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신앙의 축복 (요한복음 21장 7절)
요한의 “주님이시다.”라는 외침을 듣고 베드로는 바로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렸다. 주님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요한이었지만 주님을 향해 먼저 행동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이 장면은 ‘결단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신앙이란 과감히 주님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다. 고민만 하고 계산만 하고 간만 보고 재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축복 받으려면 개척 정신과 도전 정신을 갖추라. 믿음으로 은혜의 바다로 뛰어들라. 어렵고 힘든 일에 과감히 뛰어드는 사람이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 역사상 위인 중에 우유부단한 사람은 없었다. 믿을 바에야 다부지게 믿으라. 다부지게 일하고, 다부지게 책임을 지라. 생각은 적고 행동은 많아야 한다. 단순하게 살아야 능력도 나온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 성문 옆에 거대한 실타래가 묶여 있고 이런 글이 써 있었다. “누구든지 이 실타래를 풀면 세계를 지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실타래를 풀려고 애썼지만 다 실패했다. 알렉산더도 그 글을 보았다. 그리고 한 번 씩 웃더니 칼을 들어 단칼에 실타래를 끊어버렸다. 단순해야 한다. 좋은 삶의 모델을 선택했으면 그 모델에 올인 하라. 주님을 선택했으면 주님에게 올인 하라.
삭개오는 주님께 올인 했다. 그가 주님을 보고 싶어 돌 감람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고 말했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겠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이름을 안다.”는 말은 “나의 번뇌와 고통, 나의 갈증과 꿈과 기도제목도 안다.”는 말도 된다. 삭개오는 감격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올인(all in) 했다. “예수님! 제 소유의 절반을 구제에 사용하겠습니다.” 삭개오는 키는 작아도 영적인 키는 컸다. 배도 컸지만 배포는 더욱 컸다. 머리통도 컸지만 마음통은 더욱 컸다.
삭개오가 주님께 올인 하자 얼굴에는 천국 미소가 생겼고, 그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착취의 손이 봉사와 섬김의 손으로 바뀌고, 그 뒤 많은 친구를 얻고, 주님을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 화끈하게 결단하라. 주님께 올인 하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가진 것은 신기루와 같다. 그것을 붙잡고 죽는 순간까지 은행 잔고를 지나치게 남기고 가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번 것은 내가 보람 있게 잘 쓰고 가는 것이 좋다. 그래서 선교와 구제와 장학사업에 보태고, 좋은 일에 쓰면 삶이 풍성하게 된다.
< 어린아이처럼 되라 >
본문에서 요한의 “주님이다!”는 말을 듣고 바다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면 베드로의 순수성이 느껴진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잃지 말라. 영적으로 높은 자처럼 행동하지 말고 신앙 귀족인 양 행세하지 말라. 가끔 신문광고에 “성역 30주년 기념 예배!”라는 문구가 나온다. 목사를 잘 대접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런 행사는 교회의 독소가 된다. 집사 중에도 30년 충성한 집사들이 많다. 섬김은 좋지만 귀족주의는 철폐해야 한다.
부흥사마다 특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 전문 부흥사다. “담임목사가 소나타가 뭐냐? 체어맨은 타야지. 고급차 타는 집사 손들어 봐! 마음이 편해요?” 그러면서 좋은 차 빼드리게 한다. 어떤 분은 성지순례 전문 부흥사다. “아니, 교회에서 담임목사 성지순례도 안 보내줘. 무식한 놈의 교회! 목사님 성지순례 보내드릴 사람 손들어 봐!” 그러면서 성지 순례 보내드리게 한다. 심령 부흥회가 아니라 귀족주의 부흥회다.
어떤 사람은 교회 건축 전문 부흥사다. 교회만 건축하고 시설을 잘 해놓으면 사람이 몰리니까 자연히 교회 건축에 관심이 많게 되고 교회 건축 전문 부흥사는 최고 인기 강사다. 그러면 눈을 팔아 교회 건축한 얘기를 하며 건축헌금을 작정시킨다. 그때 작정을 많이 시키면 1급 부흥사이고 그런 사람은 1년 내내 집회 일정이 빽빽하다. 심령 부흥회가 아니라 장사 부흥회 느낌을 준다. 그것이 요새 부흥회에 사람이 잘 모이지 않는 이유다. 또한 불신자들이 교회에 대해 향기보다는 악취를 느낀다.
왜 그런 모습이 생기는가? 순수성이 사라지고 권위를 오해하기 때문이다. 권위를 교회 크기, 성도 숫자, 고급 자동차와 같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권위는 화려한 외모와 높은 신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삶에서 나온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 크기로 1급 목사 여부를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1급 목사는 오히려 똑같은 충성을 하고 똑같은 헌신을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지 못하는 목사다.
큰 교회 목사만 우러러보지 말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선교사들과 시골교사 목사도 우러러보라. 그들도 누구 못지않게 존경받아야 하고 그들의 사역을 돕고 생활을 후원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호주머니를 비우라. 외양으로 성공을 재지 말고 “하나님께 얼마나 나를 잘 맡기는가?”로 성공을 재라. 나를 순수하게 하나님께 맡긴 만큼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 나라의 멋진 작품 인생으로 만드신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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