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주님, 이 한 절이 마치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저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은 매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설득하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우리의 소망을 재단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보이는 현실의 끝에서 끝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약속의 빛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빛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우리를 이끄는지, 종말의 어둠을 가르는 왕의 광채로 우리 심령을 밝히 보여 줍니다. 인자가 오십니다. 오실 뿐 아니라 “자기 영광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 그리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이 말씀은 단지 미래 일정표가 아니라, 교회의 심장에 박힌 왕의 선언이며,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하늘의 헌장입니다.
우리가 “영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 세상은 흔히 성공의 번쩍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광은, 존재의 무게가 빛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그분의 거룩과 능력과 아름다움이, 숨김없이 펼쳐져 피조물의 세계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본문은 그 영광이 막연한 광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영광은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오며, 영광은 십자가의 상처를 지닌 승리로 나타납니다. 세상은 왕관을 먼저 보고 십자가를 나중에 보려 하지만, 복음은 십자가를 통과한 왕관만이 참 왕관임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5장의 왕은, 순결한 심판의 왕이시면서 동시에 피의 언약으로 백성을 사신 구속의 왕이십니다. 그분의 보좌는 차가운 법정의 의자처럼만 있지 않고, 흘리신 피의 공로가 증거로 서 있는 언약의 보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신다는 것은, 구속사가 결코 흐릿한 이상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피와 땀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계획이 마침내 완전한 빛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인자”라는 칭호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니엘이 보았던 하늘의 환상 속에서 만국과 권세를 받는 영원한 왕권의 이름입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픔을 아는 분이십니다. 굶주림의 쓸쓸함과 눈물의 짠맛을 아십니다. 거절당한 마음의 차가움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오십니다. 낮아지신 분이 높아지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이 보좌에 앉으십니다. 조롱의 가시가 찬란한 면류관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이 “패배”라고 불렀던 사건이, 하나님 나라의 승전가로 바뀝니다. 이 전환은 단지 감동적인 반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역사의 최종 문장으로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은 두려움만을 키우는 주제가 아니라, 피 흘린 의가 마침내 억울함을 벗기는 위로이며, 성도들의 인내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확증하는 확실한 소망입니다.
그분은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 천사들은 복음의 주변 장식이 아닙니다. 천사들의 동행은 하늘의 법정이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가, 우주의 모든 영역 앞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될 때, 그 권위와 엄정함과 장엄함이 천사의 무리로 표현됩니다. 성도에게 이것은 공포의 장면이기 전에, 진실이 침묵당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이 땅에서 거짓이 소리 높였고, 진리가 모욕당했으며, 선이 때로 패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마지막 장면에서 진실은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군대가 왕을 호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추상적 도덕이 아니라 실제 통치이며, 그 통치가 마침내 눈앞의 현실로 드러난다는 확증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앉는다는 표현은 단지 자세가 아닙니다. 통치의 안정, 판결의 확정, 권위의 완결을 가리킵니다. 흔들리지 않는 의가 자리 잡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주의적·개혁주의적 복음의 중심을 만납니다. 역사의 마지막은 인간의 선택들이 우연히 모여 만들어내는 결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확정적으로 결산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관찰자가 아니십니다. 구속은 인간의 가능성에 의존하는 제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성취된 언약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복음과 반대가 아니라, 복음이 끝까지 복음 되게 하는 마지막 빛입니다. 십자가가 죄를 심판했고, 부활이 의를 확증했으며, 재림이 그 심판과 의를 전 우주 앞에 최종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 말씀은 깨어 준비하라는 촉구와 충성된 청지기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심판을 말할 때, 쉽게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오해로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심판은 그 믿음을 대체하는 다른 길이 아닙니다. 심판은 그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그 믿음이 생명인지 죽은 지식인지, 열매로 드러내는 공개적 선언입니다.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열매가 뿌리를 만들지 않지만, 뿌리가 살아 있다면 열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우리를 “행위의 공로”로 몰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실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은혜가 진짜라면, 그 은혜는 성도의 손과 발과 시간과 지갑과 말과 눈물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이 바로 그날, 왕 앞에서 증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들고 싶습니다. 어떤 마을에 겨울이 길고 혹독한 해가 있었습니다. 눈이 몇 주째 그치지 않아 길이 막히고, 노인들이 고립되어 식량이 떨어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라디오로 “구조대가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소식만으로는 난로가 타오르지 않았고, 말만으로는 밥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자기 집에 있던 식량과 장작을 묶어 썰매에 싣고, 한 집 한 집을 찾아가 문 앞에 내려놓고는 이름도 남기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구조대가 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을 믿었기에, 구조대가 오기까지 누군가 죽지 않도록 오늘의 손을 움직였습니다. 며칠 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구조대는 그 청년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려 했으나,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한 일은 구조대가 올 것을 믿었다는 표시일 뿐입니다. 제가 구조대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비춥니다. 우리의 자비와 섬김은 구원자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가 참으로 오신다는 복음의 진실을 삶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증언을 그날, 왕의 심판대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그 영광은 단지 눈부신 빛의 연출이 아니라, 모든 가면을 벗기는 진리의 빛입니다. 이 땅에서는 성공이 덕처럼 보이고, 포장이 인격처럼 보이며, 말솜씨가 진실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영광은 외형의 분장을 태워버립니다. 그날의 영광은 숨은 동기를 드러내고, 은밀한 불의와 은밀한 사랑을 모두 빛 가운데 세웁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교리는 우리에게 매일을 “빛 앞에서” 살게 합니다. 성도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보좌에 앉으실 왕의 눈을 의식하여 은밀한 곳에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자입니다. 우리는 종종 “언젠가”를 말하며 오늘을 미루지만, 성경의 종말론은 “언젠가”가 오늘을 바꾼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오늘을 거룩하게 하며, 그분의 보좌가 우리의 작은 선택들 위에 무게를 얹습니다.
또한 이 본문은 교회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역사, 눈물의 가격이 지불되지 않는 것 같은 세상, 신앙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바보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 성도는 자주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광 중에 나타나심으로, 의가 의로 남도록, 악이 악으로 드러나도록, 눈물이 눈물로 방치되지 않도록 마침내 판결하십니다. 이것은 복수의 쾌감이 아니라, 우주적 정의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차갑게 사람을 부수기 위해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서는 것입니다. 심판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형태입니다. 사랑이 진짜라면, 사랑은 악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사랑이 진짜라면, 사랑은 피해자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사랑이 진짜라면, 사랑은 죄를 죄로 판결하고, 의를 의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심판을 두려움으로만 듣지 않고, 진리의 승리로 듣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영광의 왕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면,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도 그것이 불충분함을 압니다. 우리의 회개를 살펴보면, 우리는 눈물마저도 종종 자기연민과 섞여 있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소망은 “인자”의 영광이 십자가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분은 심판자이시지만, 먼저 구속자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정죄하시는 왕이시지만, 그 죄의 정죄를 자기 몸에 받으신 어린양이십니다. 그분은 율법의 기준을 선포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어 우리에게 전가하신 의의 주님이십니다. 칼빈이 말하듯, 우리의 의는 우리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도 자기 행위를 하나님께 내밀어 흥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붙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피를 붙드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며,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나옵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었기에, 그 생명은 성도의 삶에서 맥박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 한 절은 창세기의 에덴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완성되는 정점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인간의 옷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고, 역사는 그 약속을 따라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며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하셨고, 출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 백성을 구별하셨으며, 다윗에게 왕국의 언약을 세우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의로운 왕의 오심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로 집중되었습니다. 이제 재림은 그 집중의 마지막 폭발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은혜의 가격을 완납한 선언이었고, 재림에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 완납의 결과를 전 우주에 적용하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연히 주어진 영예가 아니라, 구속을 성취한 결과로서 합당하게 드러나는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목적 없이 떠다니지 않습니다. 역사는 십자가에서 방향이 정해졌고, 보좌에서 결론이 확정됩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시선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사람의 박수입니까, 보좌의 판결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낡아질 것들을 쌓는 준비입니까, 영원히 남을 것을 심는 준비입니까. 우리는 어떤 왕을 기다립니까. 내 욕망을 승인해 주는 왕을 기다립니까, 내 죄를 꺾고 나를 새롭게 하는 왕을 기다립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편안히 잠재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어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 깨어 있음은 공포의 불면이 아니라,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사랑의 긴장입니다. 재림 신앙은 마음을 굳게 하여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더 부드럽게 하여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왕이 오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오늘 할 수 있는 선을 미루지 않게 하고,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단지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그분을 사랑하기에 기다립니다. 그분이 의로우시기에 기다립니다.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기에 기다립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도, 그분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둠을 지나갈 때도, 그분의 영광은 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으로 사십시오.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의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그 의를 입은 사람답게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은혜를 값싸게 만들지 말고, 은혜를 빛나게 하십시오. 보좌에 앉으실 왕을 바라보되, 그 왕이 이미 십자가에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기억이 우리를 교만에서 구하고, 절망에서 건져 올리며, 냉담에서 깨워 사랑으로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날, 영광의 왕 앞에 설 때, 우리는 떨림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덮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세우며,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열매가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이 눈물이 낭비되지 않았음을. 이 믿음이 공허한 상상이 아니었음을.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가 참으로 왕이심을.
요약
마태복음 25:31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한 도래를 선포하며, 그분이 영광 가운데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최종적 심판과 통치를 행하심을 보여 줍니다. 이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공의의 회복과 성도의 위로이며,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에게 믿음의 진실이 열매로 드러나는 날임을 강조합니다. 구속사적으로 재림은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구원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공개·완성되는 정점입니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사람의 평가보다 “보좌에 앉으실 그리스도의 시선” 앞에서 살고 있는가.
- 재림 신앙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오늘의 사랑과 거룩을 재촉하는가.
- 나의 확신은 나의 성취에 근거하는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근거하는가.
- 작은 자를 향한 사랑과 섬김이 내 삶에 어떤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 심판의 교리가 내게 공포만 주는지, 혹은 진리의 승리와 위로를 주는지 점검하라.
강해
본문은 세 요소로 응축됩니다.
첫째, 재림의 주체: “인자”이신 그리스도. 인자라는 칭호는 낮아지심의 연약함과 동시에 다니엘적 왕권의 권세를 함께 담습니다. 성육신으로 인간의 고통을 아신 분이, 이제 왕권의 충만으로 나타나십니다.
둘째, 재림의 양상: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이는 재림이 은밀한 사적 체험이 아니라 우주적 공적 사건임을 말합니다. 그 영광은 십자가의 승리가 드러난 영광이며, 천사들의 동행은 하늘 법정의 공개성과 판결의 엄정함을 상징합니다.
셋째, 재림의 목적/결과: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앉으심은 왕권의 확정과 심판의 집행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은 구원을 경쟁시키는 다른 길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 참됨을 드러내는 최종적 선언입니다. 성도의 행위는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서 증거가 됩니다.
주석
- “인자가…올 때”(재림의 확정성): 조건부 가능성이 아니라 결정된 약속의 성취를 전제합니다.
- “자기 영광으로”(δόξα의 자기 소유): 영광은 외부에서 부여된 장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질과 사역에 합당하게 드러나는 왕적 광휘입니다.
- “모든 천사”(보편적 수행원): 왕의 도래가 전 우주적 질서 속에서 공표됨을 나타냅니다.
- “영광의 보좌”(심판·통치의 자리): 보좌는 단순한 권좌가 아니라 판결의 근거가 서는 자리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역사에 최종 적용되는 자리입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Ὅταν δὲ ἔλθῃ(“그러나 … 오실 때”): 종말의 전환점, 결정적 순간을 가리키는 시간 접속 표현으로, 그날의 불가피성과 확정성을 강조합니다.
-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인자”): 겸손의 칭호이면서도 종말적 왕권(다니엘적 배경)을 내포합니다.
- ἐν τῇ δόξῃ αὐτοῦ(“그의 영광 안에서/로”): 재림의 분위기와 본질이 영광임을 말하며, 그 영광이 그리스도의 고유한 영광임을 드러냅니다(αὐτοῦ).
- μετ’ αὐτοῦ(“그와 함께”): 천사들의 동행이 부수적 동반이 아니라 왕의 공식 수행임을 시사합니다.
- καθίσει(“앉으리니”): 통치·재판의 완료적 행위를 암시합니다. 서 있는 논쟁이 아니라 앉아 판결하는 확정성입니다.
- θρόνος τῆς δόξης(“영광의 보좌”): 보좌의 성격이 영광으로 규정됩니다. 곧 권위의 정당성, 판결의 순결성, 하나님 나라의 최종 가시화를 뜻합니다.
(히브리어-구약) 연결 원어 메모
구약 히브리어 표현을 직접 인용하기보다, 주제 연결을 위한 핵심 어휘를 제시합니다.
- כָּבוֹד(카보드, ‘영광’): 무게·중량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하나님의 현현과 위엄을 나타냅니다. 신약의 δόξα와 신학적으로 호응하며, 재림의 영광은 하나님의 ‘무게’가 세계에 가시적으로 임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כִּסֵּא(키쎄, ‘보좌’): 왕권과 재판의 자리를 뜻합니다. “보좌”는 통치의 안정성과 판결의 권위를 함축하며, 메시아 왕권의 완성을 예표하는 중요한 배경 개념입니다.
금언
- “재림은 믿음을 대체하지 않고, 믿음을 드러낸다.”
- “행위는 구원의 가격이 아니라 은혜의 향기다.”
- “보좌를 바라보는 눈은 오늘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 “십자가의 왕만이 영광의 보좌에 합당하시다.”
- “심판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최종 형태다.”
신학적 정리
- 칼빈주의/개혁주의: 재림과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절정이며,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합니다. 심판은 성도의 공로를 산정하는 거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나타난 믿음의 진실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 순수복음주의: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재림은 그 복음의 완결입니다. 성도는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듭니다.
- 구속사적 관점: 창세기 약속—언약—출애굽—왕국—예언—성육신—십자가—부활—승천—재림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 계획이, 재림에서 최종적으로 공개되고 완성됩니다.
주제별 정리
- 영광: 세속적 성공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드러나는 광휘. 십자가를 통과한 영광.
- 보좌: 통치의 안정과 판결의 확정, 공의의 회복.
- 천사와 함께 오심: 공적 사건성, 하늘 법정의 장엄함.
- 심판: 은혜의 대척점이 아니라 은혜가 끝까지 은혜로 남도록 하는 최종 선언.
목회적 정리
- 재림 신앙은 성도를 공포로만 몰지 않고, 억울함과 눈물 속에서도 끝내 정의가 승리한다는 위로를 줍니다.
- 동시에 재림 신앙은 오늘의 삶을 가볍게 만들지 않고, 은밀한 거룩과 구체적 사랑을 촉구합니다.
- 성도의 확신은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 고정되어야 하며, 그 확신이 진짜라면 반드시 성화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하루를 “보좌 앞”에서 사는 하루로 드리겠습니다. 말과 선택을 왕의 시선 앞에 두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의를 더 굳게 붙들고, 자기 의를 내려놓겠습니다. 회개를 핑계로 게으르지 않고, 은혜를 핑계로 방종하지 않겠습니다.
- 작은 자를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도움을 미루지 않겠습니다. 사랑을 ‘언젠가’로 연기하지 않겠습니다.
- 종말의 소망으로 현재의 고난을 해석하겠습니다. 낙심 속에서도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로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 교회와 가정과 이웃 안에서 복음의 향기를 남기겠습니다. 믿음이 열매를 맺도록 기도하며 순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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