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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최대의 존재 이유/마태복음 22장 34-40절

by 【고동엽】 2023. 1. 24.

인간 최대의 존재 이유// 20010617

2001-12-08 17:26:55 read : 266

 

주일 낮예배// 마태복음 2234-40

 

13세기에 살았던 사랑의 성자 프랜시스에 대해서는 무수한 얘기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굽비오라는 마을이 늑대로 인해 피해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프랜시스는 제자 한 사람과 함께 무장도 하지 않고 늑대 굴로 갔습니다.

그들을 보자 늑대는 막 공격하려고 으르렁거렸지만 프랜시스는 그저 태연합니다.

 

그는 곧 조용히 늑대에게 사랑을 설교한 후, 두 손을 부드럽게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늑대가 다가오더니 프랜시스의 손 위에 자기의 앞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프랜시스가 늑대의 목을 껴안자 늑대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의 힘 앞에 짐승도 감격했다는 말입니다.

 

가끔 흉악한 사형수가 장기를 기증하고 온순하게 죽어 가는 얘기를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입니다. 그 사랑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의 고통스런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 최대의 존재 이유이고, 최고로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줍니다.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수많은 계명이 있는데 어느 계명이 제일 큰 계명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전 삶의 초점이 '하나님 사랑'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허무해지고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그 초점이 맞추어지면 우리 인생은 가장 성공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결정됩니다.

저급한 것을 사랑하면 반드시 저급한 인생이 됩니다.

가치 있는 것을 사랑하면 반드시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통 엄청나고 소중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평안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소중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3:19).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를 원한다!"

그렇게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은혜가 넘치게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최대 목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의 신앙이 성장했는가를 아는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사랑의 넓이가 얼마나 넓고, 그 사랑의 길이가 얼마나 길고

그 사랑의 높이가 얼마나 높고, 그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에 있습니다.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오늘 본문 37절을 간단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목숨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희생과 비례하는 것임을 예수님은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처럼 다 주신 분은 우리에게 다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진정 사랑했으면 "당신은 나만 사랑해야 돼!"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잔소리하지 말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크고 첫째 가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1.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까?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예가 있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자식 사랑입니다. 부모들은 대개 마음을 다해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녀보다 더 사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 하나님께서만 자기 자녀를 지켜주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온통 자녀 생각뿐입니다. 요즘은 그것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조금 늦게 오면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누가 납치한 것은 아닌지 염려합니다.

그리고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최선을 다해 자녀의 길을 열어주려고 합니다.

그처럼 자녀는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도 그 이상으로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처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 시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배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릅니다.

예배는 목사만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도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 태도도 다르고 기도내용도 다릅니다.

 

주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세요. 물질 주세요. 명예 주세요.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처럼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협박까지 합니다.

"하나님! 안주면 안돼요. 안 주면 안 믿을래요."

 

그러나 주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주님 무엇을 원하시나요? 저를 사용해주세요.

저는 주님 기뻐하시는 길을 가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알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주님 중심주의, 주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2. 목숨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지 않고는 사랑을 말하기를 조심하십시오.

주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목숨을 다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엄청난 사랑을 받고도 너무 시시하게 사랑을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목숨 걸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목숨 걸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 보십시오. 가끔 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나 보이고 힘들게 해도 자식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서라면 가끔 이런 기도도 됩니다.

"하나님! 필요하다면 제 목숨은 가져가시고 아이들은 축복해주옵소서!"

 

정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란 것이 알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능으로 자녀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 각오를 합니다.

그 이상으로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3.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 , 은사, 정열을 다 가지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찬송할 때 힘껏 찬송하십시오. 말씀 들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기도할 때에도 겟세마네 동산의 간절함으로 기도하십시오.

예배 드릴 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과 물질과 시간을 힘껏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최상의 존재이십니다. 당연히 우리의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최상의 기도를 드리고, 최상의 예배를 드리고, 최상의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시간이 남으면 예배에 나오고, 돈이 남으면 헌금하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영광의 하나님께 어찌 쓰다 남은 찌꺼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구별해서 드려야 합니다. 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겸허하게 나와야 합니다.

은혜 받을만한 준비를 하고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심령을 찾으십니다.

 

어떤 분은 몸과 마음으로는 사랑하는데 물질로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분은 물질로는 사랑하는데 몸과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헌신이 아깝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헌신이 아깝지 않습니다.

어떤 분에게 15만원 짜리 강아지가 있었는데, 그 강아지가 그만 병들었습니다.

수의사한테 가니까 수술해야 되는데 수술비용이 3백만 원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술하지 말고 다시 강아지를 한 마리 사라고 친절하게 권유합니다.

그러자 이 분이 뭐라 말하는지 아세요. "3천만 원 들어도 고쳐달라!"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헌신을 낳고 희생을 낳습니다. 그러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

 

그리고 주님께서는 둘째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 받은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웃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대로 정비례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해도 이웃 사랑이 없으면 안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이웃과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소중한 추억을 남깁니다.

톨스토이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불행의 시초이고, 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의 시초이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회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일성수, 십일조, 아름다운 봉사,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것도 교회생활을 잘하는 표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장 교회생활을 잘하는 표시는 바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사랑이 중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실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옛날에 시험 칠 때 너무 중요한 것이면 선생님이 "이것 시험에 난다!"고 합니다.

본문 40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은

마지막 심판 때에 반드시 그것을 가지고 상급심판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예고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했습니다!"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더 늦추지 마십시오. 지금 사랑을 결단하고, 예배 후에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 자신의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할 때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정말 본능적으로 사랑합니다.

오죽하면 <하나님 사랑>의 반대를 지나친 <자기 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정도로 누구나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감상일 뿐입니다. 사랑을 감상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감상하기만 하면 사랑의 능력과 사랑으로 인한 축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호주머니를 비우는 사랑이 될 때 진정 축복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3세에는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머리와 눈썹이 빠지고 몸이 마르는 병에 들어

의사로부터 앞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전 세계 기자들은 그의 사망기사를 써 놓고 타전한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최후 검진을 위해 병원으로 휠체어 타고 가는데

가물가물한 눈으로 병원 로비에 걸려 있는 한 액자의 글이 들어왔습니다.

액자에는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그 글을 보니까 갑자기 어렸을 적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록펠러에게 살면서 3가지를 꼭 실천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첫째, 언제든지 교회 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교회를 네 몸처럼 사랑해라.

둘째,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

셋째,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치고, 십분의 일은 이웃을 위해 써라.

 

갑자기 어머니의 음성이 마음속d[ 들려오면서 마음이 선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뜨거워집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전율이 흐르고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그처럼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니까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한참 눈을 감고 예수님을 생각하는데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니까 병원 사무원과 환자가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병원비가 없으니까 입원을 못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자 어머니는 제발 입원시켜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의 마음에 선한 마음이 듭니다.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게 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소녀가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죽을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옆에서 그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니까 자기가 너무 기쁘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주는 자로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의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렇게 작정하면서 잘 자고, 잘 먹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약자를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는 삶이었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서 이웃을 위해 베푸는 삶은 행복과 보람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베풀지 않고 쥐고 있으면 결코 행복은 그 사람을 찾아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임종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다음과 같은 3가지라고 합니다.

"좀더 감사하면서 살 걸..."

"좀더 참고 살 걸..."

"좀더 베풀면서 살 걸..."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은경 자매가 백혈병 치료로 장기 입원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압니다.

같은 교인으로서 그 어려움을 외면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젊은 부부가 살고자 애쓰는 모습을 봐도 아무 느낌이 생기지 않습니까?

 

병원비 때문에 자가 골수이식 수술에 필요한 충분한 골수를 확보하지 못한 채

이번에 최소량의 골수를 가지고 골수이식 수술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을 보면서

담임목사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여러분들은 그 심정을 이해하십니까?

여러분! 나중에 "좀더 베풀면서 살 걸..."하고 후회하지 마시고 지금 베푸십시오.

우리의 조그만 나눔이 젊은 부부의 삶에 용기를 주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희망의 전령자들이 정말 그립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이 필요하고,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어려운 세상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서로 서로 제공하며 사십시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급 심판을 받을 때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입니다.

그 밖의 다른 어떤 큰 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는 큰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너무 중요해서 오늘 본문 40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음성의 가장 핵심적 내용이고,

또한 인간 최대의 존재 이유이며, 성도의 가장 기본 행동원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캐나다의 페드스톤이란 곳에 한 자매가 설암에 걸려 혀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가 수술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라고 합니다.

자매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주님! 그래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도 이런 사랑의 고백이 항상 넘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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