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속한 사람 (요한복음 18장 33-38절) < 십자가의 희생은 헛되지 않다 >
A 교주가 있다. 그는 영혼의 때를 위해 이 땅의 것을 다 버리라고 교인들을 몰아댄다. 가난한 교인까지 탈탈 털어 바치게 하니까 교인은 점점 헐벗어지고 교회는 점점 화려해진다. 그런 교회는 앞날의 수순이 거의 예견된다. 그 교회는 A 교주 일가와 몇몇 핵심 그룹이 교회 재산권을 대부분 장악했거나 장악할 것이다. 영혼의 때를 위해 탈탈 털어 바치라면서 이 땅의 때를 위해 외형을 키우는 모순적인 교회이기에 대개 그 수순을 밟는다.
건축헌금을 여러 번 작정시키는 교주는 때가 되어도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어떻게 얻는 자리와 물질인데 쉽게 내놓겠는가? 안 내놓는다. 헌신을 강요하는 사람은 헌신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무섭게 추락한다. 거짓된 모습에 양심의 고통을 느끼던 누군가의 내부 고발로 영혼의 때를 위해 바치게 한 교주가 이 땅의 때를 위해 치밀하게 다 차지할 준비를 했음을 교인들이 알면서 상황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B 목사는 교회 이전이나 교회 공사를 할 때도 헌금 얘기를 안 한다. 대신 자신은 집을 월세로 가고 유산을 다 털어놓고 예금과 보험도 깨고 조용히 헌신하면서도 “저를 따라 성도님들도 희생하십시오.”라고 한 마디도 안 한다. 자발적인 헌신의 감동이 없으면 헌금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을 의지하거나 신세지는 느낌을 주기 않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자발적인 희생 제물만 받아서 심은 대로 갚으신다.
B 목사는 건축헌금 작정도 안 시킨다. 작정헌금 서원은 무서운 족쇄가 될 수 있다. 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기본이다.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은 더 지켜야 한다. 특히 하나님 앞에 한 헌금 약속은 구체적인 것이기에 강요된 헌금은 엄청난 족쇄다. 구약 성경을 보면 서원했다가 안 지키는 것은 물론 더디게 지켜도 죄라고 했다(신 23:21-23). 서원 안 하면 죄가 안 되는데 보통 교인은 건축헌금 서원을 시킬 때 외면하기가 쉽지 않기에 결국 서원시키면 상당한 재정을 확보하기 쉽다. 그래도 건축헌금 서원의 족쇄를 채우면 안 된다.
영혼의 때를 위하라면서 끊임없이 헌금 족쇄를 채우는 교회는 교인으로 있기가 너무 힘들다. 그언 식으로 교회가 커지면 그 교회 핵심 자리와 재산권은 교주 일가와 이너써클이 차지한다. 헌신적인 사람이 핵심 자리를 얻고 이너써클에 있는 것은 당연해도 계산적인 사람이 헌신을 강요해서 헌신의 결과물을 독차지하는 것은 불의다.
나중에 혹시 교회를 옮기게 될 때 자발적으로 헌신했으면 한이 맺히지 않지만 강요된 서원으로 집과 재산을 바친 사람은 한이 맺힌다.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라면 더 헌신해도 한이 안 되지만 잘못된 곳에 헌금했다는 생각은 한을 남긴다. 물론 하나님 앞에 헌금했지만 그때는 마치 영혼이 털린 기분이 든다. 목회자는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 그런 한이 없이 은혜롭게 잘 떠나 새로운 교회에서 잘 헌신하도록 헌금을 강요하거나 구걸하면 안 된다.
사람 신세를 지면 사람에 얽매인다. 의를 세운다고 신세진 사람을 외면하면 배신이 된다. ‘의를 세우는 것’과 ‘배신하지 않는 것’은 둘 다 버릴 수 없는 가치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 아예 처하지 않도록 사람 신세를 최대한 지지 말라. 도움 받을 생각도 버리고 도움 받지 못했다고 섭섭해 하지도 말라. 도울 생각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돕는 사람을 신기하게 붙여주신다. 신세지지 않고 살려고 하면 이 땅에서도 기억되지만 천국에서의 영광과 보상은 더욱 찬란해진다. 십자가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 진리에 속한 사람 >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때 예수님이 의연하게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나로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36절).” 다시 빌라도가 물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왕이지만 세상 왕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증거하러 세상에 온 왕이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37절).”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했다. 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인가?
1. 성령충만한 사람
어떤 사람은 집회 때 잘 넘어지는 것을 성령충만으로 오해한다. 집회 강사가 강단에서 소리치며 성도를 밀 때 넘어지지 않으면 자아가 살아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넘어진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기에 그렇게도 성령을 받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넘어지게 하는 성령을 받았다고 영성을 마음껏 드러낸 후에도 마음과 생활이 이전과 똑같은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남들은 넘어지는 형태로 성령 받은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다. “저분은 넘어지게 하는 성령을 받았어. 뭔가 달라질 거야.” 그런데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이기적인 상태에서 걱정도 많고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이 넘치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회피하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혼자 성령을 다 받은 것처럼 했으면서 왜 저래?” 그런 상황은 성령 받았다고 자랑할 상황이 아니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상황이다.
어떤 능력 추구 세미나에서는 넘어뜨리는 법을 배운 후 서로 안수하면서 넘어뜨리는 임상실험을 한다. 하나님이 기가 막히실 것이다. 성령님은 신실한 믿음을 따라 역사를 나타내는 분이지 실험 도구가 아니다. 참된 성령충만은 삶의 열매를 보면 대개 안다. 성령충만은 생명충만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성령충만의 기적은 돌이 떡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돌 같은 딱딱한 심령이 떡 같은 부드러운 심령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과시하지 않고 감추려고 해도 저절로 드러나서 딱딱한 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 진리에 속한 사람이다.
2. 십자가를 지는 사람
십자가란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려주는 것이다. 진리의 핵심 요체는 ‘죽임’이 아닌 ‘살림’이다. 역사상 가장 살림을 잘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옛날에는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해.”라고 했지만 요즘은 남자도 살림을 잘해야 한다. 대통령은 나라 살림을 잘하고 기업가는 회사 살림을 잘하고 목회자는 교회 살림을 잘해야 한다. 살림을 잘하려면 남에게 십자가를 지라고만 하지 말고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에서 증인이란 헬라어로 ‘순교자’란 뜻이다. 성령이 임하면 순교자가 된다는 말씀이다. 성령충만이란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변화와 역사도 나타나고 문제 해결의 역사도 시작된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점차 자기가 없어진다. 복된 삶을 원하면 내게서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게 하라.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은 물론 직장생활에도 십자가를 앞세우고 사업할 때도 십자가를 앞세우라. 사업이 망해도 십자가의 정신만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망한 것이 아니라 잠시 힘든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내 안에 십자가만 있다면 어디서든지 최고 살림꾼이 될 수 있고 어떤 상황도 내 안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3.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아무리 타당한 논리를 내세워도 싸움을 조장하거나 일으키는 사람은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내 주변의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는 사람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는 평화의 사자가 되라. 이 세상에 본질적인 악마는 없다. 사탄에게 농락당해 혼이 나간 사람이나 외로움에 지친 사람만 있다. 그에게 의를 바탕으로 내가 따뜻한 선물이 되어주라. 외로운 세상이기에 나 외에도 선물로 줄 것이 의외로 많다.
식사 대접, 따뜻한 미소, 조용한 친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힘들 때 내는 찬송과 휘파람 소리, 대신 설거지 해주고 쓰레기 버려주는 것, 허물은 감춰주고 장점은 칭찬해주는 것, 충고 대신 함께 있어주는 것, 썰렁한 유머에도 잘 웃어주는 것, 자신감 잃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친절히 설명해주면서 “답답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 예고 없는 깜짝 외출과 여행 등 줄 선물이 많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
어둔 세상에 따뜻한 선물로 살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에 속한 사람이다. 아무리 변명해도 평화를 깨는 모습에는 진리가 없다. 평화를 깨는 것은 내 영혼의 손목을 칼로 긋는 것과 같다. 평화를 깨면 내 영혼과 마음과 양심이 흔들리면서 두려움과 불안도 커진다. 그때는 사랑이란 말과 미소도 어색해진다. 설교도 어색하게 들린다. 평화를 깨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영혼을 울리면 그 울음소리가 칼이 되어 내 영혼의 동맥을 끊고 나도 더 소외된다. 반면에 힘써 평화를 추구하면 친구도 얻고 행복도 얻고 사랑도 얻는다.
< 더불어 살기를 힘쓰라 >
한 연못에 황금색 비늘을 가진 ‘장금이’란 예쁜 물고기가 살았다. 다른 물고기들은 장금이를 선망했지만 너무 자세가 도도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장금이는 자기 황금색 비늘이 다칠까봐 다른 물고기가 다니지 않는 길로 다녔고 연못 축제 때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늘 혼자였고 아무도 그녀의 외로움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 날 다른 연못에서 ‘혜은이’란 물고기가 이사 와서 장금이에게 반해 말을 걸어왔다. 외로웠던 장금이는 그녀를 반갑게 맞았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우정이 깊어갈 때 어느 날 혜은이가 장금이에게 부탁했다. “장금아! 네 예쁜 황금색 비늘을 하나만 내게 줄래. 나도 갖고 싶어.” 장금이는 선뜻 자기 황금색 비늘 하나를 빼서 혜은이의 가슴에 꽂아주었고 둘은 흐뭇한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며 기뻐했다.
다음 날 혜은이의 가슴에 꽂힌 황금색 비늘을 본 다른 물고기도 다 장금이를 찾아와 비늘 하나만 달라고 졸랐다. 자기 것을 나눌 때 사랑과 행복을 얻는 것을 체험한 장금이는 그들에게도 비늘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결국 자기 몸을 덮은 금장식이 다 사라져서 보통 물고기처럼 되었지만 친구가 많이 생겨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얼마 후 그 연못을 지나던 사람이 연못 전체가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못 속 물고기들이 하나씩 지닌 황금색 비늘이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더불어 살기를 힘쓰라. 최대한 이웃과 평화를 누리며 살라. 힘써 어려운 자를 돕고 복음 선교에 힘쓰는 사역자를 위해서도 나의 소중한 비늘을 하나씩 뽑아주라. 가끔 선교사가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런 편지를 보내기가 쉽지 않다. 선교사가 기도제목을 내놓을 때는 대개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도제목을 읽을 때는 행간에 숨은 뜻을 잘 살펴서 읽고 기도하라.
요새 한국 경제도 어렵고 특히 한국 교회가 어려워지면서 선교 후원도 많이 줄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힘든 선교지에서 어렵게 사역하고 있다.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도 어렵다. 문서선교, 교정기관 선교, 군 선교의 뜻을 품고 <월새기> 사역에 바나바나 루디아 역할을 해줄 교회와 성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때에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를 위한 거룩한 일에 나의 소중한 비늘 하나를 뽑아주는 사람이 은혜를 알고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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