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을 밝히 해석함 (베드로후서 1:20).
베드로후서 1:20은 우리에게 성경 해석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여 줍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는 이 한 절은, 예언이 인간의 재치나 개인의 감정, 시대의 유행, 혹은 설교자의 재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신 말씀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밝히 읽고’ ‘바르게 분별하며’ ‘그리스도께로 모아’ 드러내야 한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언을 “밝히 해석”하려는 열망을 단지 지적 욕구로 취급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 교회 앞에서의 정직, 영혼 앞에서의 사랑으로 붙잡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을 사사로이 풀면 결국 사람을 드러내지만, 예언을 성령의 빛 아래서 풀면 마침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언을 생각할 때, 미래의 일정표처럼 펼쳐진 비밀 문서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언제가 오나”, “어디서 터지나”, “누가 주인공인가” 같은 질문을 먼저 세웁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단지 사건의 예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역사 속에서 드러내시는 구속의 빛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로 다가오셔서, 심판의 칼날과 은혜의 약속을 동시에 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예언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그 계시의 중심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시고,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며, 어떻게 교회와 열방 가운데 복음을 진전시키시고,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지를 “빛 가운데서” 따라가는 일입니다. 예언의 빛은 결국 한 얼굴에 비춥니다. 그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는 “먼저 알 것”이라고까지 말하며, 예언 해석에 경고의 못을 박아 두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생명은 왜곡되면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글자라도 성령의 조명 아래서 읽으면 회개의 눈물이 되지만, 자기 욕망의 조명 아래서 읽으면 교만의 칼이 됩니다. 사사로이 푸는 해석은 대개 세 가지 방향으로 흐릅니다. 첫째, 말씀을 내 경험에 끼워 맞춥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조연이 되고, 예언은 내 계획을 합리화하는 재료로 전락합니다. 둘째, 말씀을 내 호기심에 팔아넘깁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지나친 상상과 단정으로 성경을 흔듭니다. 셋째, 말씀을 내 권력으로 삼습니다. 자신이 특별한 계시를 가진 사람처럼 군림하여, 성도들의 양심을 성경이 아니라 해석자의 말에 매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은 결코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예언은 교회의 양식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공적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문맥은 우리의 눈을 더욱 맑게 해 줍니다. 사도는 자기들이 전한 복음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위엄을 친히 본 자”로서 증언하는 사실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들려온 하늘의 음성을 언급하면서, 그 경험보다도 더 확실한 것으로 “선지자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역전을 봅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체험을 더 확실한 것으로 여기지만, 사도는 성경이 더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체험은 개인에게 주어지지만, 성경은 교회에게 주어지고, 체험은 해석이 뒤엉킬 수 있지만, 성경은 성령께서 친히 숨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객관적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속 “체험 우선”, “느낌 우선”, “감동 우선”의 순서를 뒤집어야 합니다. 감동이 성경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감동을 다스립니다.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지워 버리는 차가운 칼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진짜 감정으로 살려 내는 불꽃입니다. 진리의 불이 감정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그을음을 태워 감정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정결케 합니다.
예언 해석의 바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는 길입니다. 예언은 성경 전체의 한 강줄기이며, 그 강은 창세기의 약속에서 시작해, 출애굽의 구속을 지나, 다윗 언약의 왕권을 흐르고, 선지자들의 탄식과 소망을 적시며,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바다처럼 넓어집니다. 그러므로 단일 구절을 떼어 내어 내 상황에 맞는 문구로 쓰는 순간, 우리는 예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가리게’ 됩니다. 밝힌다는 것은 연결하는 것입니다. 끊어진 조각을 내 손으로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엮어 놓으신 구속사의 직물을 따라 실을 다시 꿰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 해석자이며, 성령은 그 해석을 우리 마음에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빌미로 텍스트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텍스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는 말의 결을 조금 더 만져 봅시다. 여기에는 두 겹의 뜻이 함께 서 있습니다. 하나는 “예언의 기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음 절들이 말하듯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예언은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그러니 해석도 인간의 임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언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언은 공동체 안에서 읽히고, 공동체를 세우며, 공동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렇다면 예언 해석은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혼자만의 비밀 지도처럼 들고 다니는 해석은 대개 교회를 찢고, 두려움을 팔고, 그리스도를 흐리게 합니다. 반대로 교회가 고백해 온 믿음의 길 위에서, 복음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십자가의 빛으로 읽는 해석은 성도들을 자유케 하고, 소망을 단단하게 하며, 거룩을 견고히 세웁니다.
여기서 우리는 “밝히 해석함”이 무엇인지 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밝히 해석한다는 것은 첫째, 예언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위에 서서 우리를 재판합니다. 둘째, 예언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모든 별빛은 그리스도라는 태양으로 모입니다. 셋째, 예언의 목적이 교회의 거룩과 위로와 사명임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언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변화의 능력입니다. 넷째, 예언의 적용이 성령의 조명과 믿음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언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언은 마음을 꿰뚫고, 무릎을 꿇게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예언 해석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흐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우연의 파도에 던져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는 냉정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구원으로 엮어 가신다”는 따뜻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이 미래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바르게 해석하면, 사람의 호기심이 만족되는 대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마음이 정돈됩니다. 흩어진 불안이 정렬되고, 무너진 소망이 다시 일어섭니다. 예언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주의적 순수함은 여기에서 또렷해집니다. 예언 해석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 해석이 회개와 믿음과 사랑을 낳지 않는다면, 우리는 등불을 들고도 길을 못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고, 복음은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밝히 해석하는 설교는 결국 십자가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게 하고, 은혜를 은혜라고 고백하게 하며, 예수를 예수로 붙들게 합니다. 예언이란 말이 자칫 사람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지만, 성경적 예언은 오히려 사람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침묵 속에서 성령은 마음 깊은 곳의 헛된 의로움을 꺼내 불태우시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십니다.
이제 한 가지 예화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더 가까이 가져가 보겠습니다. 어떤 마을에 오래된 등대가 있었습니다. 바닷길이 험한 날이면 등대지기가 불을 밝혀 배들이 암초를 피하도록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 선장이 그 등대를 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내 배에 최신 항해장비가 있으니, 등대의 빛이 필요 없다.” 그는 자기 장비를 믿고 폭풍 속을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장비의 눈금은 흔들리는 파도와 번개 속에서 오차를 내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이 옳게 가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어느새 암초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등대의 빛이 바다 위로 길게 뻗어, 그의 항로가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냈습니다. 그 빛을 무시했다면 배는 부서졌을 것입니다. 선장은 결국 방향을 틀어 살았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등대의 빛과 같습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감정이라는 장비가 있을지라도, 폭풍 속에서는 오차가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빛은 암초를 드러내고, 항로를 밝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안전한 구원의 항구로 이끕니다. “사사로이”라는 말은, 등대의 빛보다 내 장비를 더 믿는 마음을 겨냥합니다. “밝히 해석함”은, 등대의 빛을 따라 항로를 고치는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언을 밝히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교회가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배웁니다. 예언은 죄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인간의 문명은 화려해도 마음의 우상은 끈질깁니다. 예언은 그 우상들을 이름 붙여 드러냅니다. 안전이라는 우상, 성공이라는 우상, 인정이라는 우상, 통제라는 우상, 분노라는 우상, 쾌락이라는 우상. 예언은 말합니다. “그것이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리고 동시에 예언은 더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너를 구원하신다.” 이때 예언은 단지 ‘앞날’이 아니라 ‘지금’이 됩니다. 예언이 오늘 우리의 예배를 깨우고, 오늘 우리의 회개를 부르고, 오늘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하고, 오늘 우리의 교회를 거룩하게 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언 해석은 ‘조각 맞추기’가 아니라 ‘약속 성취의 흐름 따라 걷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약속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으로 흘러가는지, 유월절의 어린 양이 어떻게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성취되는지, 다윗의 왕좌가 어떻게 십자가의 왕권으로 드러나는지, 성전의 그림자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라는 성전으로 이어지는지, 포로의 탄식이 어떻게 죄의 포로 된 영혼을 해방하는 복음으로 완성되는지, 그리고 마지막 날의 새 창조가 어떻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 성령의 첫 열매로 우리 안에 맛보게 되었는지—이 흐름을 따라가면, 예언은 공포의 퍼즐이 아니라 은혜의 큰 강이 됩니다. 그 강물은 결국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눈물이 씻기는 나라로, 사망이 더 이상 없고 애통이 더 이상 없고 죄가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는 영원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내 방식’으로 성경을 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먼저 알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우리는 먼저 배워야 합니다. 예언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예언은 나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을. 예언은 나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예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빛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빛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단으로 나아갑니다. “주여, 말씀으로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내 마음의 해석권을 내려놓고, 성령의 조명 아래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옵소서.”
이 결단이 실제 삶을 바꿉니다. 가정에서 예언을 밝히 해석하는 사람은, 자녀의 미래를 불안으로 통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녀의 주인이심을 믿기에, 기도로 품고 말씀으로 양육하며 사랑으로 기다립니다. 직장에서 예언을 밝히 해석하는 사람은, 성공을 신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며, 정직과 성실로 하나님께 예배하듯 일합니다. 교회에서 예언을 밝히 해석하는 사람은, ‘새로움’에 취하지 않습니다. 사도적 복음의 오래된 길 위에서 늘 새로워지는 은혜를 맛봅니다. 고난 속에서 예언을 밝히 해석하는 사람은, 고난을 운명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이 연단이 되고, 연단이 소망이 되고,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되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예언을 밝히 해석하는 사람은,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삼키셨고,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이 드러날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단지 위로가 아니라, 오늘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결국 예언 해석의 가장 큰 시험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정확한 도표, 화려한 지식, 논리의 탑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게 만들면, 그것은 밝힘이 아니라 어둠입니다. 반대로 단순해 보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죄를 미워하게 하고, 은혜를 사모하게 하고, 교회를 사랑하게 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언을 밝히 해석한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예언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하늘의 비밀클럽에 가입시키려 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합시다.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섞지 않고, 내 욕망을 덧칠하지 않고, 내 자랑을 끼워 넣지 않고, 성령의 숨결을 따라, 성경의 전체 흐름을 따라, 교회의 믿음의 길을 따라,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따라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풀릴 때, 예언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현재형 은혜가 됩니다. 어두운 세상은 여전히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등대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예언의 빛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키십니다. 그 빛을 따라 걸으면, 우리는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이 말하는 마지막 결론은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의 중심에, 어린 양의 피와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 베드로후서 1:20은 예언 해석이 개인적 임의(사사로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해석 원리를 제시한다.
- 예언의 기원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며, 해석 또한 성경 전체(구속사)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바른 예언 해석은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회개, 믿음, 거룩, 위로, 사명을 낳는다.
-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예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언약 성취를 밝히 드러내며,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나를 해석”하게 하는가, 아니면 “내가 성경을 이용”하는가?
- 예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더 선명해지는가, 아니면 논쟁과 두려움이 커지는가?
- 예언의 빛이 내 삶의 욕망(통제, 성공, 인정)을 드러내고 내려놓게 하는가?
- 공동체(교회) 안에서 겸손히 배우고 검증받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강해
- “먼저 알 것은”: 예언 해석의 출발점은 방법론이 아니라 ‘우선순위’의 교정이다. 체험·감정·유행보다 성경이 우위에 선다.
- “성경의 모든 예언”: 예언은 단편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전체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기원 측면) 예언은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해석도 인간의 임의로 좌우될 수 없다.
- (공동체 측면) 예언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공적 말씀이다.
- 적용: 예언을 ‘밝히’면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사사로이’ 풀면 해석자가 드러난다.
주석
- 본 절은 예언을 무조건 “해석 금지”로 묶는 말이 아니라, 해석의 권위를 개인의 자의성에 두지 말라는 경계다.
- 이어지는 문맥은 예언의 확실성과 기원을 논증하며(성령의 감동), 성경 중심의 객관적 표준을 강조한다.
- 따라서 바른 해석은 (1) 문맥, (2) 성경 전체의 흐름, (3) 그리스도 중심성, (4) 교회의 신앙고백적 틀, (5) 성령의 조명에 대한 의존을 함께 요구한다.
원어 주석
헬라어(신약)
- “ἰδίας ἐπιλύσεως”(이디아스 에필뤼세오스): ‘개인의/자기 자신의’(ἰδίας) + ‘해석/풀이’(ἐπίλυσις).
- 뉘앙스: “내 방식의 독단적 풀이”, “자기 소유처럼 다루는 해석”을 경계하는 뉘앙스를 담는다.
- “οὐ γίνεται”(우 기네타이): “~이 되지 않는다/발생하지 않는다.” 예언의 성격 자체가 사사로운 방식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어조를 준다.
- 결론: 본문은 “해석 행위”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예언의 성격(기원과 목적)에 맞지 않는 “사적·자의적 해석 방식”을 배격한다.
히브리어(구약)
- 본 절은 신약 본문이므로 직접 히브리어 단어 대응은 없지만, 구약 예언의 자기 이해와 연결된다. 구약에서 예언은 “여호와의 말씀”(דְּבַר־יְהוָה)로 반복 규정되며, 선지자는 자기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을 전달하는 자로 제시된다.
- 이 전제 위에서 신약의 사도는 예언의 기원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성령)임을 확증하며, 해석도 그 기원에 복종해야 함을 강조한다.
금언
- “예언을 해석할 때, 우리는 말씀 위에 서지 말고 말씀 아래에 서야 한다.”
- “성경을 내 삶에 끼워 맞추면 성경이 작아지고, 성경에 내 삶을 맡기면 내가 새로워진다.”
- “예언의 빛은 미래를 장식하기 위한 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등대다.”
신학적 정리
- 계시론: 예언은 인간의 종교적 통찰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근거한 특별계시다.
- 그리스도 중심성: 모든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성육신, 십자가, 부활, 재림)을 향해 수렴한다.
- 언약·구속사: 예언은 언약의 약속-성취 구조 안에서 이해될 때 가장 밝아진다.
- 교회론: 예언은 교회를 세우는 공적 말씀이며, 해석은 교회의 신앙고백적 틀과 공동체적 분별 속에서 성숙한다.
- 성령론: 성령은 예언의 기원이시며, 해석과 적용의 조명자이시다(텍스트를 떠나게가 아니라 텍스트 안으로 인도).
주제별 정리
- 해석의 겸손: “확신”과 “독단”을 구별하라. 확신은 성경에서 오고, 독단은 자아에서 온다.
- 거룩한 목적: 예언 해석의 열매는 두려움의 유통이 아니라 거룩의 형성이다.
- 복음의 핵심: 예언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더 선명하게 해야 한다.
목회적 정리
- 성도들에게 예언을 “공포 콘텐츠”로 소비하게 하지 말고, “소망의 견고함”으로 누리게 하라.
- 해석의 권위를 설교자 개인의 신비감에 두지 말고, 본문과 문맥과 성경 전체의 증언에 두라.
- 예언 설교는 정보의 과잉이 아니라, 회개·믿음·위로·인내·사명의 실제적 열매로 성도를 이끌어야 한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나는 성경을 읽을 때 내 욕망을 내려놓고, “주여 말씀하옵소서”의 자세로 임하겠다.
- 논쟁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닮기 위한 해석을 택하겠다.
- 공동체 안에서 배움과 점검을 기쁘게 받으며, 교회를 세우는 말과 삶을 살겠다.
- 예언의 빛을 따라 오늘의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 주권 아래서 소망의 순종을 걸어가겠다.
𝓕𝓾𝓵𝓵 𝓢𝓸𝓾𝓻𝓬𝓮 : 𝓐𝓻𝓽𝓲𝓯𝓲𝓬𝓲𝓪𝓵 𝓘𝓷𝓽𝓮𝓵𝓵𝓲𝓰𝓮𝓷𝓬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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