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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 (잠언 14장 1-9절)

by 【고동엽】 2023. 1. 5.

지혜로운 사람 (잠언 14장 1-9절) < 성경 원리대로 표현하라 >

 한 대학교수가 있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친화력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금방 친해졌다. 그 친화력으로 대학 때 총학생회장까지 했다. 친화력이 있지만 자기 논리가 전혀 없는 유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했기에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배려하는 논리와 철학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도 기득권 계층의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도 잘 인정해주면서 대화하니까 사람들이 다 친근감을 느꼈다. 목사들도 한결같이 그를 좋아했다. 동료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최고였다.

 지난 2월에 필자의 첫째 딸 대학 졸업식에 갔을 때 그 교수에게 멀리서 졸업생 가운을 입은 여대생이 “교수님!” 하면서 달려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그 교수의 품에 안겨 허그를 했다. 평소에 그 교수가 얼마나 학생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장면이 잘 말해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 그 교수의 아내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 교수는 평소에도 학생과 가벼운 격려의 스킨십을 잘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필자도 흐뭇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언뜻 “반대파가 저런 장면들을 왜곡할 수도 있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화력이 좋고 인격적이기에 교수들 사이에 그를 총장으로 미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때 반대파가 “그 교수는 학생과 스킨십이 지나쳐.”라는 말을 은근히 흘릴 때 그를 잘 아는 동료 교수나 학생은 가볍게 웃어넘기겠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은 손버릇이 나쁜 고약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해들은 말 중에는 신뢰가 안 가는 말도 많다. 전달 과정에서 혹은 전달자의 호불호를 통해 말은 현장 분위기나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왜곡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친밀감의 표현이 혐오스러운 고약한 행동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잘못된 풍문도 많다. 풍문을 자기가 확신화해서 이웃에게 전하는 것은 남의 인격을 살해하는 큰 죄다. 사람의 법은 그 죄를 묻지 못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죄를 물으신다.

 필자는 뉴욕의 얼라이언스 신대원에서 공부할 때 뉴욕의 한인 장로교회에서 만 2년간 중고등부 전도사를 했다. 목회자 세계에서 서로를 잘 알면 실망할 일도 생기지만 당시 담임목사는 필자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 인격적인 목회자였다. 다만 성공적인 목회는 못했다. 교회 시설과 입지는 좋아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으니까 답답해하는 일부 교인 중에 목회자의 조기 은퇴나 퇴임을 바라는 비판 소리가 가끔 들렸다.

 그 비판 중 하나가 목회자의 허그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시 담임목사는 예배 후 교인들과 허그를 했다. 당시에 젊은 필자도 허그를 어색해했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했다. 그런 따뜻한 애정 표현도 교회를 떠난 사람은 가십거리로 만들었다. 그 가십을 듣고 제3자가 “그분에게는 떨어져있는 게 좋아. 허그당해.”라고 하면 앞뒤 맥락을 잘라버린 험담이 된다. 상황을 잘 모르는 험담은 전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런 말은 듣는 것도 주의해 들으라.

 요새 한 장로교 원로 목사 부부와 1-2달에 한번 정도 만나 교제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시간을 가지고 좋은 대화를 하면 즐겁다. 만 20년을 분당에서 같이 지켜봤는데 진실함이 한결같다. 바르게 목회하다가 모범적으로 은퇴한 인격적이고 따뜻하고 헌신적인 목회자이기에 교제하면 행복하니까 교단을 초월해 가장 가까이하고 있다. 그 원로 목사도 허그하는 것은 몸에 배여 필자는 물론 필자 아내와도 만나고 헤어질 때 허그한다.

 문제는 아무리 따뜻하고 인격적으로 목회해도 떠나는 교인은 늘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목회하던 교회도 작지 않았기에 떠나는 교인이 있었다. 만약 그 교인이 은근히 전하는 그 목사의 허그에 대한 가십을 듣고 상황의 맥락도 모른 채 “그분은 여자만 보면 허그해.”라는 식의 풍문을 한 단계 증폭해 전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격자를 추한 늙은이로 만들어 매도하면 법으로는 죄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큰 죄로 보신다.

 거짓말도 주의해야 하지만 거짓 증거는 더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남의 사생활에 대해 실제 상황과 맥락도 모르면서 마치 확신하듯이 뒤에서 익명으로 개인의 인격을 난도질하는 것은 교만하고 비겁한 모습이다. 인터넷 댓글은 깨우침을 주는 지식의 보고도 되지만 인격을 살해하는 흉기도 될 수 있다. 악성 댓글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아니라 ‘악의적인 거짓 증언’이다. 나의 인터넷 댓글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여기고 성경 원리대로 표현하려는 태도가 지혜롭고 복된 태도다.

< 지혜로운 사람 >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의 기초 위에 지혜로운 삶도 더해야 한다. 믿음은 있는데 절제, 이웃 사랑, 복된 언어, 겸손이 없다면 그 믿음은 빛을 잃는다. 믿음과 지혜로운 삶은 관련이 깊다. 믿음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 땀 흘려 세우는 사람

 본문 1절에서 ‘지혜로운 여인’은 지혜를 의인화한 것이다. 지혜란 자기 집을 세우고 미련함이란 자기 집을 허무는 것이다. 집을 세운다는 말은 가족을 세워준다는 뜻도 포함한다. 가족은 서로 섬겨주고 인정해주고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며 하나님 외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가족이 내 사랑을 먹고 배부르게 하라. 남에게 예의를 지키고 잘하는 것 이상으로 가족에게 잘해주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이 되겠는가?

 집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땀이다. 땀을 흘릴 줄 알아야 많은 것을 얻는다. 본문 4절을 보라.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소가 있으면 구유가 냄새나고 더러워져도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까 소가 있는 것이 낫다는 암시다. 너무 깨끗한 것만 좋아하지 말라. 냄새나는 일이나 환경도 거부하지 말라. 해야 할 일이라면 더럽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복을 받는다.

 또한 일할 때 힘들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살을 뺄 결심을 했으면 계속 운동하면서 식사량을 줄여야 한다. 좋은 일을 결심했으면 계속해야 효과가 있다. 말은 보통 서서 잔다. 앉아 있는 말은 대개 곧 죽을 말이다. 성도가 앉아 있기만 하면 영혼도 죽고 신앙도 죽고 행복도 죽는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든 일도 과감히 선택하라. 직장을 선택할 때도 볼품없는 직장을 선택해 일으키는 꿈도 꾸면서 소수가 가는 길을 선택해 다수가 가는 길로 만드는 멋진 삶을 살라. 즐거움을 많이 누리기보다 책임을 많이 지려는 인생이 결국 성공한다.

2.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한다(2절). 믿음은 언행이 일치하는 정직한 행동을 낳는다. 성도는 자기 믿음을 불신자들에게 진실한 행동으로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래서 약속도 잘 지켜야 하고 좋은 의도로 하는 백색 거짓말도 최대한 삼가야 한다. 가장 삼가야 할 것은 거짓 증언이다(5절). 재판에서 증인의 증언은 목숨이 달린 재판의 향방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고대에는 거짓 증언으로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 희생자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사탄은 거짓의 원조이기에 거짓 증언은 가장 사탄적인 것이다. 중세에서도 종교 재판에서 거짓 증인이 “저 사람 마녀에요.”라고 하면 보통 사람도 마녀가 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거짓 증언은 나를 속이고 남도 죽이는 이중적인 최악의 죄다. 거짓 증언을 하고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미련한 모습이다(9절). 왜 사람이 남을 속이고 남에게 거짓말로 상처를 입히는가? 그 악한 결과가 자기에게 미쳐 최종적으로 자기의 길과 행복을 막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거짓 피해자나 과장 피해자 때문에 오히려 피해보는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이 차가 약간 부딪혀 상대가 비틀거리니까 “저 사람 쇼가 심하네.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라. 큰일 나겠다.”고 여기고 자기도 픽 쓰러졌다고 한다. 그런 쇼잉 후에 ‘진단서, 합의’라는 말이 나온다. 비겁하고 거짓된 삶이다. 그런 쇼맨을 보면 보험사직원은 인간 이하로 보고 그냥 합의해준다.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일은 사람이 할 일도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도 멀어지면서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정직하게 행동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3.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

 교만하고 미련한 자는 입으로 매를 벌지만 지혜롭고 겸손한 자는 입으로 자기를 지킬 줄 안다(3절). 교만한 자에게는 지혜가 머물지 않기에 교의 말은 특별히 귀담아 듣지 말고 아예 교만하고 미련한 자에게서는 떠나는 것이 좋다(6-7절). 좋은 사람을 잘 분별해서 가까이하는 것도 복이다. 공동체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트러블메이커(trouble maker)’라고 한다. 더 나아가 미칠 정도로 힘들게 하는 사람은 ‘크레이지메이커(crazy maker)’라고 한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7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요구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도하려는 ‘작은 히틀러’다. 둘째, 비판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남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지적하는 ‘인간 족집게’다. 셋째, 주장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계속 논쟁하고 악을 쓰는 ‘인간 확성기’다. 넷째, 분노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사소한 일로 쉽게 화를 내서 분위기를 깨는 ‘인간 활화산’이다. 다섯째, 불만이 많은 사림이다.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성인 어린이’다. 여섯째, 무례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행동하는 욕쟁이’다. 살면서 ‘무례하다, 건방지다, 당돌하다, 욕을 잘한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라.

 일곱째, 교만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작은 루시퍼’다. 교만 죄는 사탄의 속성을 가장 많이 닮은 최악의 죄다. 성도가 가장 듣지 말아야 할 말도 ‘교만하다’는 말이고 남에 대해 가장 조심스럽게 써야 할 말도 ‘교만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남에게 ‘교만하다’는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을 교만하게 보실 때가 많다. 요구, 비판, 주장, 분노, 불만, 무례가 많은 것은 다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늘 겸손한 언행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라.

4. 자기 길을 아는 사람

 슬기롭고 지혜롭다는 것은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다(8절). 물론 사람이 자기 길을 온전히 알기는 힘들다. 중요한 것은 정직이다. 정직이 길이다. 정직하고 겸손하게 땀을 흘리며 나아가면 길은 열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떤 족집게 예언자보다 더 길을 아는 인생이다. 하나님이 내 길을 아신다고 믿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면서 환경이나 남의 말에 크게 흔들리지 말라. 남이 걸어오는 논쟁 시험이나 논쟁 게임에도 빠져들지 말라. 논쟁이 습관화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집사님! 정말 고마웠어요. 저를 설득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수님은 반대자들과 논쟁하고 싸우지 않았다. 예수님의 허물을 찾으려는 ‘반대로 동기화된 사람들’과의 논쟁은 시간낭비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 게임에 말려들지 않았고 빌라도의 질문에도 침묵하셨다. 사람마다 반대하고 공격하는 이유가 다 있다. 잘못된 편견도 자기 논리가 다 있다. 그렇게 반대로 동기화된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 편견을 가진 사람을 논리로 설득시키려고 하지 말라. 종알종알 말을 많이 잘해서 편견을 가진 사람을 그의 사고에서 탈출시킬 수 없다.

 사도 바울에게도 수많은 논쟁 시험이 다가왔지만 그것에 말려들지 않았다.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논쟁에 빠져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면 논쟁을 더 일으킨다. 그런 논쟁에 빠져들지 말고 특히 인터넷 논쟁에는 더 빠져들지 말라. 익명으로 표출된 인터넷 댓글을 통해 익명의 사람과 논쟁하며 논쟁 상황에 빠져드는 것처럼 시간낭비는 없다.

< 늘 정의의 편에 서라 >

 어떤 사람이나 현실이나 환경이 내 삶을 조종하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성도가 ‘문간에 깔아놓은 신발닦개’인 도어매트(doormat)처럼 취급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용서도 도어매트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용서와 신뢰는 다르다. 용서는 즉시 가능해도 신뢰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편이 술주정을 해서 아내가 집에서 쫓아냈다. 한참 후 남편이 돌아와서 “여보! 용서해주시오.”라고 하면 바로 용서할 수 있다. 그 용서를 받고 남편이 “이제 나를 집으로 받아주시오.”라고 해도 그때는 즉시 받아주지 않고 “노.”라고 한다. 아직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서와 신뢰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그 시간에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목사가 성적인 잘못을 범했다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는 바로 할 수 있다. 그러면 용서했기에 다시 교회 담임목사로 모실 수 있는가? 아니다. 일정한 회복 단계와 과정이 필요하다. 용서해주는 것은 바로 되지만 신뢰해주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단호하게 불의한 상황을 거절해야 참된 의와 복이 펼쳐진다.

 그런 단호함을 보면 어떤 사람은 따진다. “목사님! 믿는 사람은 온유해야 하지 않나요?” 물론 온유해야 한다. 그러나 온유한 것(meek)은 유약한 것(weak)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온유함의 헬라어 원어는 ‘훈련된 온유’를 뜻한다. 그런 온유함은 사실상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도어매트로 취급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불의한 공격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불의가 승리하게 하지 말라. 남이 나를 시험 게임에 빠져들게 해도 내가 빠져들지 않으면 된다. 남이 나를 컨트롤하게 하지 말고 내가 나를 말씀에 따라 컨트롤되게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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