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넘치는 가정// 20010506
2001-12-08 17:22:09 read : 311
주일 낮예배// 마가복음 10장 13-16절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두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저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이번 주에 계속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교회를 주셨는가?"하는 생각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독처하는 것, 즉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그것은 자기 중심주의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 중심주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불행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를 주신 것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공동체를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도록 하는 훈련소가 되도록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중심주의는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큰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양보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지금 그런 현상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내가 양보하지 않고 전부를 얻으려고 하면 상대방은 전부를 잃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고 하면 나의 것을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보 없이 옳고 그른 것만 따지려고 하면 얻는 것은 별로 없고 손해만 생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양보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손해로 끝날까요?
아닙니다. 양보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양보는 손해가 아닙니다. 신앙적 양보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눈 앞의 조그만 것에 집착하면 반드시 더욱 큰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목이 중요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불행의 길인 줄 알면서도, 느끼면서도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시간낭비가 될 줄 알면서 그 길로 가니까 안타깝습니다.
불신자의 길은 양보가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보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한 발 양보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더욱 든든하게 세우실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더욱 복된 존재가 될 것이고, 행복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더욱 생각하자는 달입니다.
<작은 교회>인 가정과 <큰 가정>인 교회를 더욱 생각하여 은혜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각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이 중심이 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단순하지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가 속한 가정을 만져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 문제로 진정 고민을 하시고 자녀의 앞날을 염려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찾아와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자녀를 만져주세요."
그리고 다른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도 하나님께 만져달라고 해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가지는 일입니다.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자기 비하에 빠지지 마십시오.
스스로 자기 비하에 빠지다가 사랑을 오해하고 어둠으로 빠지는 인생이 많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진정 하나님을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약점, 나의 실패, 나의 고통을 생각하며 안 좋은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진리에 토대를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둠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어둠을 보면 그 어둠이 더욱 확대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가정에서 며칠간 남편이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 옷에서 캬바레 성냥갑이 나왔다고 금방 의심으로 들어갑니다.
너무 쉽게 오해합니다. 증거도 없이 혼자 오해합니다. 그러면서 혼자 고민합니다.
그러던 차에 밤에 전화가 왔습니다. 받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끊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의심이 더욱 커집니다. 이런 식으로 어둠은 계속 확대됩니다.
다음날이 되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미운 생각이 듭니다.
계속 미운 생각과 감정이 있다 보니까 정말 더 그런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여자의 직감은 못 속인다고 하면서 자기의 직감을 영감인 줄 믿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것을 피해망상 병이라고 하는데 본인은 진짜라고 여깁니다.
그와 같은 피해망상은 결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나의 실패, 나의 약점, 나의 고통에 집착하다 보면 결국 그것에 묶이게 됩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주인도 되지만 마음과 생각의 주인도 되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정도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는 부부에게 어떻게 그런 망상이 발붙일 수 있겠습니까?
부부가 정말 하나님을 진실하게 붙들면 하나님은 그 가정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삶의 기초로 놓을 때 우리 가정과 삶은 그만큼 안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삶과 그 가정에 은총과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2. 사랑과 격려가 넘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이 "왜 그 아이들을 데리고 왔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물을 볼 때 "유리하냐? 불리하냐?"로 판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고, 가치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고 정말 소중한 가치가 그 일에 담긴 것이라면
너무 계산적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손해가 예상되어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고 제지하니까 주님이 어떻게 반응을 하십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분하게 생각하십니다.
왜 분하게 생각하셨을까요? 사랑과 격려로 사람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격려를 통해 가정을 세우길 원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 남편을 너무 헐뜯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도 너무 헐뜯습니다.
"내 남편은 쬬다야!"라고 말하면 자기는 무엇이 됩니까?
"아! 저 부인은 의롭고 훌륭한 부인이구나!"라고 사람들이 생각해줍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변명해도 자기는 "쬬다 부인'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왜 부족한 점만 찾습니까? 자세히 보면 장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왜 단점만 보고 헐고 뜯고 기를 죽이고 자기 얼굴에 침을 뱉습니까?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헐뜯는 것도 체질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체질이 그러니까 무조건 나쁘게 봅니다. 심지어는 좋은 것도 나쁘게 봅니다.
남들은 "훌륭하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 훌륭한 것 중에서 꼭 단점을 찾습니다.
그렇게 살면 그 가정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가정이 될까요?
가정을 세우려고 하고 행복을 쌓으려고 해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헐고 뜯으려고 하면 이 세상에 어느 가정이 제대로 설 수 있겠습니까?
남을 헐뜯어도 안 좋게 보는데 자기 남편, 자기 자녀를 헐뜯으면 누가 좋게 봅니까?
만약 남편이나 자녀가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내 아내가 헐뜯으니까 잘해야지. 우리 엄마가 헐뜯으니까 잘해야지"라고 합니까?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문제만 커지고 더 힘든 일만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런 모습을 좋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대로 심히 분히 여기실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정은 결코 축복된 가정이 되기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허락한 가장 귀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잠언 19장 14절을 보면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슬기로운 아내는 남편을 격려하고, 아이들을 칭찬하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 일이 아내가 해야 할, 그리고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어느 날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낙심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무슨 일이 생겼소!"
"네. 하나님이 돌아가셔서요."
"여보! 그게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렇지 않아요? 만약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당신이 낙심하나요?"
바로 그 순간 루터는 정신을 번쩍 차렸습니다.
진정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낙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일어섰습니다. 마음에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노래가 생깁니다.
그렇게 해서 지은 찬송이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입니다.
지혜로운 아내의 위로와 격려가 루터에게 소생하는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요새 세상이 얼마나 험합니까? 서로 다들 쬬다이고 자기는 천재인 줄 압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이제까지 목회를 하면서 가장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성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왜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무조건 쬬다인 줄 아는 병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잘 하시는 것입니다. 남을 쬬다로 보는 언행은 앞으로도 삼가셔야 합니다.
앞으로도 내가 속한 가정에는 칭찬의 말, 격려의 말만 넘치게 해야 합니다.
닐 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하면서 처음 말했습니다.
"내게는 한 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게는 커다란 도약입니다."
그런데 칭찬의 말, 부드러운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의 말이지만 그 말이 나를 도약시키고 상대방을 도약시킵니다.
그렇게 살아야지요. 도약시키며 살아야지요. 무너뜨리며 살면 되겠습니까?
가끔 보면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서 무섭게 비난을 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거기에 일부 교인들도 동조해서 "맞아! 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성도를 비판하는 것을 정의요, 의로움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 중에서 신앙이 제대로 있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정말 신앙이 있는 분들은 교회와 교인을 그렇게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족해도 교회와 성도의 가치 자체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이 비판하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면 가치를 일깨우는 비판이 아닙니다.
각성하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진짜 새로운 창조를 위한 건설적 비판이 아니고,
교회의 정체성과 성도의 정체성을 혼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 교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훌륭한 교인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부족한 줄 몰라서 교인이라고 하고,
교회가 부족한 줄 몰라서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세웠습니까?
여러분! 그런 말에 절대 기죽지 말고,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기대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까이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고 합니다.
잘못된 친구를 만나면 나쁜 일로 같이 끌려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의 삶에 신앙과 평화와 가치 있는 삶을 도전할 수 있는 친구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사람과 사귀면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인식시키는데 노력합니다.
긍정적으로 노력하면 좋은데 남을 깎아 내리면서 자기를 인식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남의 잘못을 찾아야 합니다. 불쾌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비전을 도전하고, 희망을 말하고, 사랑과 따뜻함을 전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가까이하고 싶습니까? 그와 말하면 유쾌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희망을 도전하십시오. 사랑을 전하십시오. 격려를 전파하십시오.
그것이 나와 나의 후손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고 참된 성도의 길입니다.
서울에서 목회하는 어떤 여자 목사님이 있습니다. 여자로서 얼마나 목회가 힘듭니까?
이분이 여자로서 목회가 힘드니까 정상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자꾸 편법을 씁니다.
무슨 방법입니까? "기존 교회는 죽었다! 썩었다!"라는 부정적인 방법을 씁니다.
그래서 힘써서 불신자를 전도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이 연합집회를 하면 그곳에 "교회는 죽었다!"는 제목의 찌라시를 돌립니다.
그렇게 해서 일부 사람들이 "그러면 살아 있는 그곳으로 가자!"고 하고 갑니다.
그런데 설교를 보면 매주 "기존 교회는 죽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메시지가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자기만 살아 있는 영혼 같습니다.
그런데 계속 비판하는 말만 들으니까 마음속에 나쁜 것만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불신, 교만, 남을 우습게 보는 마음, 사랑보다는 자기 의로움만이 가득 찹니다.
사람의 영혼은 믿음을 먹고, 희망을 먹고, 사랑을 먹고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먹지 못하니까 결국 사람들이 얼마 후에 그 교회를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생깁니다. 이 떠난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에 적응을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새 이분들도 마음만 높아지고 판단만 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교회에서도 장점을 격려하며 살지 않고 단점을 불평하며 사니까 잘 부딪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삶에 행복이 없습니다. 자기도 답답해하고 남도 불편해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영혼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으로 가득 찬 것이
정말 중요함을 느낍니다. 성도에게 성령충만한 삶이란 바로 그런 삶이 아닐까요?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곳이어야 하고,
교인은 꿈을 심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꿈을 깨는 영은 성령이 아닙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화평을 깨고 불평을 심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헐뜯는 입술이 되지 말고 격려하는 입술로 가정과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를 꺾으면 못삽니다.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고 하는 사람도 파고 들어가면 뭐든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이 없으면 자식 자랑, 친구 자랑, 친척 자랑까지 하며
"나는 이렇게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외치면서 삽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자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에게 있는 바리새인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가장 교활한 종교적 자랑입니다.
좀 더 잘 믿는 것처럼, 좀 더 경건한 것처럼 보임으로
그 대가로 얻어지는 칭송을 구하는 자랑! 이 자랑은 아주 무서운 자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관적으로 말합니다.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말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능력과 행복이 없는지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원리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남을 행복하지 않고는 절대로 나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입니다.
남을 높여주지 않고는 나는 절대로 남으로부터 높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가장 중요한 성경적 원리는 외면하고 어디에서 행복을 찾겠다는 것입니까?
왜 똑똑한 사람이 불행할까요?
행복의 길을 찾지는 않고 행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내가 죽어져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땠습니까? 뻣뻣하게 살아서 이득을 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처럼 죽어야 열매를 맺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시퍼렇게 살아있고
죽기는커녕 더욱 자존심으로 뭉치려고 한다면 어떻게 행복이 주어집니까?
내 고집, 내 열심, 내 자존심, 내 자랑은 다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나아가는 겸손한 모습을 절대 잃지 마십시오!
겸손이 없으면 평안도 없습니다. 사실상 겸손과 평안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적을수록 마음과 얼굴은 평안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능함으로 증명하려는 태도가 지나치면 성공도 멀어지고,
남의 성공을 깎는데 혈안이 되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성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 자기를 다스리고 있는 아주 심각한 영적 질병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추한 것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요새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찬반 양론이 팽팽합니다.
한 주간 열리는 다보스 포럼에 참석하려면 등록비 2만 불을 내야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항상 등록이 초만원입니다. 세계 각 분야의 정상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젊은 목사님은 그 다보스 포럼을 예로 들면서 "정상이 되자!"고 설교했다가
목사가 위만 바라보고 아래는 볼 줄 모르는 성공주의자라고 해서 공격을 받습니다.
어떤 교수님도 그곳에 참석했는데 일주일 동안 별로 얻은 것이 없이 돌아왔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사실 일주일 동안 무슨 큰 진리를 발견하겠습니까?
그런데 돌아와서 학생들에게 간혹 다보스 포럼에서 만난 사람들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학생들이 그 얘기에 도전을 받고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앞서 있는 자를 무조건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고 질투하고 외면하기보다
그분을 보고 배우고 사모하고 좋은 점을 추구하려는 자세는 참 소중한 자세입니다.
그처럼 겸손한 사람을 사람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최상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심령이 되어 천국 가정의 일원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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