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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7,537편)〓/유기성 목사 설교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혜이다 /사도행전 21장 17~26절

by 고동엽. 2023. 1. 24.

2010.1.17 주일 설교(사도행전 강해 48)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혜이다

 

사도행전 2117~26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신학교 때 [인간관계 훈련]이란 과목을 들었었는데, 한번은 교수님께서 어떤 문제의 답을 구하는데, 7명 정도의 그룹에서 토의를 거쳐 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조건은 30분 안에 풀어야 하고 만장일치여야 하고 정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의 조는 답을 얻는데 실패하였습니다. 30분 안에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정답을 확인해 보니 제가 주장한 답이 옳았습니다. 그래서 더 속상했습니다. 마음 속으로거봐 내가 옳았잖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룹 평가회 때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끝까지 반대한 학생이 발언하기를 토론 중에 제 주장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강하게 주장을 해서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기가 싫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룹이 실패해 점수가 깎이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의견을 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받은 충격이 꽤 컸습니다.‘정답을 안다고 다는 아니구나,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고 하나 되게 만드는 지혜가 없다면 아는 것만으로 소용이 없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바른 것이다 하는 것만으로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면 지도자 자격이 없구나. 내가 아직 지도자 자격이 없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이 옳은 줄만 알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의 은사가 있고 지혜의 은사가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의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의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의 은사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환란을 피하라는 것입니까?, 담대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지혜의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 주위에 있던 제자들은 지식의 은사는 있었으나 지혜의 은사가 없어서 잘못 판단하였던 것이고, 사도 바울은 지식의 은사와 함께 지혜의 은사도 있었기에 담대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지혜의 은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실을 알아도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오히려 거스를 때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하여 선교 보고를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도 사도 바울의 지혜가 잘 드러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들에 대한 3차 전도여행 보고를 하였을 때, 야고보 사도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 선교 보고를 기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놀랍고 그리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이렇게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이유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 중에 사도 바울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수만 명의 신자가 생길 정도로 부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할 때,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이 율법과 할례, 규례를 여전히 함께 지키는 일을 용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생명과 같이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유도 율법을 어겼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랬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은 다 청산하고 이제 예수만 믿으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전부 율법 지키는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하고 관습도 지키면서 예수도 믿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율법도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이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는데 율법은 지키지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유대인 신자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대단히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 오면 따질 거다!’ 이러고 있었단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아주 난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선교 보고를 할텐데, 이것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될까?’ 야고보 사도가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에게 좀 분명하게 알립시다! 우리 중에 네 사람이 결례를 서원한 성도가 있어 그들이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게 되어있는데 당신도 같이 하시고 그리고 그 결례에 들어가는 비용을 당신이 부담하세요. 그러면 우리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 사도 바울도 율법을 잘 지키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사도 바울이 율법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좀 억울한 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한 것은 구원 문제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있어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미 상식이지요?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그것은 굉장한 쟁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정확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좋게 여겨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방인 선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율법은 나쁜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을 지켰습니다. 겐그레아에서 서원한 것 때문에 머리를 깎은 적이 있었고, 디모데에게 할례 받도록 하게도 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증거하였을 뿐입니다. 문제가 될 것 없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복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기가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로 인하여 난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사도 바울도 율법과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22-24절에 보니 네 사람의 교인과 함께 결례를 행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바울에게 대라는 것입니다.

결례란 일종의 정결 예식입니다. 보통 한달간 하는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 기간에는 금욕 생활을 합니다. 결례 기간이 차면 제물을 드리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결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신앙의 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율법을 경멸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중히 여기는 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받은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크게 시험들만한 일입니다. 바울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할 것도 없다. 유대인들이야 늘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으니까 지켜도 안 지켜도 상관 없겠지만,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보다 율법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 이것은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교인들이고 그 지도자들입니다. 온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온전치 못한 복음으로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 교회의 개종한 유대인들이 오히려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힘들고 어려운 이방인 전도를 하고 왔더니, 칭찬은 고사하고 죄인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힘이 빠지고 좌절할만한 일입니다.

정말 누가 잘못된 것인지 따져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치밀하고 공격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쳤는데, 이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라니 거꾸로 이방인 교회 교인들을 혼란시킬 만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이 오해한다고 바울 사역에 더 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 보다 더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은 증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무나 순순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문제에 부디쳤을 때 놀랍게도 전혀 아무런 주장도 하지도 않고 논쟁도 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예루살렘 교회가 한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이 결정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을 통해서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는 지식으로는 이것은 싸울만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 한번 해볼만한 일입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옳은지 한번 해봅시다! 예루살렘 교회가 옳습니까? 이방인 교회가 옳습니까?”

여러분, 지금은 결론이 났습니다. 이방인 교회가 옳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까지 그 점에 대해서 온전한 복음으로 서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할만한데, 또 사도 바울은 그만한 사람입니다. 굉장히 논리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아무 말을 안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 바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이해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총본산입니다. 그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온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기뻐할 성숙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그 정도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됩니다. 그것은 지식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되는데 그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성경 진리를 믿는다고 하지만 얼마나 전통과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배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조용하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가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 예배를 잘 드리는 기준은 [떠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뒤로 나가서 벌서기가 예사였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성경적일까요? 유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일어나서 춤을 추며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다윗이 춤을 추며 예배한 일은 유명합니다. 미갈이 그것을 비난하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79-12에 보면 하나님 보좌 앞에서 드려지는 예배 장면이 나오는데, 모두 흰 옷을 입고 일어나 종려 가지를 흔들고 바닥에 몸을 굽혀 경배합니다.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리면 이단인가 하고 의심할 것입니다. 실제로 초창기 청년 집회 때 은혜가 충만하여 일어나 춤을 추며 찬양하니 어느 교회에서 온 청년들은 다 뒷자리로 물러간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성경적인 전통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교적인 배경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것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정확히 이해했고 이방 선교의 방향도 바로 깨달았습니다. 답답한 사람은 유대인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도 바울이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했다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는 논쟁을 하다가 서로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분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방인 선교도 중요하지만, 유대인들의 선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존심, 기분, 닥칠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께서 한번은 지혜의 은사에 대하여 강해하다가 지혜의 은사는 성령의 다른 은사와 달리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은사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의 은사와 지혜의 은사의 차이는 사랑입니다.

누가 옳으냐 누구 의견이 옳으냐 주장하기 시작하면 교회라도 싸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지식의 은사에 사랑이 더해지면 하나가 됩니다. 옳은 방향으로 가면서도 하나가 됩니다. 이런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방향으로 가면서도 싸우지 않고 하나가 되어서 교회를 이루어가는 역사가 지혜의 은사입니다.

교회에서 섬기다 보면 의견이 맞지 않고 다툴 일이 생깁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는 일이 있다면 다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잘해보자는 것입니다. 바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는 알기는 많이 아는데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성령의 칭찬이 나옵니다.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가 어려운 가운데도 진리를 수호하였다는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무엇이 진리인 것을 잘 안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책망이 나옵니다.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식은 있었지만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빠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의 은사가 있는 데 사랑이 없으면 다툼이 생깁니다.

지식의 은사에 사랑이 더하면 지혜가 됩니다.

 

 

좀 전에도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목회하다가 예배 때 부를 찬송 때문에 큰 위기를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경배와 찬양을 드릴 것인가? 경건하고 조용한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를 토의하다가 교인들 사이에 육박전에 가까운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 말씀대로 교회를 세워가자는데 왜 이렇게 이해를 못해주나?’좌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어서 예배 찬송을 다 찬송가로 바꾸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논쟁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상사가 일어난 지 꼭 3개월 뒤에 장로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 자리에게 장로님들이 너무 쉽게 만장일치로 찬양 스타일로 예배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반대하던 장로님께서 허락하여 준 것입니다. 뜨거운 찬양 스타일을 싫어하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찬양 스타일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찬송가로만 예배드리는 것이 분위기를 너무 가라앉게 만든다는 것을 비로서 느꼈던 것입니다. 문제는 감정이었는데, 3개월의 시간이 제 진심을 이해하게 한 기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제가 그때 장로님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때 만약에 성경대로 하면 이것이 옳습니다! 자꾸만 주장했더라면 교회가 갈라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장해서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하더라도 그때 이것은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무릎꿇고 하나님이 역사해주시기를 기다리면 진심은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장로님들이 저의 진심을 이해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목사가 무조건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장로님들과 하나가 되어서 가자는 것이구나. 그래서 장로님들이 그 일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장로님들 마음에 불편함이 없어지고 목사인 저도 제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결국은 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주장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구나!’부족한 제가 비로서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갈등의 위기를 넘어서자 교회는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율법은 다 소용없다고 해놓고, 자기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하니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 중심은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기준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 심경을 고린도전서 919-20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도 구원하고 이방인도 구원해야 되겠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존심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 없었습니다. 자기 고집이나 주장도 얼마든지 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말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하나 예루살렘 교회가 시험 들면 안되겠다.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분열되면 안되겠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 지키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자세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그리고 성도들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지혜로 바뀝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게 된다 말입니다.

 

 

대학부를 지도할 때, 대학부 예배에 참석하라고 권유하면󰡐공부해야 한다, Report가 밀렸다.’고 하면서 줄행랑을 치던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부터인가 대학부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공부에도 참석하고, 수련회도 참석하고, 교회 봉사를 하는 등,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저 친구 공부를 포기했나? 무슨 은혜 체험을 특별히 했나?’했는데, 알고 보니 어느 자매를 너무너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자매가 나타나는 곳에는 틀림없이 이 형제가 나타난 것입니다.󰡐사랑이 힘이 대단합니다.󰡑

자매를 사랑해도 이렇게 된다면,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겠습니까? 견디지 못할 일이 없고 기쁘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 주차장 문제 때문에 좀 멀리 주차하고 오십시오. 대중교통편을 이용하십시오. 하고 권하는데, 아무래도 불편하실 것입니다. 저라도 불편할테니까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우리 교회에 전도되어 오시는 새가족을 정말 사랑하게 된다면, 그들이 교회 와서 시험 들지 않아야 되겠다. 얼마든지 대중교통 이용할 수 있고 멀리 주차하고 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지혜가 생깁니다. 옳다 그르다 주장하고 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주장, 소신을 접은 적이 있습니까? 가정에서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어떤 강사님이 가정생활 세미나를 하면서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들은 다른 남편을 칭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고 동창회에 다녀와서 한다는 소리가아무 개는 고등학교 때 공부도 못하고 별 볼일이 없는 아이였는데, 남편을 잘 만나서인지 좋은 옷에 좋은 보석에 얼마나 뻐기는지 눈꼴이 시어서 혼났어요.”라고 하면 남편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한다는 소리가 ' 이제라도 마음 고쳐먹고 그런 놈 만나 잘 살아 보라. 그러나 네 나이에는 힘들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집에 부부가 초대받아 갔을 때, 남편들은 그 집 요리가 대단히 맛이 있다고 너무 칭찬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아내는 속으로 화가 나서 말하기를 '이 빌어먹은 놈아, 이 집의 남편의 수입이 얼마인 줄 아는가, 나도 그렇게 돈만 벌어다 주어 보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이 다 지혜는 아닙니다.“내가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 인데 무엇이 문제야!”하지 말고내가 이렇게 말하면 내 배우자는 어떤 생각이 들까? 어떤 마음이 들까?’여기까지 읽어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싸울 일이 생깁니다. 충성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충성하고 열심 없는 사람들은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싸우는 일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닌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이해를 못했는데, 목회하다 보니 정말 충성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 싸웁니다. 그런데 싸우는 일이 다 지식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유익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자기 주장이 있고 생각이 있으니까 부디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하나가 되게 만드는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 있어서 지혜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하나님의 일꾼을 뽑을 때 꼭 지혜를 보신 것입니다.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교회를 섬기면서 한 마음으로 모아주는 일, 큰 일입니다.

시험 없이 한 해, 두해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를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3년간 여러분이 섬기는 부서에 시험 없이 싸움이 없이 한 마음으로 모아주면 엄청난 부흥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의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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