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2002-08-13 15:01:55 read : 2790
시 137 // 20020811
< 아우슈비츠 회상 >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암호명 "할머니가 죽었다"로 명명된 작전명령이 떨어지자
숙달된 히틀러의 정예부대가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5일만에 폴란드는 독일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1940년 초,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곳에서 국가 지도자, 지식인, 언론인 등 10만 명의 폴란드 정치범들이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우슈비츠는 전쟁포로와 유대인들의 수용소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나치는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80명이 타는 화물칸에 400명씩 실려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 도착 전에 질식해죽었습니다.
수용소에 도착하면 "이제 자유롭게 살라!"는 수용소장의 친절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지만
곧 바로 생체실험을 했던 요제프 멩겔레 박사의 엄지손가락이 그들의 생사를 갈랐습니다.
그때 병자와 노약자, 키 작은 어린이들은 바로 목욕탕으로 위장된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낼 때 일정 크기 이상의 짐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기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가방 안에는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만 있었습니다.
나치는 가방에 자기 이름을 쓰게 하고 잘 보관해 놓겠다는 방송과 함께 옷을 다 벗게 하고
목욕탕으로 위장된 가스실로 수건 한 장, 비누 한 개를 들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목욕탕이 사람들로 빽빽해지자 일부 유대인들은 "어떻게 샤워를 하느냐?"고 항의하지만
대답은 없고 곧 묵직한 철문이 닫히며 노란 빛깔의 공기가 샤워꼭지를 통해 흘러나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은 조용해집니다. 비명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다 죽은 것입니다.
약 30분 후에 철문이 열리고, 유대인 간수들이 시체를 밖으로 꺼내 화장터로 실어보냅니다.
화장할 때 흘러나오는 기름으로는 다시 불 위에 뿌리거나, 비누 재료로도 사용했습니다.
그때 바로 가스실로 가지 않은 사람도 조금 더 사는 것 말고는 곧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의 유대인 살해는 나치의 변덕에 따라 종잡을 수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날은 안경 쓴 사람만 가스실로 보냈고, 어느 날은 키 큰 사람만 가스실로 보냈습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로 수용소 철조망의 고압전류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수용소에 온 한 임산부는 죽을 줄 알았는데 멩겔레가 살려주었습니다.
그녀가 2개월 후에 갓난아기를 출산했을 때, 그녀를 살려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갓난아이가 태어난 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이 아기는 난지 8일만에 고통하는 것을 보다 못한 엄마에 의해 독살되어 죽었습니다.
매일 저녁, 독일 간수들은 식사 후에 카페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며 특별한 쇼를 즐겼습니다.
카페 안에는 무대가 있는데 쇼가 시작되면 요염한 여자가 무대로 올라가 가운을 벗습니다.
잠시 후, 수용자 중에서 뽑힌 20대의 건장한 남자가 무대에 올라 포르노 쇼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여자가 질긴 끈을 꺼내 남자 목을 감고 조이면 남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습니다.
남자가 죽으면 쇼는 끝나고 여자는 가운을 걸치고 나치의 환성을 들으면서 무대를 떠납니다.
이러한 살인 쇼가 거의 매일 밤 공연되었습니다. 원시시대가 아닌 20세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북쪽 아인케렘이란 산에는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 추모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기념관 출구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망각은 멸망에 이르지만 기억은 구원의 길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우슈비츠를 잊는 것이다."
< 축복을 나눠주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
힘이 없는 나라, 힘이 없는 민족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명성황후를 보지 않았습니까? 한 나라의 왕이 이웃 나라 깡패들에게 얼마나 수모를 당합니까?
오늘 광복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약소국을 돕는 부강한 나라를 꿈꾸어야 합니다.
나라가 무너지면 내가 아무리 잘 되어도 소용없습니다. 곧 전 국민이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냉철하게 나라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준비도 없이 감정만 내세우고 말로만 "일본을 이기자!"고 하면 일본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느 날, 하와이 피서지에서 13명이 탄 작은 유람선이 풍랑을 만나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구명보트를 내렸는데 그 보트에는 최대 10명밖에 탈 수 없어 3명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침묵을 깨고 영국 사람이 신사도를 발휘해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곧 이어서 명예를 존중히 여기는 교육을 많이 받는 미국 사람이 뒤따라 뛰어내렸습니다.
세 번째로 한국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일어나 "대한 독립 만세!"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옆에 있는 일본 사람을 발로 툭 차서 물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감정적인 대일 저항의식을 비꼰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을 그런 식으로 대합니다.
냉철해야 합니다.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자유는 찾았어도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땀을 흘리고, 질서를 지키고,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캘빈은 말했습니다. "자유란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능력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남만 비판한다면 어떻게 일본을 이기겠습니까?
특히 우리는 우리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썩었다고 손가락질하는 모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자신이 지킬 것은 지키지 않고 남만 비판하면 아우슈비츠의 고통이 언젠가는 찾아옵니다.
사실 6.25로 완전 폐허가 된 상태에서 이렇게 단시일에 잘 살게 된 나라가 없습니다.
조금 나이 드신 분들은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좋은 음식을 맛보려고 멀리까지 드라이브해서 가는 것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정치에 대한 비판을 해도 식민국가에서 이렇게 빨리 민주사회를 이룬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살만하다고 마음이 높아져서는 안됩니다.
대개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은 어려운 때보다 살만할 때에 더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즉 축복 받고 마음이 높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축복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나라가 축복 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 받았다면 선교와 구제에 힘쓰고, 가난한 나라와 북한을 더욱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저는 세상에서 많은 축복 받았어요"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받은 축복과 성취가 하나도 평가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성취를 가지고 얼마나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는지만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최소한 선교사님 한 분과 어려운 사람 한 분을 선택해 돕길 바랍니다.
한 달 30일 수입 중에 최소한 1일 수입은 선교와 구제를 위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나눔이 없다면 그 삶은 성공한 것 같지만 실패이고, 이긴 것 같지만 진 것입니다.
지금 마음이 어떻습니까? 만약 마음이 메말라 있다면 그것은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나눔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따듯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시를 보고 참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내가 누나니까>라는 시였습니다.
과자 사러 갔다.
동생이 자동차를 산다고 했다.
돈이 모자랐다.
내가 삼백원만 사먹었다.
자동차를 살 수 있었다.
기분 참 좋았다.
내가 누나니 그래야 된다.(정은솔)
동생을 위해 "내가 누나니까!"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모습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에게 이렇게 산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밝아지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합니까?
우리 나라가 조금 살만하다고 마음이 높아지면 반드시 낮은 자리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가 정말 잘 되려면 민족적 교만, 국가적 교만도 없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가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그들이 잘해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정치가들 비판에 열을 올리는 분들이 있지만 비판보다는 기도해야 합니다.
지도자 비판은 쉽고, 돈도 들지 않고, 입만 움직이면 되지만 그것으로는 변화가 없습니다.
반면에 기도는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비난보다 기도가 사회를 더 바꿈을 믿어야 합니다.
2차 대전 중에 영국 국회에서 중요한 안건을 심의하는데 처칠 수상이 조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국회의장이 일국의 수상이 중요한 안건을 다룰 때 졸면 되느냐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처칠은 조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국회의장이 또 소리쳤습니다.
"아니 이런 중요한 때에 국회에서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기도는 교회에서나 하세요."
그러자 처칠도 소리질렀습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기도해야지 언제 기도하란 말입니까?"
정말 우리 민족이 잘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기도하고, 내 주변부터 쓸어야 합니다.
우리가 엎드려 기도하고 우리의 책임을 다한다면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잘 산다고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아우슈비츠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 은혜 받은 기억은 인생의 큰 자산입니다 >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하며 지은 슬픔의 시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대개 국가가 망하고, 민족이 분열되고, 포로 생활에 처하게 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와 교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면 포로생활에 처한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처럼 죄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강가에서 남의 나라 사람들의 술시중을 들면서
성전을 그리워하지만 그래도 그 생활이 아우슈비츠의 생활에 비하면 행복한 생활입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지옥에 비하면 낙원에 가깝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니까 성전에 있을 때 충성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됩니까?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참 후회가 됩니다.
어떤 장로님이 임종예배를 드리는데 계속 눈물을 흘려서 목사님이 사연을 물어보니까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고 축복 받았는데 교회건축을 반대한 것이 후회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는 예정대로 지어지고 자기는 죽게 되었으니
지금 와서 자기의 많은 재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후회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일생에 한번쯤은 교회건축에 내 힘과 정성이 드려지는 기회도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은혜 받은 때, 은혜 받은 장소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대한 기억으로 포로 생활에서 그나마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런 좋은 기억들은 언제 주어집니까? 항상 기쁜 마음으로 희생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희생함으로 좋은 기억들을 만들면 그것이 얼마나 인생의 큰 자산인지 모릅니다.
희랍 신화를 보면 한 여인이 영원한 나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널 때 뱃사공이 말합니다.
"영원한 나라로 가기 전에 레테 호수의 물을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죠?"
"과거의 모든 아픈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녀가 좋아하며 "그럼 저는 이 물을 먹을래요"라고 하니까 뱃사공이 한 마디 더 합니다.
"그런데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면 기뻤던 일도 동시에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여인은 고민하다가 레테 호수의 물을 먹지 않고 영원한 나라로 갑니다.
사람에게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기억입니까?
역시 하나님께 예배하며, 형제들과 사랑을 나누며 교회생활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런데 삶에서 아름다운 기억이 없고 미움과 질투만 있다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우슈비츠에서 고문이나 기아나 학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부서지는 아픔이었습니다. 나치는 인간의 영혼을 증오로 채웠습니다.
서로 아껴주어야 하는 마음에 증오를 심어준 것이 바로 나치의 가장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런 영혼이 부서지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창고에서 찾아야 합니다.
1절, 6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그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면서 자기 영혼의 파괴를 막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몸은 포로생활에 처해있어도 영혼은 행복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몸은 큰 맨션 안에 살면서 영혼은 그저 맨손으로 불행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평생 큰 집 마련하느라 고생하지만 그 큰집에서 얼마 못 살고 죽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비싼 집에 집 지키는 개 키우고 감시 카메라를 달고도 불안하게 살면 그게 무슨 복입니까?
최고급 아파트에 살아도 그 영혼은 아직도 판자집이라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시편 기록자는 주 안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했고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습니다(시 84:10).
이 말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하루의 삶이 믿음이 없는 사는 3년의 삶보다 낫다는 말이고,
믿음을 가지고 초가집에서 사는 것이 믿음 없이 큰 집에 사는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인생은 성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 자체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항상 은혜를 아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이 철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대개 은혜를 아는 자가 될 때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지 않아도 "부모님의 은혜가 참 고맙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철이 든 것이고,
나이가 많이 들어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으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아직도 부모님으로부터 계속해서 무엇을 얻을 것만 생각하면 철이 덜 든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는 사라집니다. 더 얻을 것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은혜가 느껴지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할 때 은혜를 아는 철든 신앙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받을 것만 생각하면 은혜는커녕 원망할 일만 많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심각한 위기입니다. 그러면 영혼도 망가지고 축복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피멍이 들게 하면 어찌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바벨론 포로가 되지만 다시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사고만 치는 자식을 꺼내러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마음이 멍든 어머니와 같습니다.
아마 훨씬 더 애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보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무슨 원망을 합니까?
이제 우리는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교회를 아프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십시오 >
우리의 축복의 핵심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손익계산이 분명해야 합니다. 돈 계산이 아닌 인생 계산을 잘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은 멀리 하고, 복 받을 길은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구분은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 냉철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분명히 복이 아닌 길로 간다면 그것은 인생 낭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가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교회 봉사를 한 것 같지만 끝이 불평으로 끝나면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 봉사한 것입니까?
끝이 감사로 끝나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끝이 불평으로 끝나면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하면 우리는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아주신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그 모든 것을 묶어 가장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은 죽더라도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면서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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