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7 주일 설교(사도행전 강해 51)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행 23:1-11
“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지난 주간 강릉중앙교회 새 성전 입당 기념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우리 교회 예배당 건축 과정 지난 6년 간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크게 잘 못된 길을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잘 따라왔다는 감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앞으로가 더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편은 지난 날 보다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앞 길은 만만치 않음을 느낍니다.‘담임 목사로서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가? 선한목자 교회는 잘 가고 있는가?’그 때‘문제를 보지 말라, 항상 나를 바라보라.’는 주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길은 예수님이셨고 지금도 예수님이시고 영원히 예수님이십니다. 비로서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보지 않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길을 찿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 잘 가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까? 눈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지는 것? 속으면 안됩니다. 눈으로 보기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아서... 결코 속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정답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주님과 놀라운 교제 속에서 산다면 항상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면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매우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인도를 잘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점에 있어 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주님과의 교제 속에 문제가 지금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당시 가장 화려하고 풍요한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여 갔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잘 가는 줄 알았습니다. 판단 기준은 오직 어디 가면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의논했다는 말이 안 나옵니다. 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분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망했습니다.
요셉은 그에 비해서 기가막한 고난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 같았습니다. 형들이 죽이려 했고 구덩이에 빠졌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인생은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너무나 황홀하게 끝났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온 가족들을 다 구원할 뿐만 아니고 7년 동안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 모든 사람들까지 다 먹여 살리는 놀라운 일을 요셉이 감당합니다. 이유는 그가 종으로 팔려갈지라도 그가 감옥에 갔을지라도 항상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지 그 분별 기준은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분명히 뜨고 사는가 하는데 달려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히 주님의 인도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벼르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라도 작심을 하고 여러분을 죽이려 벼른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잠이 오겠습니까? 밥이 먹히겠습니까? 어디서 어떻게 그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할지 모르는데. 한 사람이 마음에 작심을 하고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방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합니다. 게다가 자신은 붙들린 죄수 신분입니다. 결박 당하여 심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는 상황입니다. 로마 군인에게서 채찍질 당할 뻔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사도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사도 바울은 담대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채찍질하려고 할 때 내가 로마 시민이라고 말하여 그 위기를 면합니다. 고난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만, 무조건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는 양심상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하는 말을 듣고 대제사장이 기분이 나빠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했을 때 제사장에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당신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스스로가 율법을 어기느냐?’ 그때 사람들이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대제사장이시라. 당신이 어찌 대제사장 앞에서 그를 책망하는 투로 말할 수 있느냐?’고 했을 때 ‘나는 몰라서 그랬습니다, 저 분이 대제사장이십니까? 그러면 나도 그분에게 예의를 갖추어야지요.’하고 대제사장에게는 예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논쟁을 이용하여 위기를 벗어날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모인 것을 알고 그들 사이에 부활 문제로 항상 다툼이 있는 것을 아는 사도 바울이 자기가 부활 문제 때문에 재판을 받는 것이라 하므로 그만 모임 자체가 아수라장이 됩니다.
흔히 앞이 캄캄하다고 하지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두려운 일이 계속되는 중에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지시를 듣고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항상 경험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담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항상 우리 문제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답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와서 결박을 당하는 죄수 신분이 된 것에 대해서 좀 답답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말씀하셨지만 사도 바울은 ‘내가 빨리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 터인데 여기서 이렇게 묶여있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깨달은 것이 자신이 결박당한 것이 사실은 기도 응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로마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복음을 전하려면 로마에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기도대로 로마로 가도록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단 방법이 바울이 예측한 것과는 달랐을 뿐입니다. 바울은 전도자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가막힌 방법으로 사도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왜 죄수가 된 것이 기가막힌 방법일까요?
하나님께서 왜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도록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나 놀랍습니다.
첫째는 죄수였기에 많은 높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만약 평범한 전도자로 로마를 가게 되었다면 그는 일반 사람들만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감으로 인해서 로마 최정예 수비대 사람들을 만났으며 심지어 벨릭스 총독,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을 만나서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바울이 할 일은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재판을 받아야 되니까 네 죄가 무엇이냐? 그때부터 전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간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판을 해주려니까 간증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난미의 지혜가 기가막힙니다. 바울의 재판 기록은 그 자체가 간증이고, 전도입니다. 나중에 성경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했기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선교사로 로마에 갔다면 로마로 가는 중간에 암살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천부장까지 동원하여 그를 보호했습니다. 하나님이 로마 군대 안에 죄수로 가두어놓게 하시므로 사도 바울을 부자유하게 만든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서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그를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가막힌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임의 위협 앞에서 당당하게 로마로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의 호위를 받으면서 말입니다.
셋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했기에 아무런 돈이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로마로 가려면 많은 돈이 듭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런 수입이 없는 사람입니다. 로마로 가려면 그 많은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수로 들어가게 하시므로 모든 게 공짜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국고 비용으로 배도 타고, 음식도 먹으면서 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나는 예수 믿고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신 것을 믿는데 왜 나에게는 어려움이 있을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다면 답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자신의 기대와 다른 삶을 살게 돼서 낙심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그 답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도 중요한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아 고향을 떠났지만, 수시로 두려움과 낙심으로 마음이 흔들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약속에 의지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아브라함을 좌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었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이 낙심하고 좌절했던 때가 여러 번 나옵니다.
첫째 사방에 자기를 해하려는 이방인들이 두려웠습니다. 그 당시에 이방인들은 자기 안전을 지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방이 적입니다. 둘째는 나이가 많도록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도록 민족은 고사하고 아들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셋째 아직 자신의 땅 한 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그때 마다 마음에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아들 정도가 아니라 민족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평생 믿음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닙니다. 낙심할 때마다 앞길이 캄캄할 때 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다시 만나고 새 힘을 얻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꼭 그와 같이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이제 우리 노력으로 우리 열심히 우리 지혜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항상 만나주시고 우리 길을 순간 순간 인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다시한번 믿음을 세우시고 우리와 동행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그 예수님을 만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에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것처럼 내게도 주님이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내 문제에 대해서 인도해 주시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내 안에 오셨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을 어떤 특별한 체험, 아주 놀라운 신비한 체험일 것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매 순간 평범한 삶 속에서 경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돈스럽고 두려운 일이 많은 중에도 담대한 비결은 항상 예수님을 만나고 인도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길을 아는 자에겐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으로 가는 길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후 집으로 갈 때 혼돈이나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도 그렇게 길이 훤히 보이십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데 생소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사람의 말에 자주 흔들립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처럼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주의 인도받는 것이 특별한 경험일 것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밤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일상적인 삶이었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서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네가 로마에서도 내 증인이 될 것이라.”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체험입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런 체험은 내게는 없을 거야. 내게 이런 체험은 아마 평생 한번 일어날까? 이런 체험을 하려면 기도도 많이 해야 되고 금식도 해야 되고 아마 기도원에도 가야 될텐데 나는 그럴만한 여건도 안되고 혹 그런다 하더라도 다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란던데.’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늘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밤중에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 성령께서 막으시는지 모르겠어요. 전도를 하겠다는데. 그때 밤에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환상 중에 유럽으로 건너가야지,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유럽으로 건너가는 것이야. 지시하시는 응답을 받는 장면입니다.
행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유럽으로 건너가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버립니다. ‘세상에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간 것인데 감옥에 갇혀서 무슨 처지인가?’ 사도 바울도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밤중에 사도 바울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갑자기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기도가 나왔어요. 그때 옥문이 흔들리고 간수장이 예수 믿고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에 보면 고린도에 가서 사도 바울이 ‘이 도시에 복음을 전해야 되나?’ 도무지 예수 믿을 것 같지 않아요 사람들이. ‘그냥 빨리 다른 도시로 가야 되나?’ 마음이 흔들릴 때 이런 응답을 받습니다.
행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행 27:23-24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사도 바울은 늘 예수님과 만나고 인도하심을 받으며 전도 여행을 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여행을 죽 다닐 때 항상 주님은 사도 바울을 만나주시고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새 힘을 주시고 길을 가르쳐주시고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본문 내용은 특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항상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런 동일한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원한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간절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부르신 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목사 되라고 해서 목사가 된 건가? 그것을 꼭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갔습니다, 제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서“유기성 목사야, 내가 너를 불렀다.”하는 한 마디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기도원에서 내려왔습니다. 너무나 낙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불렀다면 그 말씀을 안해 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 제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육성으로 들으려 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체험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을 몰랐습니다.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음성은 육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듣는 것이었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저는 주님께서 생각을 통하여 제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부터 믿음으로 사는 삶이 순종으로 사는 삶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이란 생각나는 것이라! “설마?”하고 믿어지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도 생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어야 할텐데, 생각으로 듣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니 성령께서 생각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롬 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경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을 잘 읽어 보면 성령의 역사가 마음과 생각으로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주님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 속에 주님은 대답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러나 특별한 체험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신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너무나 원하십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특별한 체험이 아니니까 주님을 만났다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각은 내면의 자아에게 하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이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께 하는 대화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조용히 혹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요?” 그러나 한번 해보았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종일 여러분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말하지 말고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 무엇을 할까요?’ ‘예수님은 어떠세요?’ ‘주님, 이런 때는 제게 좀 지혜를 주세요.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제가 할께요.’
우리는 하루 동안 일하다가 시간이 나면 마음 속으로 질문합니다. ‘다음엔 무엇을 하지?’ 이제는 그 때마다 예수님께 물어보십시오. “예수님, 당신의 생각을 제 마음 속에 부어 주소서. 제가 지금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루 종일, 매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단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네가 통로를 열어 놓는 순간을 말이야. 나는 너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어. 그것은 네가 지금처럼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란다. 온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는 사람들이 멈춰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쉬워보이지만 나는 잘 되지 않아요.”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각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대화하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 행하고 체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워낙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을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그렇게 듣고도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데 전혀 훈련이 안됐던 것입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은 내게 있어 굉장히 중요하고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주변에 되어지는 일들은 내게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실제라고 내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그렇게 하고도 혼자 있을 때는 나 혼자 있는 줄로만 생각하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깜박깜박 잊어버린 채 그저 혼자 소리처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나?’ 그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처럼 내게 말씀하실 것처럼 내가 이제 그렇게 믿고 전혀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에게 말을 건다는 일이 익숙지 않으신 것입니다. 단 그것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법과 너무 다른 방법이니까 여러분에게 익숙지 않은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는 안되나 봐, 나는 어쩔 수 없어.” 하며 말하는 것을 안타까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하나 못하나 관심을 가지시기 보다, 오직 우리가 바로 서게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십니다.
하루 아침에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미숙하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워낙 마음에 계신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안되고 실패하고 주님을 바라보기는커녕 죄짓고 살았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비참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은 다시 용서하시고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공부를 하다가 “아빠, 엄마, 나는 안되나 봐요.” 그럴 때 가슴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왜 네가 안된다고 그래?”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기심의 유형 중 하나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처럼 빨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더 잘 듣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쉽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자기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자아 추구입니다. “왜 나는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 이해가 잘 안되지? 목사님은 되나 봐. 나는 잘 안되는데.” 그런 비교하는 마음 때문에 좌절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라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나는 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것이 목표는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완벽하게 더 빨리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늦었다, 잘 안된다, 그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주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주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마리아 마르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리아 같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마르다는 음식 준비하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언니 마르다를 도와서 음식 준비해야 된다는 생각까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예수님 얼굴만 쳐다봐도 좋고 주님의 말씀이 황홀해서 예수님 바라보다가 식사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내 안에 오셨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셨지 않아요? 그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가질 바람직한 태도는,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아래 앉아 자신 마저 잊어버린 채 “그 분의 영광스런 얼굴에 온전히 빠져서 기쁨에 들떠 그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삭임을 듣고 그 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 즐거움! 비록 내가 지금은 온전히 주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주의 말씀을 못듣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들려오고 있는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이 내게 유일한 기쁨이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하나 하나 듣는 것이 기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지는 것이 너무 즐거워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워요. 이런 분은 금방 귀가 열립니다. “나는 왜 잘 안되지?” 그러면 금방 낙심이 됩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조차 우리는 계속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께 잠잠히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을 감을 필요도, 자세를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입술을 움직일 필요도 없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주님께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하는 중에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와 함께 계시지요. 주님, 저를 인도해 주셔요. 주님, 제게 지혜를 주셔요. 주님 제게 말씀해 주셔요. 어떻게 하라는지 제게 알게 해주셔요.”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설교를 해야 되니까 말로 표현했지만, 여러분은 그냥 생각으로 주님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 말을 걸고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받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약간의 시간이 걸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가치가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치가 있습니다. 시간을 들이는 것,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훈련받는 이 일이 여러분의 생애 중에 그 어떤 것을 위해서 하는 것 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을 알게 되는 것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주님의 말씀을 내가 분별해 듣게 되는 것,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것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 생기는 것.
그것을 지속적으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처음에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들인 수고 보다 수백만 배나 더 값어치가 있습니다.
신문을 읽는 동안 물으시기 바랍니다. 음악을 듣는 동안 물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잠에서 깰 때, 잠자리에 들 때 물으시기 바랍니다. 집 안에 기도처를 마련해 두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너무 지쳐서 기도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때도 우리는 생각을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 “예수님, 예수님!”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를 다 알아들으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45번이나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어떤 행동도,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음대로 아무 것이나 안하고 항상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대로만 했다고 했습니다. 이 완벽한 순종이야말로 예수님을 아버지와 하나 되게 만들었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온전히 신뢰하게 만들었습니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이런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꼭 아버지께서 먼저 보여주시고 말씀하시고 나면 그 다음에 하라. 이것은 너무너 놀라운 삶의 도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하고는 완전히 다른 삶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보여주시면 주님이 지시하면 그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아, 정말 나에게 그렇게 해주실까?’ 그렇게 하고 싶지만 믿음이 안 생기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정말 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얼마든지 되니까. 사도 바울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은 정말 살아계시고 내 삶에 직접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습니까? 주님을 아는 만큼 맡겨집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염려가 맡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체험하는 순간, 그 즉시 염려가 하나님께 맡겨집니다.
저는 설교 하기 전에, 상담하기 전에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시간을 꼭 갖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산 호서대학교 청년 연합집회 때, 설교하기 전에 기도할 때, 설교 내용을 주셨습니다. 이미 8장의 설교문을 준비해 갔지만 새로운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하도 지난 주간에 일정이 바빠서 기도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기에 내려가는 차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중요한 집회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원고 정리는 했지만 제가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제가 준비한 설교 원고가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설교를 기뻐하시지 않으신가? 그래서 순간 ‘하나님이 계획하신 메시지가 따로 있나 보다. 하나님 무슨 말씀을 제가 전할까요?’그때 한 토막 한 토막씩 말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안한 채 올라가야 되는 상황이라 ‘주님, 제게 처음 전할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마무리는 도대체 어떤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내려가는 차 안에서 주님 앞에 설교에 대해서 묻고 답 듣고 묻고 답 듣고. 나름대로 한편의 설교가 머리 속에 그려졌습니다. 원고는 이.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고를 다시 가지고 설교를 해야 될까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것은 이 마음에 설교를 가지고 해야 될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대해서 편안한 마음이 왔습니다. 그러면 결정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고는 들고는 올라갔지만 설교는 전혀 다른 원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2,000명이 넘는 청년들 앞에서 설교했지만 한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물으면 정확하게 인도해주십니다.
지난 주간에 읽으시라고 여러분에게 추천해 드린 김하중 장로님이 쓰신 [하나님의 대사] 중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야말로 모든 것을 주님께 묻고 대답을 듣고 무슨 일이든지 했습니다. 중국 대사로 있으면서 매사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고 일한다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그런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사스가 중국에 퍼졌을 때 각국 대사관이 다 철수하고 교민들을 철수시킬 때‘하나님, 철수해야 됩니까?’‘철수하지 말아라.’하셨답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철수 계획을 다 세웠는데 철수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한 사람도 사스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없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이제 철수할까요?’‘ 아니 철수하지 마.’ 오히려 한국 대통령을 중국 방문을 하도록 준비를 시키셨답니다. 지금 중국은 사스로 인해서 정말 어려움 중에 빠져있는데, 대통령이 중국 가시기 이틀 전에 중국 사스가 종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을 지낼 때, 항상 결재하러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답니다. 어느 날 대통령께 보고 드리러 갔는데, 기도할 시간을 갖지 않았음을 깨달으면 중요한 것 잊었다고 다시 나와서 잠깐이라도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 지 여러분이 직접 책을 읽고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에 대해서 믿음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찬은 예수님은 우리와 어떻게 같이 계신지를 우리에게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의 시간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시므로 주님은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나와 하나가 되어 계시다. 오늘 이 일에 대한 확증을 주시는 시간이 성찬입니다.
이제 성찬을 받으실 때 여러분이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주님, 저도 만나주시고 저도 인도해 주시옵소서. 제가 주님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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