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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갈증을 해소하는 길/요한복음 4장 3-19절

by 【고동엽】 2022. 8. 5.

영적 갈증을 해소하는 길

2002-03-04 12:08:19 read : 750

 

요한복음 43-19// 20020303

 

 

<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는 자가용 제트비행기를 가진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는 제주도 만한 섬을 열 개나 소유했고, 그 섬을 온갖 고급품으로 꾸몄습니다.

그의 개인 호화 유람선에는 수백 명의 요리사가 동원되어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그 분위기에 케네디 전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여사가 넘어가 결혼하게 됩니다.

그들의 결혼은 미국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준 사건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자국 대통령 부인이었던 사람이 다른 나라 70 노인과 지내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재클린 여사는 네 번이나 결혼하고 이혼합니다. 불쌍한 인생입니다.

얼마 전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24살에 자가용 비행기 타고 가다가 죽었습니다.

그 충격에 재클린도 죽습니다. 지금 그분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분은 없습니다.

, 제트기, 선박, 빌딩을 다 가져도 내 마음이 천국이 되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요새 현대인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습니다.

좋은 산이라면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매년 5백만 명이 설악산 울산바위를 찾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병들어 저 아래 있는데 산에만 높이 올라간다고 건강해지겠습니까?

요즘 몸에 좋다고 하면 다 찾아먹습니다. 겨울에 잠자는 개구리까지 잡아먹습니다.

그렇게 해도 우리 나라처럼 병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몸에 좋다거나 쾌락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판매된 비아그라가 수조 원의 이익을 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 정말 이 시대가 영적 기근의 시대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지금 사회가 불안하니까 점과 무속신앙이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목나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고목나무에게 뭘 그렇게 열심히 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의 연구에 의하면 고목나무가 속이 빈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절하며 소원을 비는데 자기는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으니까

너무 답답하고 속이 타서 그렇게 속이 비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합니다. 이 목마름은 어디에서 해갈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품안으로 가야 우리의 목마름은 해갈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품안에 있어야 행복을 찾고, 사람답게, 성도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 품을 벗어나게 합니다. 벗어날 때는 탈선의 짜릿함이 있습니다.

그 일시적인 짜릿함으로 인생을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것 >

 

본문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나 변화됩니다.

어떻게 이 수가성 여인이 변화되었는지 살펴볼까요? 본문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졌는데 이 구절에 세 부분이 다 나옵니다.

남쪽은 유대지역이고, 북쪽은 갈릴리지역인데, 그 중간이 사마리아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해서 갈릴리로 갈 때 그곳을 피해갔습니다.

쉽게 말하면 서울에서 평양을 갈 때 황해도가 싫어 강원도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에게는 지역편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 옆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육 시는 오늘날의 정오인데, 열대 지역에서 사람들은 정오에 잘 다니지 않습니다.

그때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면 그녀는 남의 눈을 피해 사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러나 동네 사람도 그녀가 싫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남의 눈을 피해 살고, 남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계속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다가 창세기 218절에

처음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로 하와를 창조해 아담과 사랑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가지고 혼자 있는 것은 괜찮지만 외롭게 혼자 지내면 안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돌리지도 말아야 하고, 따돌림당하지도 않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면 절대 따돌림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처량한 모습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 여러분은 수가성 여인이 아닙니까? >

 

이 수가성 여인의 쓸쓸한 모습을 보면서 누가 생각납니까?

우리 자신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가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작은 모욕과 비난에도 너무 속상해하며 변명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말과 행동과 마음은 세상을 더 닮은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사실상 이 수가성 여인의 모습은 가끔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 마음에 지나친 분노와 욕망이 있다면 우리가 바로 수가성 여인입니다.

이 수가성 여인에게는 집(House)은 있었지만 가정(Home)은 없었습니다.

남자는 많았지만 정작 남편은 없었고, 가끔 행운은 있었지만 행복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남아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삶이 감옥생활 같을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립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니까 이것도 못 말립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니 감옥생활입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자꾸 헐뜯고 싶습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수가성 여인을 보면 살면서 받은 상처로 이런 감옥들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 열등감은 불신앙입니다 >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야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고, 인생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에서 약간 권세 있는 사람을 만나도 축 처진 어깨가 펴지는 것을 느낍니다.

경찰과 친분이 있어도 힘이 나는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변화가 없겠습니까?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놀라운 변화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셜리반'이라고 하는 고아 출신의 여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셜리반 선생님은 고아원에서 함께 의지하며 살던 남동생이 죽는 아픔을 당했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일어선 후, 나중에 "헬렌 켈러를 자신이 맡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이 "방법이 있겠느냐?"고 하니까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그리고 6살까지 아무 교육도 못 받은 헬렌 켈러에게 주님의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계속 주님의 사랑을 전하니까 드디어 헬렌 켈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헬렌 켈러는 20세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열등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약점과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키가 155센티였습니다. 등소평은 150센티였지만 13억의 중국을 구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도 모두 키가 아주 적은 것을 보십시오.

 

열등감은 불신앙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니까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뒤집기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 대화는 변화의 초석입니다 >

 

오늘 본문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고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예수님은 마음문이 닫힌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며 말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고지식하고 인색하게 지내지 말고, 가끔 "달라!"는 말도 하십시오.

"식사 한번 사 주시죠?"라는 말은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라는 의미를 줍니다.

때로는 이런 주고받는 마음의 대화가 사람의 마음 문을 여는 큰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받으면서 마음이 열리기도 하지만 주면서 열리기도 합니다.

상대방에게 봉사의 기회를 제공하면 신기하게 봉사하면서 마음도 열리게 됩니다.

좋은 일에 헌금할 기회를 제공하면 신기하게 헌금하면서 기도할 마음도 생깁니다.

여러분! 교회를 위해 땀을 흘려보십시오. 신기하게 어느새 신앙도 자라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물 좀 달라!"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결국 이 여인을 일으켰습니다.

그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이웃에게 주십시오. 그 말이 이웃에게 큰 힘을 줍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말이 없는 것이 미덕이고, 말이 많은 것은 악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말은 적은 것이 좋겠지만 사랑의 대화는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어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는 하루에 세 마디를 한다고 합니다.

회사에 갔다와서 말합니다. "아는?" 아내가 식사를 준비해오면 말합니다. "묵자!"

그리고 한참 TV 보다가 잠잘 시간이 되면 말합니다. "자자!"

아마 그분도 가정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 편견을 뛰어넘어야 참 사랑입니다 >

 

주님의 "물을 좀 달라!"는 요청에 수가성 여인이 대답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 수가성 여인의 어투가 상당히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어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콤플렉스가 있고, 한이 있고, 갈등이 있으면 이렇게 어투가 거칠어집니다.

 

이 수가성 여인에게는 여자라는 한도 있었고, 지역 편견으로 인한 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시 랍비들처럼 여자를 무시하지 않았고, 지역 편견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편견을 뛰어넘어야 성도답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편견이 무엇입니까? 자기인격이 더 못되었으면서 남의 인격을 먹칠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참 못된 편견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여자에 대한 편견입니다.

남녀의 성징(性徵)이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차이가 차별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 식의 잘못된 편견으로 인류의 반을 한꺼번에 매도하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그러므로 남성은 여자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을 버려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여성들끼리 사회와 가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사는 가정이 꽤 있습니다.

고부간에 갈등이 혹 있어도, 요즘 같은 세상에 같이 사는 것만도 정말 훌륭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도 장하고, 며느리와 함께 사는 시어머니도 장합니다.

요즘은 시어머니 노릇도 힘들다고 합니다. 며느리 눈치 보는 시어머니가 많습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가정을 꾸려 가면 됩니다.

가정의 일차적인 중심은 부부관계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부관계가 먼저 행복해야 부모님관계도 행복하고, 자녀관계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관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관계는 바로 부부관계입니다.

 

지금 시어머니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믿는 시어머니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은 박대 받고 살았을지라도 며느리는 행복하게 살도록 배려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결혼하면 '내 아들'보다 '며느리의 남편'으로 여겨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시어머니가 시야를 넓혀 살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잘 다니는 한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결혼한 아들이 퇴근 후에 자기 방에 와서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자상한 얼굴로 "얘야! 며느리한테 가 봐야지!"라고 했습니다.

이 시어머니의 모습이 주님의 은혜를 아는 지혜로운 시어머니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어머니는 교회에서는 너무 자상한데 집에 오면 호랑이로 변합니다.

반대로 어떤 며느리는 교회 일은 열심인데 집에만 오면 시어머니를 구박합니다.

너무 덕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며느리, 시어머니를 떠나서 서로 위해줘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편견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먼저 딸집에 들렸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딸은 자는데 사위가 일어나 혼자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를 싸 출근하지 않습니까?

이 어머니는 자기 딸을 그토록 위해주는 사위가 한없이 자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들집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깜짝 놀랐습니다.

며느리는 잠자는데 아들이 혼자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를 싸 출근하지 않습니까?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그토록 박대하는 며느리가 너무 괘씸하게 보였습니다.

누가 문제입니까? 같은 행동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는 이 어머니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편견을 뛰어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 값싼 사랑이 진짜 문제입니다 >

 

그처럼 주님의 사랑은 편견이 없었고, 또한 오래 참아주는 사랑이었습니다.

9절에서 수가성 여인의 반항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10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이 수가성 여인을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대하는 주님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사랑은 즉시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기까지 오래 참아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에 인내가 없다면 그 사랑은 결코 값비싼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내가 없는 값싼 사랑이 너무 많은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갈증은 더 심해지지 않습니까? 수가성 여인의 문제도 이 문제입니다.

그 여인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것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값싼 사랑이었습니다.

값싼 사랑은 우리를 더 갈증나게 만든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사랑의 메마름을 느낄 때마다 가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생각납니다(11).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했지만 그 나무는 아무 열매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 무엇이 없기 때문일까요? 사랑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인 것 같은 사랑은 많습니다. 그러나 값비싼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방황은 진짜 사랑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도대체 이 수가성 여인의 다섯 남편은 누구였을까요? 약간 추리해볼까요?

 

첫째 남편은 인물이 좋았을 것입니다. 선악과처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지만

속이 비었습니다. 바람까지 펴 그걸 따지니까 심지어 때리기까지 해서 도망쳤습니다.

 

둘째 남편은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속이 꽉 차고 지성과 인격이 있어 보였지만

너무 고지식하고, 재미도 없고, 게다가 가난하니까 빨리 팔자 고치자고 끝냈습니다.

 

셋째 남편은 돈이 많았을 것입니다. 통이 커서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었지만

가정보다 사업을 더 챙겨서 돈 때문에 돌 것 같아 위자료를 많이 챙기고 끝냈습니다.

 

넷째 남편은 권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맛이 꿀맛이어서 기분이 끝내주었지만

알고 보니 매일 중상모략하고 남을 칠 궁리만 하는 것을 보고 환멸이 나 끝냈습니다.

 

다섯째 남편은 평범한 농부였을 것입니다. 이제 다 귀찮고 평범한 것이 좋았지만

농사일 얼마 한 후 거울을 보니까 팍삭 늙어 보여서 밑지는 인생 같아 끝냈습니다.

 

그래서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길거리에서 만나 남자와 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이 바로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 대가를 치르는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받지 않으면

남편을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도 영혼의 갈증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는 길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품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자녀도 하나님 중심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자녀에게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유학시키고, 최고로 해주어야 잘되는 것 아닙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가 네로를 사랑해서 남편을 죽이고 네로를 황제로 만들고,

최고의 여자와 결혼시켜도, 결국 네로는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자살하지 않습니까?

 

지금 믿는 부모들조차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우지 않고 더 방황하게 만듭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조금 못 살면 어떻습니까? 조금 뒤쳐지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너의 앞길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믿음만은 꼭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그렇게 살기로 작정해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돌아온 탕자가 모든 것을 다 잃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옵니다.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왜 꼭 다 잃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까? 잃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오면 안됩니까?

건강할 때, 잘 될 때, 있을 때 좋은 일을 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 낭비하고 거의 알거지가 되어 하나님께서 돌아온 다음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고 하는 이런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아쉽습니까?

그 전에 지금 하나님 품안에서 내가 가진 것으로 헌신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값싼 사랑이 되지 않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사랑을 앞장서 실천하며

가난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선교사들의 요청에 응답하며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교회의 꿈이 무엇입니까? "선교와 구제에 가장 앞장서는 교회"가 아닙니까?

어제 대만의 황수 선교사님 암 수술 후, 황한나 사모님의 두 번째 소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3일간의 방사선 치료를 비교적 잘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313일 우리 교회 수요예배에 말씀 전하러 오시면 예수님처럼 환대해주십시오.

그런 환대와 위로가 선교사님을 살릴 것이며, 우리의 영적 갈증도 해소시킬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품안에서 감사하며,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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