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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15장25-32 / 탕자의 비유 (첫째 아들 편)

by 【고동엽】 2023. 1. 18.

(누가복음 15장)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묵상/눅 15:25-32)

 

◆ 탕자의 비유 (첫째 아들)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서 둘째 아들을 맞이했지만, 형 마음은 전혀 달랐다. 반가워하기는커녕 돌아온 것 자체가 못마땅했다. 형의 눈에는 동생이 그저 양심 없는 놈에 불과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못마땅하다.

근래 들어서 나를 보고 저렇게 기뻐한 적이 없거늘, 어떻게 허랑방탕, 온갖 사치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여 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아들을 보고 기뻐서 잔치까지 벌이는가?

 

첫째가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언뜻 보면 정당하게 보이나 조금 분석해보면 자만심과 자기 의에 빠져있는 것이며, 그런 것이 비교의식에서 나온 우월감을 형성하고, 사람을 차별하게 했다.

 

억지를 써서 상상하자면, 첫째 아들은 평소에도 은근히 아버지에게 둘째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버지에게 귀한 아들인가를 생색냈을지도 모른다. 동생이 돌아온 것을 보고 심통을 부리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이런 상상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닐 것이다.

 

크게 잘나지도 못했으면서 둘째 아들이 워낙 못났으니까 덕분에 도드라졌을 뿐인데 그걸 크게 잘난 것으로 착각하여 생색내는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느꼈을까?

 

둘째 아들과 첫째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

이 비유를 하시게 된 처음의 발단이 세리와 죄인들 예수님께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비난한 일에서 시작했다. 이러면 첫째가 바리새인과 서기관, 둘째가 세리와 죄인들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우리는 예외 없이 둘째 아들 과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손들고 아버지께 나아온 자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앙생활 하면서 점점 첫째 아들로 변모해간다. 고집스럽고 으스대며, 눈살을 찌푸리고 형제를 보게 된다. 남들에게는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똑바로 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른다.

 

물론 자신이 저들처럼 남을 속여서 재산을 빼앗고, 불륜을 저지르며, 철저하게 자기만 생각하는 사이코패스들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자들과 비교하며 가진 우월의식이 점점 나를 첫째 아들의 모습으로 바꾸어가고 있음을 아는가?

 

복음은 율법주의와 확연히 다르다.

복음은 첫째 아들처럼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목표다.

 

내가 아무리 겸손한들 우리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마굿간에 태어나신 그 겸손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 주님의 마음이 임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받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어야 산다.

 

오, 주님, 제 믿음이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자기 의를 기반으로 하는 율법주의는 사람을 점점 메마르고 종교적인 사람으로 바꾸어간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첫째 아들처럼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우리의 삶의 동력은 사람에게 칭찬받으려는 것이나 자랑하는 힘이 아니라, 성령의 갈망과 믿음으로 얻게 된 주님의 마음이다 (갈 5:5-6).

 

◆ 둘째 아들의 침묵

 

오늘 비유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둘째 아들의 침묵이다.

 

만일 이 비유를 이렇게 확대해보자.

둘째가 형의 이런 모습에 실망하여 형을 비난하고 결국 싸움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말도 안 된다. 형을 비난하는 돌아온 탕자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슬프게도 현실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

 

이들은 형편없이 살면서 고칠 생각이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절제하며 똑바로 사는 자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매도한다. 이들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자랑처럼 말하고, 겸손을 으스댄다. 도대체 겸손이 으스댈 수 있는 덕목인가? 겸손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언뜻 보면 복음을 잘 깨닫고 있는 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성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일 뿐이다.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자다.

 

아, 사실은 내가 바로 이런 자였다. 그러니 얼마나 부끄러운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 둘째 아들의 침묵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비난에도 달게 듣고, 그저 아버지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모습이 둘째에게 어울린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왜 아버지의 마음을 품지 않는가라고 비난할 여력이 내겐 없다. . 나 자신이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지 않거늘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점점 첫째 아들처럼 변해가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둘째 아들과 같은 자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를 받아주시고 기뻐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늘 복음의 진리 가운데 행하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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