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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각오 (마 16:21-28)

by 【고동엽】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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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각오  (마 16:21-28)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유월절 축제가 무르익어 갈 무렵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 또는 개선장군처럼 ‘호산나’라고 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였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무겁고 외로움 가운데서 입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며칠 후에 벌어질 그의 체포, 재판, 끔찍한 죽음 등을 생각하시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소풍 길처럼 결코 경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는 우리는 우리들은 고난 주간을 결코 아무렇게 보내서는 안 됩니다. 정말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라면 더더욱 거룩하고 경건 되게 보내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고난(苦難)주간을 '위대한 주간'이라고 칭할 정도로 교회의 큰 명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이 주간을 이렇게 중요한 날로 지킨 이유가 있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이 주간동안에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위해 성취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이 주간 동안 옛 악마의 통치가 해체되고 죽음이 정복되었고 속죄(贖罪)가 이루어졌고 저주의 문이 닫히고 낙원이 문이 열렸다고 믿었습니다. 특별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하늘과 땅에 가득 차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구원의 축복을 더욱 실감하고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로 고난절 행사를 했습니다. 이때 대표적인 행사는 교인들의 금식(禁食)이었습니다. 에피파네스 학자는 “당시의 사람들이 한 주간 금식했으며 특히 마른 고기나 빵 소금 물 등만 먹을 수 있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 주간 내내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금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2일정도 굶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주간동안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곤 하였으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와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노예 혹은 종들에게는 휴식과 자유를 누리는 기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사들은 부활주간을 전후하여 이러지곤 하였습니다. 또한 황제는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혜의 조치도 내렸고 모든 소송과 법정의 재판을 중단하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수난주간은 목요일은 예수님이 배반당한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행사를 했습니다. 서양(西洋)교회에서는 이날 저녁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성만찬을 시행(試行)했습니다. 이날에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금요일은 좋은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하여 그날에 기도하고 금식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을 선포했습니다. 수난주간의 토요일(안식일)은 위대한 인식일이라고 하였고 동서교회에서 1년에 유일하게 안식일에 금식하는 관례를 지켰습니다.

전날 밤에는 물론 여러 가지 종교행사를 거행했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 왕시대에는 이러한 철야행사는 거대한 등불행사를 동반하였다”고 합니다. 콘스탄틴노플 전역에 횃불이 세워지고 등불이 켜 졌으며 그래서 온통 도시에 정오의 태양을 보듯이 밝았다고 합니다. 그레고리 나지안도 교회 내에 횃불이나 등불을 달았다고 말하며 이렇게 불을 밝히는 것은 부활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령하는 행위로 상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의 특징과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실제로 동참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지 아니하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난으로 실감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느끼고 신앙심이 깊어 졌던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전혀 의미 없이 바쁘게 지내버리는 현대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행위들을 질타할 아무런 정당성이 없습니다.

둘째,초대교회 교인들은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뿐 아니라 형제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주간을 가난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봐주고 노예와 종들을 쉬게 하는 등 그리스도의 평화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간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곧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고난이라는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고난주간을 그리스도를 부활을 생각하며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영광과 기쁨의 신앙으로 보냈습니다.
온 성에 횃불을 밝혀 놓고 교회마다 집집마다 등불을 켜 놓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찬양의 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는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절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넷째, 고난주간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큰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십자가와 고통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고난을 멀리하고 영광만 차지하려는 오랜 관행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웃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아침이 이 땅에 다시 임하도록 우리 모두 민족과 교회가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주간은 성도들이 모든 일에 조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합니다. 말이나 행실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주간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금요일부터 다 부활절까지 다 공휴일입니다. 국가적으로 3일간을 부활절 휴가로 보냅니다. 미국 대통령도 이 기간에는 휴가를 갑니다. 이처럼 부활절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귀한 시간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교회절기의 산맥으로써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면 부활절이 제일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고난 주간을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경건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할 것은 단순하게 고난주간을 금식하며 기도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고난주간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도전과 영적 재충전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이사야 빌립보 지방에서 자신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구원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을 교훈하시며 제자의 자세와 길”에 대하여 소상히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간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벳세다의 오병이어 초자연적인 기적까지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5,000명을 포함한 25,000명)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하시고 마지막 성만찬 베푸신 자리까지는 불과 12명 정도였고, 고난의 겟세마네까지는 11명의 제자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제자는 오직 요한 한명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줄어들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믿음의 각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라면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우연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눅14:26~27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을 따르기 위한 참 제자가 되려면 우리들이 참 제자로서의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참 제자는 어떠한 믿음의 각오를 해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의 참 제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24절 상)
예수님은 본문 24절 상반 절에서 “나를 다라 오려거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아주 단단한 결심(決心)과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빛이나 어두움은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윤리적 개념입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 생활, 사역을 본받는 것이 빛된 생활이며, 예수님께서 주신 삶의 원리(原理),규범(規範),질서를 저버리고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어두움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생활하고, 예수님처럼 사역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곧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滿足)만을 위한 자기 실리(實利)를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살지 아니하면 경쟁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된 제자라면 믿지 않는 불신자와는 분명한 의식의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생각도, 마음도, 처신(處身)도 다르고, 정말 모든 면에서 분명히 달라야 하며 믿음의 색깔이 분명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고방식 그리고 생활양식이 과연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형상, 예수님의 향기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물론 토마스 아 캠퍼스의 '예수를 본받아(원작: 예수님을 닮음'라는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모습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이 단순히 외형적인 모방(模倣)에 치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의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살아 보려고 큰 나무 십자가가를 지고 다리곤 합니다. 그러나 큰 나무 십자가를 지고 다닌다고 예수님처럼 살수도 없는 것 이며,예수님처럼 산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외면적 모방이나 표절보다는 내면적 닮음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외형적인 거룩보다는 내면적 거룩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상한 결심과 각오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우리 자신의 육체적 욕심과 정욕을 쳐서 죽이는 신령한 고통이 없이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몸과 마음에 익히는 일”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를 지는 고난(苦難)의 길입니다.

2.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게는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24절 중)
예수님은 24절 중반 절에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의 “자기를 부인하라”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의 첫 번째 의미는 “자신의 본능을 죽이는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믿음에 들어 사는 첫 관문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케 되려면 삶의 본질적인 변화(變化)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단단한 결심과 각오가 없이는 옛 사람 즉 믿음 이전의 자연인의 욕구를 거절, 파쇄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한다”는 두 번째 의미는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일”을 것을 뜻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에 지녔던 생활 신념(信念)이나 습관 또는 이와 같은 것들의 뿌리 같은 독선이나 아집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육체적 욕심의 사람을 무너뜨리고 믿음의 원리대로 살아 보려는 믿음의 각오가 없이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바른 제자로서의 삶을 살수가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라”는 세 번째의 의미는 자기의 이기심을 죽이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던 이를 절대시하던 사람이 예수님처럼 희생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變化)되려면 옛 사람의 이기심(利己心)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때때로 우리 자신의 생각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아니하는 부분까지라도 다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다고 한다면 그 자체를 온전히 부인하고 전폭적으로 주님께 맡기려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썩어질 옛 사람에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겠다는 각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 6:6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도 이와 같은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본능을 죽이고, 자아를 죽이고 이기심을 죽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부정은 참된 자기 긍정에로 이어지고 믿음으로 구원과 축복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는 내 생활의 최고 목표가 나 자신이었지마는 그 자신을 없애 버리고 예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아야 합니다. 참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의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 중심의 생활이 될 때에만 참 신앙생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 자신 전체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내 생애의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서의 자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들어내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본능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기를 부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그대로 있으면 쓸모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답게 내 육체를 근거로 하는 모든 죄악을 온전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내 자신에 속한 것 가운데 반드시 죄는 아니지만 주를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은 끊어 버려야 합니다.
죄는 아니지만 주를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음식, 의복, 오락, 사교생활, 생활의 습성 등, 이러한 것들 가운데 주를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들이 있으면 이것은 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직장생활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이 나의 생명이 되고 모든 것이 되고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어 버릴 것을 다 끊어 버려야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3.주님의 따르는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24절 하)
예수님은 본문 24절 하반 절에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十字架)는 고통과 고난의 상징입니다. 죽음(희생) 없이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나치 정권과 싸우다가 순교한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살 때 인간의 삶에는 고난(苦難)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 생활에 자연히 따르는 고통 혹은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이 고난을 똑같이 받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각각 다 자기 몫에 해당되는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를 잘 지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믿음으로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통 세상 사람에게는 없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핍박의 십자가입니다. 어두운 것은 빛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내가 주를 믿음으로 빛의 아들이 된 까닭으로 누구나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이 옵니다. 이것은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인데 성경은 이런 핍박을 받을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을 때에는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이상스럽게 생각 할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그 십자가를 지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남을 위해서 저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자원해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해서 선교하고 구제하고 장학 사업에 앞장 서는 일은 마땅히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금번에 여전도회에서 고아원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목욕해 주고 식사도 해 주고, 빨래도 해 주는 일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기쁨으로 이 십자가를 자원해서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때에 사회가 밝아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게 되고, 십자가를 질 때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는 성도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할 믿음의 각오와 결심이 없이는 참된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제자로서의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제자에게는 전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전도의 책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상 최대의 명령이자 의무입니다(마 28:18-20) 우리는 믿는 순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행 1:8)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일생 생활 자체에 적잖은 짐을 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말씨나 생동 하나 하나에까지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조심하며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 자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는 것입니다. 생활전도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둘째는 제자에게는 교육의 책임이 있습니다(마 28:18 -20)
교육의 책임이란 우리 자신이 교육을 받을 책임도 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진리로 교육할 책임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상당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는 진리로 자신을 다르시는 고된 훈련을 걸쳐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합니다(호 6:3)

셋째는 제자에게는 봉사의 책임이 있습니다(마 25:40)
예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신령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남을 섬기며 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형제 사랑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으로 섬기며 돕지 못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책임과 수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어렵지만 성경에는 많은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일은 분명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고,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줄 알고 우리는 그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자신들을 부르신 것은 우리 자신들이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라면 마땅히 ① 어떤 경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② 자기를 부인하는 각오해야 합니다. ③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면류관이 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집니다. 나 자신을 죽이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면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 갑시다. 또한 나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부인하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담대히 대가를 지불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았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 4:1)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과 같이 고난의 의미를 바로 음미하면서 주님의 고통이 우리 자신이 갑옷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눅 9:57-62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나오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낙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의 바른 삶을 살고, 주님을 따르려면 ① 환난을 각오해야 하며(눅 9:57 -58절) ② 주님 따르는 일을 앞세워야 하며(눅 9:59-60절) ③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눅 9:61-62절) 그런데 현재 우리 자신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주간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경우에도 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각오 ② 자기를 부인하는 각오 ③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각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러한 믿음의 각오를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격려와 은총으로 축복해 주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바른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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