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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행 26:24-31

by 【고동엽】 2023. 1. 24.

2010.2.28 주일 설교(사도행전 강해 54)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6:24-31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저는 인격적인 부족함 때문에 늘 부교역자들과 장로님, 교인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따금 저희 교회에 와서 사역하고 싶다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봅니다.“목사님 곁에서 목회를 배우고 싶습니다.”저는 한사코 말립니다.“멀리서 볼 때가 좋습니다. 가까이 오면 실망하십니다.”그런 저에게 오늘 본문은 큰 충격이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말씀은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하니라 하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29)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교만도 이런 교만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교만한 말이 아닌 것이 바울은 결박당한 죄인의 신분입니다. 교만하려고 해도 교만할 것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잘난 사람이, 높임을 받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교만해서 한다고 하겠지만, 지금 재판받는 죄인이라는 처지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교만에서 나온 말은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디모데전서 115절에서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도 했습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니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해서 자기 도취에 빠진 교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누리는 복음의 능력, 곧 자신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놀라운 새 생명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복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사람으로서 자신과 같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라는 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정말 자기 자신은 로마서와 디모데전서에서도 그가 고백한 것처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만한 자기 자신은 정말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지고 정말 예수님이 마음에 오시고 자기 자신의 생명이 되시고 주님이 되신 삶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이 그런 새 생명의 삶을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완전히 새롭게 거듭난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놀라운 담대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부터 26장까지 바울이 여섯 차례에 걸쳐서 재판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상깊은 것은 사도 바울의 담대함입니다.

바울은 재판받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도 괴로와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판 받는 것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2절에서는 재판받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지금 다행히 여긴다.”는 말을 할 상황입니까? 바울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는 순간입니다. 어떤 죄목인가가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그런 심각한 상황이라니요? 이런 상황이 감사하다 이런 뜻인데, 제 정신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조급해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입니까?

재판을 받음으로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을 만날 수나 있겠어요?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재판을 받을 때마다, 무죄를 입증하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천부장에게 붙잡혀 갔을 때에도,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바울은 무죄를 입증하려하기 보다는 그 순간을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전도할 기회구나. 재판 받을 때 네 죄가 무엇이냐? 제가 말씀드리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내가 그 예수님을 만났다고.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니까 사도 바울이 재판 받는 것이 두렵고 힘들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조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태도를 가지니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 의아해 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에 대하여 베스도 총독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베스도 총독 눈에는 정말 미친 사람이지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체도 높은 사람이. 예수 안 믿겠다고만 하면 금방 풀려나고 존경받을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재판 받으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니 베스도 기준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감히 자기에게 전도하려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자기는 재판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듣다 보니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너 나에게 전도하려고 하느냐? 나한테 그 몇 마디 말로 나 보고 예수 믿게 하려는 것이냐?’고 말합니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순간 조차도 이것이 전도할 기회구나! 내가 언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겠어? ’ 그러면서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러나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이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의 말과 태도에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30~32)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어?’ 그 동안 자기가 수많은 사람도 만나보고 재판도 해보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당당하게 그리고 평안하게 전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죽일 죄는 전혀 없고 당장 풀어줘도 됩니다.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당장 풀어줘도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석방되는 것을 사양하였습니다. 가이사에게 가서 전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풀려나는 것보다 재판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재판을 통하여 그가 정말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사람이 정말 거듭납니다. 더 이상 그를 두렵게 할 것이 없고 조급해 할 것도 없고 화나게 할 것도 없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5절부터 11절까지 바울은 과거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면 엄한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사람이었다. 제사장의 권세를 얻어서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는 사람이었다……󰡑그렇습니다. 바울은 핍박자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과격하고 사납고 거칠었습니다.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있다고 하면 어떤 것이든 부수고 들어갈 정도로 강한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 정말 변화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 그렇습니까? 예수님 만나면 모든 사람이 그 성격 성품이 다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얘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풍기는 성품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무례함을 볼 수 있습니까?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습니다.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당하는데, 흥분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롱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지위에 대하여 존중하는 말투로 평안 가운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담대하게 말합니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할 뿐만이 아니고 모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할 자신이 있습니까? 이것이 진짜 전도입니다.

 

 

어느 권사님께서 아이들이 왜 엄마와 선생님을 싫어하는지 아느냐고 했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것이랍니다. 모두 다 크게 웃었습니다.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도 그 중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말은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옳은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옳은데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옳은 말을 기분 좋게 하면 감동이 옵니다. 그러면 정말 지도자가 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숙제는 충성과 열심은 대단한데, 인격은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으로 불신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215일 뉴스를 들으시고 아마 기분이 안 좋으신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러시아에 연수를 갔다가 러시아 청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숨진 유학생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국민들 마음이 다 아팠을 것입니다. 단 하나 피부 색깔 때문에. 백인 우월론자들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러시아 스킨헤드족() 테러주의보'를 내렸습니다. 러시아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부 색깔이 다른 유학생들을 폭행하고 내좇으려고 하는 일들을 자행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분 나쁘지 않은 국민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피부 색깔 때문에 인종 편견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피부 색깔 하나 때문에 편견을 갖게 되고 또 무시 당하고 폭력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쾌하고 분노하게 됩니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그것도 살인을 당할 정도라면 러시아에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그와 똑같은 죄성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시고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지역 감정, 도대체 고향이 어디냐 하는 것으로 어떻게 사람을 판단할 수가 있지요? 학교를 어디 나왔느냐 하는 것으로 어떻게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그 소유에 따라서 어떻게 사람을 차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 성도들은 이 문제 다 해결이 된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점에 대해서 이제는 완전히 해결 보셨나요?

예수 믿으면서도 환경과 출신 피부색에 대한 편견 하나 사라지지 않았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맞아 죽은 청년을 생각하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면서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 문제로 고민이 많습니다. 부끄럽게도 교단 문제의 뿌리가 어느 신학교 출신이냐는 문제로 인한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극복이 안됩니까?

아직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붙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지역 감정, 학교 차별, 빈부의 격차, 권위적인 태도가 있으시겠습니까?

 

 

내일이 3.1절입니다만 교회와 성도는 나라가 위기일 때, 민족을 구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민족 살리는 기독교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무서운 편견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 되는 일을 위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통일을 위한 준비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갈갈이 찢겨져 있어서는 어떻게 통일이 됩니까?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삽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사건 앞에서도 두렵지 않고 조급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모든 상황이 사명임을 깨닫게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항상 분주하고 바쁘며 피곤합니다. 바쁘고 피곤한 것이 몸이 힘들거나 어려운 환경 때문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이 변해야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빨리 결혼하고, 시험을 끝내고, 직장 얻고, 집 사면, 또는 저 사람이 내 앞에서 없어지면 마음에 평안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쫓기고 불안한 마음은 어두움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바쁘고 쫓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분주하고 쫒기는 듯한 마음이 들고 자꾸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얻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다 이루어도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평생 쫒기듯이, 항상 두려워하고 항상 짜증과 화를 내면서 살게 됩니다.

 

저는 일이 너무 바빠지다 보니 은퇴하면 평안해 질 줄 알았습니다.

아버님을 보니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더 힘든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거듭난 삶을 살려면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평안은 우리가 정말 내 생명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의 평화를 빼앗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화를 내며 별 것 아닌 일에 깊이 마음을 쓰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거기에 속으면 주님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마음 점검하지 못한 채 짜증과 분노를 갖고 원망 불평, 두려움, 염려를 마귀의 목적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평안한지 늘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고를 당했다고 원망과 비탄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와 어려운 일 때문에 마음이 비탄해지고 원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고는 사고고 마음은 마음입니다. 어려움 중에도 얼마든지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사도 바울에게서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여러분의 마음을 무너뜨려서 더 어렵게 하려고 하는 마귀의 궤계를 분별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비탄이 마귀의 공격임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따금 너무 기쁘고 좋은 일이 생길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어떤 이들은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무척 기뻐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가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고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주님의 기쁨과 함께 그 기쁨을 누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너무 기뻐하다가 주님의 임재를 대수롭게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이 너무 기쁜 나머지 주님의 임재가 사라져도 느끼지 못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경도 안 쓰이는 것입니다. ? 세상이 자기를 너무 즐겁게 하니까. 그러다가 한 순간에 두려움과 조급함, 분노와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관심이 세상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슬플 때도 너무 좌절할 때도 너무 좋을 때도 다 동일하게 내 주변에 되어지는 일과 환경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은 똑같습니다. 영적으로는. 어려운 일이 올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때 여러분이 그 모든 일들을 잘 조절할 수가 있습니다.

 

 

유명한 성경 강해 설교자인 척스미스 목사님께서 개척교회 시절에 정말 필요한 돈이 없어서 간절히 기도하였던 적이 있었답니다. 도무지 돈이 생길 가능성이 없는 중에 어느 여 성도가 전화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목사님에게 돈을 송금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돈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필요한 금액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전화를 끊고 얼마나 좋고 흥분되는지, 사모님을 크게 부르며 달려가 사모님을 붙잡고 춤을 추었답니다. 그 순간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들렸습니다. ‘척스미스,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네가 나 때문에 네 아내의 손을 잡고 춤을 춰 본 적이 있었니?’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춤을 추던 목사님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보다 돈이 생긴 것을 더 좋아하는 마음을 회개하였습니다. 이 교훈을 명심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척스미스 목사님께 계속하여 큰 은혜로 역사하신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좋을 때 즐거울 때도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전도단 초창기에 로렌커닝햄 목사님과 스탭들이 배 구입을 추진하였습니다. 선교선을 만들어 전 세계 항구마다 다니며 전도하는 엄청난 비전을 가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이었기에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전 세계에서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계획대로 배 구입이 추진되고 잔금만 지급하면 배를 인수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모든 스탭들이 흥분하였습니다. 배 구입 후의 계획을 세우는 회의를 마치고 회의장에서 나가는데, 로렌커닝햄 목사님께서 회의장 구석 어두운 곳에 누가 서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예수님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대 이상의 헌금이 들어오고 일이 잘 진행되다 보니 회의 때마다 정작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가장 중요한 분, 예수님을 소외시키고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때부터 헌금이 끊어졌고, 그 배 구입은 무산되었습니다. 헌금된 돈은 같은 비전을 가지고 배을 구입하려 하는 오엠 선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두고 두고 교훈 삼았다고 했습니다. 일이 어려울 때나 잘 될 때나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풍랑이 시작될 때 가능하면 아무 일도 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렸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평안의 상실과 함께 주님의 영도 동시에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도록 기도하십시오. 왜 마음의 풍랑이 왔는지 그 이유를 주께 물으십시오.

성도 여러분, 마음에 풍랑이 일면 다시 말하면 마음이 두려움이 오고 분노가 생기고 마음이 조급해지면, 그때는 누누이 말씀을 드리지만 어떤 결정도 하면 안됩니다. 도장 찍으면 안되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그때는 무엇보다 먼저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왜 내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되어 있는지 그것을 주님께 물어야 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시도록 주님께 구해야 됩니다. 먼저 주님의 평안을 구해야 됩니다.

 

 

인도네시아에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 예배를 드리러 갔을 때 일입니다. 현지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상황이 달랐습니다. 전도사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그 마을에 있는 회교도들이 다 봉헌 예배 때 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 두려운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동안 예배당 건축할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와서 구경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사님은 돈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예배당을 짓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선교비가 왔다고 하면 회교도들이 훼방을 할까봐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답니다. 정말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주냐고 하면서 날마다 건축하는 것을 보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계속 물자들이 들어오는데 신기해 하다가 봉헌 예배에 다 참석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건축비를 보냈음을 알면 어떻게 할까? 또 열심있는 회교도들이 와있는데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면 이것은 정말 불지르는 일과도 같은 일이니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한국에서 선교 팀이 온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말을 듣고 보니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선교팀 안에도 두려움이 깔렸습니다. 워쉽하는 청년들이 연습을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다가 두려워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몇몇 청년들은 두려워서 도무지 나갈 수 없다고 하니 전도사님이 붙들고 기도하고 하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현지 교인들도 선교팀도 다 두려움에 묶여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교 시간까지 3시간 남았는데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하나님, 여기까지 왔는데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왜 온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이 예배당이 다 허물어지는 일이 생기면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이 평안을 주셨습니다.‘내가 이 마을에 있는 회교도들도 너무나 사랑한다. 너는 그것만 전하라.’그래서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지고 다시 말씀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워십팀이 십자가 복음을 워십으로 보여주고 제가 강단에 섰는데 머리에 모자를 쓴 회교도들이 상당히 많이 와 앉아있었습니다. 그들에게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듣지 못하기에 우리가 온 것입니다. 예배당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한국에 있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셔서 여기까지 보내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고백을 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합니다.”말씀을 전하는 중에 얼굴이 다 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중 가운데 놀라운 기쁨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기도 받으실 분은 나오라고 했더니 회교도 모자를 쓰신 분들이 대부분 다 나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해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면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의 역사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하나님에게 여러분에게 부으시는 모든 역사의 통로가 됩니다. 여러분 마음이 분노하면, 그래서 화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조급하면, 두려우면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계속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고 살 수 있는 재판석에 섰지만 그 시간이 전도할 기회라고 여겨지는 이런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놀라운 평안을 누리고 사시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같이 되세요. 여러분도 나같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전도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고요한 심령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놀라운 평안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든 좋은 열매는 마음의 평화에서 시작됩니다. 깊은 사랑도 헌신도 거룩함도 이 고요한 심령에서 옵니다.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이 놀라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 찬양하고 또 찬양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주 예수님 안수하시고 주의 기름을 부어주시고 아버지 성도들에게 복을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마음에 묶인 자를 풀어주시고 하나님의 놀랑라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들 심령에 하나님이 역사를 더하여 주소서.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세상을 이길 힘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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