차와 정면충돌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도로시 사모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남편이 살아나도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3년 동안은 아무 일도 못하고, 오른손을 쓰지 못하고,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히프 뼈를 다른 것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의사 선생님의 말은 하나도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몇 개월 후에 다시 걸었고, 오른 손도 썼고, 왼쪽의 눈의 시력도 회복했고, 히프 뼈 보강수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은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 편지 말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고통 중에 무신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이 없다.’ 그때 비관론자는 말합니다. ‘보라, 이제 희망이 없다.’ 그때 편집증환자는 말합니다. ‘보라, 이제까지 내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 성도는 ‘왜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을까?’라고 잠시 생각하다가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믿고 고난 중에도 감사한다.’”

고난 중에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벽장 속에 넣어두고 살지 마십시오. 가끔 환경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못해! 나는 안돼!”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마음과 사명만은 약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그 상황을 극복해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단계 영적으로 승진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양을 키울 때 일부러 염소와 함께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이 배부르고 안전하면 눕기를 좋아하니까 운동 부족으로 위에 이상이 생기는데 목자가 일일이 양을 일으켜 운동시킬 수 없기에 염소에게 그 사명을 준 것입니다. 염소는 누워 있는 양만 보면 본능적으로 찌릅니다. 너 그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몸이 건강해집니다. 그처럼 고난은 성도에게 양을 찌르는 염소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고난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건강을 지켜주는 밑거름이 되고, 나중에 주어질 영광의 초석입니다. 고속승진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시험도 있어야 합니다. 시험이 있을 때 그 시험을 얼마나 잘 이기느냐 하는 것이 결국 인생 승리의 관건입니다. 성경을 보면 시험 없이 복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 고난의 시험만 잘 이기면 길은 반드시 열립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용하다는 점쟁이로부터 무서운 저주를 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청평에 놀러갔을 때 찍은 저의 사진을 보더니 그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이 학생은 30세 이상 절대 살지 못할 관상이다. 10년 안에 죽을 상이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때 저의 사는 모습을 보면 제가 생각해도 별로 오래 못 살 것 같았습니다. 어디서 싸우다 죽든지 병들어 죽든지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자존심 때문에 점쟁이에게 매달리지 않고 “죽게 되면 죽지!”라고 그 말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죽긴 죽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 뒤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희망을 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 뒤로부터 점이라면 죽어도 안 믿고, 기독교의 이름을 빌려 하는 점도 절대 안 믿고 오직 성경의 약속만 믿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결국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만들 것입니다.

< 믿음의 용사들이 되십시오 >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교회 단기선교 팀이 탈레반에게 피랍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희 교단에서 파송된 이영동 선교사님은 안전하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영동 선교사님 캠프에서 함께 활동하던 3명이 이번에 함께 피랍되었습니다. 이영동 선교사님이 훌륭하고 헌신적인 자매라고 김정효 목사님에게 중매하려던 자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분들이 무사히 귀환될 수 있기를 기도해주십시오.

아프간에 간 형제자매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과는 달리 한국내의 여론이 상당히 나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여론을 따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선교를 할 때도 누룩의 원리를 따라 겸손하고 지혜롭게 할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고, 체계적인 선교사 훈련학교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 미국 방문을 통해서 저희 선교회의 선교사 훈련학교와 요삼일육선교센터의 비전을 미국에 있는 동역자 목사님들과 나누었습니다. 몇몇 목사님들이 계획이 구체화되면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손에 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몇몇 목사님과 한 집사님이 여비로 쓰라고 보태주신 재정은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동역자 목사님들에게 다 드리고 왔습니다. 실망스런 결과이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실망스런 결과가 오히려 내일의 큰 사명을 이루는 밑거름이 될 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난은 잘만 활용하면 참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어려움이 찾아와도 절대로 꿈과 비전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몇 가지 잃어버려도 사실상 그 잃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반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이 얻어도 그 얻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 한 줌의 재입니다. 그러므로 없어도 실망할 것 없습니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물론 현실이 어려우면 그 현실 때문에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지만 그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더욱 놀라운 축복의 장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농장주 아들이 아버지가 죽자 농장을 팔아 사업 구상을 하는데 바로 그때 한 친구로부터 광산을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산 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나 돈을 다 투자할 때까지 금광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광산을 다른 사람에게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을 새롭게 산 사람이 그때까지 팠던 곳에서 바로 한 치를 더 파니까 노다지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이런 일을 당하면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다 죽으면 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정월 대보름에 가족끼리 윷놀이 하다가 동생은 맨 날 ‘모’만 나오는데 자기는 맨 날 ‘도’만 나온다고 너무 억울하다고 자살했습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자살한다면 다 자살할 사람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에도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땅을 판 사람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다지는 잃었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보험회사 직원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 보험 가입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 치를 더 파지 못해 노다지를 잃은 것을 생각하면서 항상 한 마디만 더 하자고 했습니다. “내가 한 마디만 더 하면 이 사람이 가입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 마디를 더 해서 결국 가장 위대한 보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어떤 고난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그러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때로 고난이 있어도 항상 기뻐하며 고난을 이기는 믿음을 통해 더욱 큰 축복을 얻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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