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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준비하는 마음// 누가복음 2장 36-38절

by 【고동엽】 2023. 1. 24.

은혜를 준비하는 마음// 20001224 주일 낮예배

2001-12-08 18:00:17 read : 530

 

누가복음 236-38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주일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이번에 무슨 선물을 받기를 원하지?"

그러자 일찍 아버지를 잃어버린 한 아이가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사진 속에 있는 아버지가 살아서 오셨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의 대답 속에 성탄절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으로 살아서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노력으로 진선미의 하나님을 찾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으로 인간을 찾아오시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찾아오시는 정도가 아니라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 인간처럼 되셨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에 그러한 큰 선물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기쁨을 느끼고, 삶의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22년 전에 한 여자 분이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2년을 기도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며칠 후에 당신 생일인데 어떤 선물이 갖고 싶소?"

그러자 그분이 아주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저는 어떤 선물보다 당신 자신이 좋아요."

 

그 말을 들으니까 이 남편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다시 말합니다.

"한번 말해봐요. 이번에는 당신이 원하는 선물을 정말 해 주고 싶소!"

그러자 이 여자 분이 또 아주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선물로 저에게 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주었다고 치고 이번 주일에 저와 같이 교회에 나가요."

 

결국 이 남편은 "한번만!"이라는 다짐을 하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 설교를 하면서

"차든지 덥든지 하지 말고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으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화끈!'이라는 말이 말에 든다고 교회에 계속 다녔습니다.

그분이 지금 목사님이 되어 충남 금산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가장 소중한 선물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이 주어진 날이 성탄절이고,

그래서 성탄절은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소중한 표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그분 자신을 선물로 주어 우리 인간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선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리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부족한 저를 드리오니 받아주시고, 저도 예수님처럼 살게 도와주소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기도제목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기도제목을 가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기도제목이 많고 너무도 소원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 중에서 정말 세상 소원과 다른 소원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처럼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소원이 있습니까?

만약 그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 하나만 이루어져도 큰 응답입니다.

우리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다는 고백을 정말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 한 분만 기다리고 주님 한 분으로 만족했던

안나라 하는 여자 선지자가 아기 예수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84년을 과부로 살았던 안나에게 그것처럼 위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안나가 갓 태어난 예수님을 보고 주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자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고 예수님에 대해 간증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녀에게 메시야를 알아차린 안목과 은혜가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를 준비하는 몇 가지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1. 성전 중심적인 마음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과부 된지 팔십 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84년 동안 성전 중심적으로 살았다는 말은 정말 존경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얼마나 꾸준한 신앙인이었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그런 꾸준함은 그녀의 성품이 훌륭했기 때에 생긴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전 중심적인 생활이 그녀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나깨나 교회를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 전심으로 봉사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계산적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복을 받겠다는 것 이전에 교회 중심적인 생활 자체가 큰 행복을 줍니다.

 

자세히 보면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나 다른 어떤 것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나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상을 찾게 되는데,

그 중에서 교회에 마음을 쏟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래서 언뜻 보면 안나는 불행한 여인인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아마 그녀 자신은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84년 동안 교회 중심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안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안나의 신앙과 인격과 삶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마음이 되었을까요?

자세히 보면 그런 겸손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겸손을 행복을 주지만 교만하면 얻는 것은 오직 불행과 상처뿐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에 성적이 조금 좋았다고 자기를 고립시키고 인격이 비뚤어집니다.

한참 옛날에 좋은 대학 나온 것, 좋은 고등학교 나온 것으로 자기를 오해합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금 수가 틀려도 "지가 뭔데..."라고 하면서

그 기분과 자존심 하나 때문에 아무 대책도 없이 사표를 쓰고 나옵니다.

 

다른 직장, 다른 회사를 누가 소개하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라고 하며,

텔레비전에 아는 사람이 나오면 "저 친구! 공부 되게 못했어!"라고 우습게 알고,

누가 뭘 잘한다고 하면 "어쭈! 제법인데..."라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식으로 과거에 순간적으로 한번 잘 한 것을 가지고 남을 비웃고 삽니다.

그 잘못된 자존심 때문에 머리를 숙일 줄 몰라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어떤 분은 18년째 실업자 생활을 하고 부인이 힘들게 일해 어렵게 생활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를 죽여 가는 <자기가 높아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 잘못된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별 것 없으면서 남을 한 수 아래로 봅니다.

가슴이 큰 자부심은 좋은 것입니다. 믿음은 그러한 자부심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우습게 하는 편협한 자부심은 자기의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자 하나님을 자기의 삶의 중심으로 놓고자 하는

믿음 중심적인 마음, 교회 중심적인 마음은 행복과 은혜의 원천입니다.

 

2.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

 

안나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성전 중심적 생활이 행복한 것을 아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메시야를 만나겠다는 간절한 소원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4년의 기다림은 결코 짧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에게 내일의 희망을 가지자고 말하면서도

"84년 동안 기다려 보라"라고는 도저히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도 참고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목격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좋은 일이 없겠습니까?

 

특별히 우리의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꼭 있어야 합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꼭 있어야 하고,

2) 둘째는 사람을 믿어 주는 것이 꼭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 오래 참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은 어려움을 딛고 잘못을 바로 잡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 377절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어떤 경우에도 선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행복하게 산 사람들을 보십시오. 공통적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거의 모두 예외 없이 그들에게는 기다림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처럼 최선을 다해 살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너무 빨리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실패란 없습니다. 다만 중간에 포기하는 것이 실패일 뿐입니다.

기도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한 동안 기도하다가 기도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전도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몇 번 하다가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어려운 짐들이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메워주신 것입니다(3:27).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그 짐을 메워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울면서라도, 비틀거리면서라도 그 짐을 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메워주신 짐이라면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짐을 인해, 그리고 그 사람을 인해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짐을 지게 하신 것은 결국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주님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우리의 고생, 우리의 고통이 아닙니다.

아들이 고생하고, 아들이 고통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 부모는 교육적인 효과를 위해 자식의 고통에 외면하기도 합니다.

사모가 아이들에게 야단칠 때 금방 가서 말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릴 수 없습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의지하고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실과 우리의 수고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실과 우리의 수고를 잘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 안에서 떳떳하게 사시고,

더욱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며 힘있게 사는 모습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3. 꾸준히 기도하는 마음

 

37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여기에서 안나의 오랜 기다림의 원천이 기도하는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너무나 넘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 아셨기에 우리에게 기도라는 통로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기도하면 무엇이 생기게 됩니까?

해야 할 일이 생각나고, 확신이 생기고, 마음에 평안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에디슨을 보십시오. 그는 천 개의 발명품을 발명한 발명왕입니다.

그러나 천 개의 발명품이 있기까지 만 번 실험을 하는 땀을 흘렸고,

만 번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압니까?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을 수 있고, 그 인내의 열매는 정말 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가끔 안타까운 하소연을 하며 기도를 의심합니다.

"제가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기도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몇 년 동안 기도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들어주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응답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나의 현재와 장래와 사후의 진선미를 위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 기도응답이지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이 기도응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되 응답이 오는 모양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두시길 바랍니다.

그 응답이야말로 나의 현재의 삶과 장래의 삶에 최선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드려진 기도는 어느 한 기도라도 헛됨이 없을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를 피해 무덤에서 드린 카타콤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 주후 313년에 결국 로마는 무릎을 꿇고 맙니다.

여러분!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은총을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수고와 땀이 수반된 기도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침 이 때에 나아 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녀는 아기 예수님을 딱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처럼 살아서 메시야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감사합니다.

이 감사는 84년 동안의 기다림이 아름답게 보상받는 순간의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어떤 외적인 축복이나 외적인 조건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메시야를 본 것 하나만 가지고 그녀는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저는 이처럼 조건 없이 감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항상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눈 먼 소경이 생각납니다.

소경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정말 감격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감격적으로 살고 있고, 그 감격으로 인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격을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이나 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와 인격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눈 뜬 것이나 다른 어떤 좋은 것이 행복과 감사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자살한 사람들 중에

소경이 생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모두 눈 뜬 건강한 사람들이 오히려 생을 비관하고 자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행복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녀는 태어날 때 의사가 소뇌를 잘못 건드려 뇌성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살면서 일곱 살까지 일어날 수 없었고

열 살이 되어서야 겨우 숟가락을 혼자 쥘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신은 멀쩡합니다. 그 멀쩡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모태신앙으로 그냥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 일곱 살 때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필사적 금식기도를 드립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기에게도 많은 것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그녀는 몸이 불편해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노래한 그녀의 ''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남이 갖고 있는 것 갖지 않았으나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그녀에게 하나님이 없었다면 그녀의 마음속에 어떻게 행복이 있었을까요?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있었기에 내면이 신비하게 채워지지 시작했고,

그녀는 내면의 보화를 느끼면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시에서 이렇게 건강한 사람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는 더욱 감사하고/ 슬플 때는 더욱 기뻐하십시오

즐거울 때는 애통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더욱 근신하십시오."

 

또한 그녀는 자기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합니다.

"내게 고통을 주신 주께 내가 감사합니다.

만일 주께서 내게 고통을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주님의 고통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고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녀의 시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행복이 외모에 달리지 않은 것처럼

외적인 조건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습을 통해서 감사할 것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다보면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 많이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것을 아직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감사거리를 잘 발견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축복이고,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주어질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는 그릇이 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전도사 사역을 50세에 시작하고 17년을 한 후

나중에 자신의 간증을 이렇게 글로 남긴 것을 인터넷을 통해 보았습니다.

"주님 저 같은 것을 데리고 17년 동안 일하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이 간증에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감사의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감사의 고백이 물씬 담겨 있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곧 행복은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대개 거의 모든 자연적인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행복한 일은 행복하고 편하니까 쉽게 잊어버리고,

불행한 일은 마음속에 맺히니까 오래 기억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살면

불행했던 일보다는 행복했던 일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상하게 주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제목들이 생각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힘과 소망이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보고 기쁨과 감사를 회복하며 살기로 작정하고,

삶을 감사하시고, 인생을 감사하시고,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시고,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러한 삶 속에 하나님은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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