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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하신 나의 하나님// 빌립보서 4장 19-20절

by 【고동엽】 2023. 1. 23.

풍성하신 나의 하나님// 20010131

2001-12-08 17:36:21 read : 219

 

수요일 저녁예배// 빌립보서 419-20

 

가끔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의 이유를 묻는 일이 아니라

고통의 밤이 지난 후에 있을 새벽의 찬란한 약속을 붙잡는 일입니다.

고통에는 분명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경륜이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고 질문을 합니다.

"왜 저처럼 아름다운 영혼이 엄청난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야 할까?"

"왜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내 곁은 떠나야 할까?"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결코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처럼 인생에 있어서 겨울이 오는 이유를 정확하게 모를지라도

대개 사람들은 인생에 겨울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겨울 속에서도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을 가질 때 우리 인생은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될 것이며,

우리에게 미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어떤 사실보다 위대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질곡 속에서 우리가 캐어 내어야 할 영적인 보물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성,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실질적으로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끔 어려움을 만나긴 했지만

그때가 진정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는 때가 아니었습니까?

그처럼 인생의 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눈!

그런 눈이 바로 신앙인이 가져야 할 눈일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작년에 새벽예배에 한 번 늦게 나가서 510분전에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재작년에는 두 번 늦게 나가서 역시 예배 10분전에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 번 모두 하나님께서 전도사님들을 일찍 교회에 오게 하셨습니다.

전도사님들은 1365일 동안 대개 55-10분전에 교회에 도착하는데,

유독 제가 잠에서 깨지 못했던 그 며칠만은 525-30분전에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교회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집에 전화를 해서

2년 동안 다행히 새벽예배에 한번도 늦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1365일 중에서 그 며칠간만 전도사님들이 일찍 나옵니까?

우연일까요? 우연이 아니라 제가 늦잠 자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전도사님들을 일찍 교회에 보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사실을 통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가 은혜와 감사의 눈으로 우리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삶의 곳곳에 미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야만 변하면 우리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은 언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는지 잘 알려줍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될 때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넉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깊이 하나님과 교제를 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쁨이 생기게 됩니다.

그 기쁨이 신앙생활의 출발이고, 능력의 원천도 바로 이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아는 신앙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사도 바울의 능력 있는 사역의 원천이었습니다.

 

사실상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이 성경에는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약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 중에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까?

시편 23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다윗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도 바울의 '풍성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목자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 때 어떤 증거가 생기게 될까요?

 

1) 다른 좋아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가장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과거에 내가 좋아하던 세상 것을 버렸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2) 내 안에 생수처럼 솟아나는 기쁨과 행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고백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삶이 없다면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3) 우리의 삶을 얽어매는 각종 두려움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대 과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를 잘못 적용하면 자칫 실수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 실수란 무엇입니까? '나의 하나님''나만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은밀하고 깊은 교제를 하라는 의미이지

"하나님을 나의 필요만 채워주는 하나님으로만 알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었으면 넉넉한 마음으로

나의 하나님이 다른 분에게도 풍성하게 역사할 수 있도록

'나의 하나님''우리의 하나님'으로 알고 추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19절을 보면 그가 처음에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그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까?

하반부에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의 깊이에서는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입장에서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더욱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도 나누고, 시간도 나누고, 마음도 서로 나눠야 합니다.

우리가 그처럼 마음과 기도를 나누고 서로 중보의 손길을 베풀 때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 하나님은 정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풍성함을 우리가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곳에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주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기도제목이 십자가의 영광이 분명히 나타나는 기도제목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풍성함을 반드시 나타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3. 우리의 구체적인 필요(쓸 것)를 채워달라고 기도할 때

 

오늘 본문에서 쓸 것을 채워주신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주시고, 필요 없는 것이라면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욕심 부리는 것을 무작정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쓸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쓸 것이 아닌 것을 채워 달라는 것은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것이 쓸 것인지를 잘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쓰임 받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하는 것을 쓸 것으로 여기고 기쁘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쓸 것보다 쓰임 받고자 하는 기도가 항상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수시로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때로 쉬운 문제, 때로는 산과 같은 문제를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힘을 주는 말씀 중의 하나가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라면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이은경 집사님이 급성 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가장 먼저 산과 같이 부딪쳤던 문제가 바로 치료비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치료비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니까 치료비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거기에 무슨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있겠습니까? 생명이 사는 일입니다.

그처럼 욕심 없이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필요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하나씩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고 주님이 필요로 하는 것인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제목대로

그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간절히 하나님께 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의 아내는 저보다 키가 큽니다.

대학교 때부터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키가 큰 남자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거듭난 후 결혼대상의 기도제목이 바뀌었습니다.

"영적인 키!" 그것이 바로 결혼대상을 위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 기도제목대로 이루어졌는지는 몰라도 좋은 변화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처럼 외모보다 중심을 더욱 기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남자 외모 잘생긴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이 지나쳤습니다. 그래도 그런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외모를 지나치게 중시하다 보니까 다른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 이후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한지 모릅니다.

가끔 제 아내에게 전화가 오면 그 남편으로 인해서 죽겠다는 말뿐입니다.

마음으로 외모가 가려져야지 외모로 마음이 가려진다면 불행뿐입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가 육체의 소욕이 앞선 불행한 기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제목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면

하나님께서 응답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간절히 구해 보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할 때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 주면서

"하나님이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그런 축복기도를 합니까?

왜냐하면 빌립보 교회가 남을 위해 베풀 줄 아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4-18절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려웠을 때 가장 많이 도왔던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처럼 빌립보 교회가 남을 위해 베풀 줄 아는 교회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그 교회의 쓸 것을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남을 위해 풀지 않고 쓸 것만 달라고 하는 기도는 도대체 어떤 기도입니까?

하나님께서 진정 그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나 한 사람만 잘되는 것, 나의 가정만 잘되는 것,

혹은 나의 일만 잘되는 것 정도에서 기도제목이 그쳐지지 않게 하십시오.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의 필요까지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더욱 축복을 예비하시지 않겠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신약교회 중에서 사도 바울에게 가장 감동을 주었고

사도 바울의 구체적인 필요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빌립보 교회의 쓸 것을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쓸 것을 채워주는 것과 상관없이 얼마나 삶이 행복해집니까?

헌신을 알 때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알게 될 때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영혼도 건강해지고 삶의 생명력도 강해질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10명의 산악인이 조난을 당했습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싸워야 했습니다.

결국 구조대가 도착했습니다. 보니까 10명중에 4명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6명중에 5명이 독신이었고, 1명은 결혼한 사람이었는데,

살아 있었던 4명은 모두 결혼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우연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혼자 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돌아갈 가정이 있는 사람은 독신에게 없는 어떤 생명력이 있습니다.

즉 내가 땀흘리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는 가족 생각이

그들의 삶의 의지를 꺼지지 않게 했고, 결국 그들을 살게 한 것입니다.

 

사랑을 알고 희생을 아는 사람은 더 풍성해지고 더 튼튼해집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가치에 신경을 더 쓸수록 영혼은 더욱 빈약해 질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은 하면 할수록 풍부해지고, 안하면 안할수록 빈곤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의 영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며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분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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