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18 주일 설교(에베소서 강해 1)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
에베소서 1:1-2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벌써 5년이 지났지만 본당 완공을 결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예배당이 아름답게 완공되었습니다. 예배당이 완공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할 때, 진정한 성전 건축은 지금부터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성전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예배당 건물이 참 아름답게 건축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은 건물 성전이 아닙니다. 모든 교인들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건물 속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교회가 가장 위대한 교회입니다.
예배당을 완공하면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를 강해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는 영광스런 교회, 예수님이 주인되시는 교회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 설계도는 따로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영적인 설계도는 에베소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우들과 함께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도 서로 배우고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이라는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그 말에 수긍했습니다. 당시 교회가 진정한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회는 위대했습니다. 교회는 이럴 때 위대한 것입니다. 건물이 크고 아름다워서 위대한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예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교회가 되는 것이 위대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세우시고 여러분도 그렇게 세우시기를 소원합니다.
에베소서는 여섯 장 밖에 안되지만 내용이 굉장히 놀랍습니다. 에베소서는 정말 충만한 책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쓰신 책입니다. 그렇지만 에베소서 속에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담으셨습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편지인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에베소 교회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지난 번에 성지순례 때 가서 보니까 그 남아있는 유적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가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한 항구 도시인데, 상공업의 발달로 다이아나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 등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풍요로우면서도 퇴폐와 향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반면 교회는 변변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든든한 목회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새 신자들이었고, 조금이라도 먼저 믿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같이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분열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소 아시아 곳곳에 세워진 연약한 교회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바울에게 성령님께서 교회의 성도에게 주어진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감격하였고, 그래서 쓴 편지가 [에베소서]인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이렇게 놀라운 것인가? 성도가 된다는 것 교회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인가?’ 여러분, 눈으로 보기에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작아 보여도 그 성도 됨과 교회의 영광이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것을 에베소 교회에다 써서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를 받아본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큰 위로와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교회가 이런 것이구나!’ 초대교회가 다 그렇겠지만 그들은 사실 마음에 낙심도 되고 두려움도 많았을텐데 그들은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말할 수 없는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6장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영광이란 단어가 8번, 풍성이란 단어가 5번, 충만이란 단어가 7번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당시 초대교회는 이 편지를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에베소서를 읽어가는 동안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고 교회를 향한 사랑이 새로워지고 교회에 대한 소망의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많이 무너져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 교회의 영광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의 영광을 다시한번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에 대한 기도가 회복되고 교회에 대한 비전 소망이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첫 번째 말씀으로 붙잡기 원하는 것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하신 사도 바울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 말씀에 “아멘!”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정말 필요한 것이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은혜와 평강 그 자체이기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도 은혜와 평강은 커녕 사람에 대한 불평과 원망과 미움, 인색해지고 나만 손해 본 것 같고,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 염려, 좌절, 죽고 싶은 마음, 열등감, 초조함, 우울함으로 고통 당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왠 까닭입니까?
그 답을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다는 말입니까?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라고 이 복을 빌어주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내가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은혜와 평강이 있지 않고 마음이 너무 메마르고 사람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고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과 염려만 많다면 문제는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 164회나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옥중 서신에 유독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지금 몸은 감옥에 있지만, 그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가슴 벅찬 감격, 은혜와 평강을 누렸습니다. 그것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에베소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울이나 성남에 살고 있지만 또한 예수님 안에 사는 자입니다. 그러면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혹시 내가 감옥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은혜와 평강이 내 마음에 넘칩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다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돈 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죽을 까봐 두려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니까 내 마음이 메마르고 원망 불평이 많고 두려움 염려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지치고 메말라졌을 때, 원망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 보다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살지만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여러분이 다 열심히 살지 않습니까?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삽니다. 때때로는 설움도 받으면서 어떤 때는 눈물도 쏟으면서 때때로는 마음에 상처도 받으면서 삽니다. 그런데도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마음은 더 메말라지고 자꾸 시험거리가 생기고, 불평과 원만, 두려움 속에 사는 이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에 의하여 살지 않고, 이 세상 신에 의하여 완전히 눈이 멀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은혜와 평강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나는 편안한 집에 살면서도 은혜와 평강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신에 의하여 눈이 완전히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도 세상의 영에 붙잡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이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라면 이 세상 신은 가난의 영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가난의 영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난과 가난의 영은 다릅니다. 먹고 입고 사는 데 부족하다면 가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의 영은 무엇을 적게 가진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가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많이 가지고도 정말 가난하게 삽니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어느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자 주민들이 머리띠를 띠고 피켓을 들고 현수막을 내걸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집 값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유하게 살면서도 집 값이 떨어질까 봐 장애아들에게 상처주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이 가난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태입니다. 그 사람들은 가지지 못할까봐, 있는 것이 없어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난의 영입니다. 가난의 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완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이상한 것입니다.
가난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돈을 많이 가져도 가난하게 삽니다.
우리가 예배당 건축 때문에 어려워 기도할 때,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지원 요청을 해 오셨습니다. 그 때 제가 “우리 교회도 지금 힘듭니다! 도울 힘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순간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 무서운 가난의 영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도울 수 없어. 왜 나에게만 도와달라고만 그러는 거야! 나도 지금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 지 알아!’ 그런 생각이 내 마음 속에 꽉차 있었습니다. 선한목자교회 담임목사인데도. 제 마음 속에는 지독한 가난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말 한 마디를 해도 가난한 사람의 말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제 속에서. 이게 복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받을 복을 스스로 다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은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구나! 그 다음부터 도울 것이 없으면 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데까지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질병과 가난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총체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도 영혼이 구원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가난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런 분들이 있으실지 모릅니다. ‘내가 예수는 믿었지만 여전히 나는 가난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가난과 가난의 영을 구분하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충분히 많이 소유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우리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좋으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 말을 내 모든 것을 책임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내 마음에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는 것이 나를 가난에서 건져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내 손에 무엇이 쥐어져야 나는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쥐어져야 되지요? 한이 없습니다.
가난의 저주에서 회복은 단순히 풍족하게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우리 모두가 다 가난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난의 영이 떠나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고,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구제할 수 있게 됩니다.
딤전 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가난의 영에 사로잡힌 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계속 부하려 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하여 쓰고 남을 도울 힘이 없는 것입니다. 가난의 영에 묶여있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평생 그는 저주와 같은 삶을 삽니다.
예수님은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주라고 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가난의 영에서 이제는 놓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줄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복주시고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정말 믿는 사람만 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또 주실 것이니까.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주면 하나님이 나에게 더 주실테니까. 그러니 주는 일이 신납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돕고 나누어 주고 구제하는 것이 가난의 영이 꺽어진 중요한 증거이고 비로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열쇠입니다.
잠 11:24-26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구제를 좋아하는”것이 가난의 영이 떠난 사람이고 비로서 풍족해지는 복을 받게 됩니다.
구제가 좋아졌습니까? 도와주는 것이 너무 기쁩니까? 그러면 구원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제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것이 잘 되는 길이니까. 도와주는 것이 그렇게 기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는 더 주십니다. 열심히 벌어서 모은 것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열심히 벌어서 모은 것은 가난의 영으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지독한 가난으로 삽니다. 남 한번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한번 제대로 쓰임받지도 못한 채 돈은 모으고 모았다가 본인도 망하고 자식도 망하는 일을 번연히 저지르는 것입니다. 가난의 영이 무섭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해지면 더 이상 모으고 웅켜쥐는 것이 기쁨이 아닙니다. 도와주는 것이 기쁨입니다.‘구제는 한번 해보았지만 구제가 기쁜 지는 모르겠다.’그런 분들은 오늘 여러분의 영을 잘 분별하셔야 됩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래서 구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 그 이유가 성경에 보면 있습니다. 구제 안하니까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엇을 도울 게 있어!” 이렇게 나가면 그 사람은 소망이 정말 없는 사람입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내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지 못하고 사는구나! 내가 구제해야 되겠구나.”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데로 하시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모든 족속을 복되게 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 가난에서 벗어난 자가 되게 하신 이 복은 남을 도와주는 복입니다. 남에게 베푸는 복입니다. 가난하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어떤 형편에서도 우리는 도울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떨처버리지 못하면 아무도 돕지 못합니다.
다윗은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였습니다.
가난의 영이 떠난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그 당시 다윗은 광야에서 살았던 때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 19: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은 비록 부자였지만 가난의 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돈이 많았기 때문에 이 청년은 영생을 포기했습니다. 가난의 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재산을 지키려고 영생을 포기한단 말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돈을 얻으려고 친구를 버립니다. 돈을 얻으려고 가족을 버립니다. 돈을 취하려고 형제를 버립니다. 돈을 취하려고 교인들을 버립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정상적인 눈이 뜨였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납니다. 가난의 영이 사람의 눈을 완전히 가려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2008년도 호주 코스타에 갔다가 권오승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서울 법대 교수, 전 공정거래위원장이셨고 주님의 교회 장로이신데 이번에 [법으로 사랑하라]는 책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때 코스타에서 장로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또 그 분의 책을 보면서 도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모든 국민들이 선진국이 되는데 관심이 많은데, 선진국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진국을 국민소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2만 불 소득은 되어야 선진국이지! 그런데 요즘 환율 따라 2만 불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니, 환율에 따라 선진국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는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그 경계선 상에서 더 이상 선진국 반열에 세우지 못하시는가? 소득 수준으로 선진국이냐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법을 연구하다가 선진국을 연구해 보니 선진국은 나누어주는 나라더라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는 나라가 강한 나라, 복된 나라, 선진국입니다. 나누어 주려 하다 보면 우리가 커지고 성숙하게 됩니다.
유학생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유학 후 국내에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미국 유럽으로 가려 하지 말고, 아시아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면 얼마든지 길이 있다. 대우 받고 즐기러 가지 말고 섬기러 도와주러 가라. 가진 지식, 경험, 기술을 가지고 도와주러 가라! 이것이 하나님이 축복하는 길이다. 축복의 길이다. 국가 경쟁력이 커진다.
성도 여러분, 지긋지긋하게 가난의 영에 속고 삽니다. ‘나도 부족해. 나도 없어. 아직도 만족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은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마음을 은혜와 평강으로 채우시는 주님이신데, 내가 예수님을 붙잡지 않고 이 세상의 영, 가난의 영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는 영적인 분별을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늘 기도하는 것이 가난의 영이 떠난 증거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원망 불평, 두려움과 염려가 있으면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님도, 악령도 우리는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이구나! 악령의 역사이구나!
몸 속에 세균이 어떻게 들어와 역사하는지 모르지만 열이 나고, 통증이 있고, 체중이 빠지면 무슨 병이 있구나! 아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상태도 잘 분별하셔야 되는데 은혜와 평강이 넘치면 내가 성령이 충만하구나 하고 알면 되고, 내 영이 메마르고 불평, 원망, 두려움, 염려가 가득하면 사람 원망하고 환경 탓하지 말고 두려워하고 염려하지 말고 내게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나를 붙잡고 있는 가난의 영 두려움의 영 슬픔의 영 내게서 떠나갈지어다! 대적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완벽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가난의 영, 두려움의 영, 미움의 영, 우울한 영이 역사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으면 고민하고 갈등하지 말고 즉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가 가난의 영을 붙잡으면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삽니다. 지독하게 가난하게 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러분이 힘들 때 낙심될 때 좌절이 되고 두렵고 염려가 될 때 예수님을 불러야 될 때입니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이 완벽하게 주신 복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거하면 여러분 속에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그리고 복 받는 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그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반드시 평안과 감사와 찬송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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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교사 허드슨테일러도 한 동안 불평, 원망, 두려움, 염려로 고통받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에 은혜와 평강이 넘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쓰러져 누웠습니다. 그 때,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너무나 단순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되는구나!’ 그는 단순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은혜와 평강을 누렸습니다.
1869년 10월 17일 누이 아멜리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 이제 부담과 중압감은 모두 사라졌다. 아마도 요즘 며칠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것은 새롭거나 이상하거나 놀라운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롭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본다는 것이다.”
“그 동안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기 위해 헛되이 애써 왔구나. 이제 결코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나와 함께 거하시겠다고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그것이면 충분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또한 부활하였고 승천하였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며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제 그 분께서 나를 어느 곳에 어떻게 두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는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도 내게 은혜를 주시며 가장 어려운 상태에서도 그 분의 은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즉시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은혜와 평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이 오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우리 가정에 오소서. 우리 집에 오소서!” 하고 기도하셔도 응답이 없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믿음을 바꾸어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집에서 산다!”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거실에 앉아도 예수님 집에 앉아있는 것이고 안방에 있어도 예수님 품에 있는 것입니다. 집에 잠을 자도 예수님 안에 자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느 왕이 전국에 가죽을 깔라!고 명령을 하였답니다. 왕인 내가 어디를 가든지 땅을 밟지 않도록 모든 국토를 가죽으로 덮으라고 명령을 했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무슨 수로 모든 땅을 가죽으로 깔겠습니까? 그런데 지혜로운 한 신하가 말하였답니다. 가죽 신을 만들어 바치며, “이것을 신으면 어느 곳에서나 가죽을 밟으며 다니실 수 있습니다.”
엡 6: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
여러분, 가정은 가정대로 직장은 직장대로 힘들고 어렵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면, 마음에 평안이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어디서 살든지 다 천국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가든지 사업체에 가든지 교회에 있든지 어디나 천국입니다. 다른 사람 바꾸려고 애쓸 것도 없습니다. 환경이 바꾸어져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거하고 예수님이 왕이 되신 것만 분명하면 모든 것이 바뀌어져 버립니다. 평안의 신발을 신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제 심령을 이 시간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하신 주 예수님, 가난의 영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주님 역사해 주옵소서.”
이 시간 여러분 모두 예수님 안에 거하여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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