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샬롬을 전하는 자의 축복/마 5:9

by 【고동엽】 2022. 8. 29.

샬롬을 전하는 자의 축복

2002-08-13 15:00:10 read : 2169

 

5:9 // 20020728

 

 

<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약 한 달 전쯤 전화 통화를 하는데 30대 중반쯤 되는 한 사람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어깨가 떡 벌어져있었고 지옥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아주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가끔 보면 배고프다고, 혹은 차비가 없다고 교회에 와서 도와달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교회까지 찾아온 수고를 생각해서 항상 약간의 식사비를 주어서 보냅니다.

 

그때도 그런 본이 온 줄 알고 통화를 마치고 약간의 돈을 준비해 그분에게 갔습니다.

"어떻게 오셨지요?"하고 물어보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험상궂게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돈이 필요한데 부끄러워 말을 못하는 줄 알고 준비했던 돈을 내밀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이것 가지고 조금 요기라도 하세요."

 

그러면 감사하면서 받고 떠날 줄 알았는데 그 다음부터 이 사람이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날 거지인 줄 아나! 정말 못 참겠네.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아!"

그러면서 흥분한 듯이 교회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교회를 때려 부실 듯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만원 지폐가 수북하게 있는 자기 지갑을 보여주면서 돈을 집어던지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돈을 확 뿌려버릴까 보다. 날 뭐로 봐!"

 

그렇게 하면 제가 겁을 낼 줄 알았나 봅니다. 그러나 추호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습니다. "진정하세요. 내가 오해했으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살 달래도 몇 분간 교회 기물들을 다 때려부술 듯이 더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그래도 요동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를 상대하니까 얼마 후에 그가 흥분을 가라앉힌 후에

교회 장의자에 10여분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이제 갑니다"하고 툭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분이 왜 교회에 슬쩍 들어왔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약 그가 길길이 날뛸 때 침착하게 대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강도를 만나도 침착하게 대하면 강도도 침착해집니다.

그런데 강도 앞에서 "강도야!" 하고 달아나면 강도가 뒤쫓아와서 등을 푹 찌르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길길이 날뛸 때 그 사람이 불쌍하게 보였지 조금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눈물이 나지만 누군가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면 그냥 웃음만 나옵니다.

약한 사람이 서럽게 우는 것은 겁나지만 누가 죽이겠다고 대드는 것은 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묘합니다. 두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하면 두려움을 주는 기운이 물러갑니다.

그러나 두려운 상황에서 호들갑을 떨면 두려움이 주는 기운에 의해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침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마귀가 달려들 때 무서워하고 등을 보이면 더 우리를 쫓아와 우리의 등을 푹 찌릅니다.

등을 보이지 않고 겉으로는 "마귀야! 물러가라!"고 해도 두려움이 있으면 소용없습니다.

마귀가 이미 마음속의 두려움을 읽었는데 "마귀야 물러가라!"는 말로 물러가겠습니까?

믿음도 없이 호들갑을 떨면서 "마귀야 물러가라!"고 하는데 어느 마귀가 물러갑니까?

마귀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늠름하게 서 있을 때 "졌다!"고 줄행랑을 칠 것입니다.

 

< 샬롬을 전하는 분들이 되십시오 >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마음의 평안과 늠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지극한 마음의 평화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샬롬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서 인사할 때마다 "샬롬!"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샬롬!"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샬롬에는 문제를 잠재우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샬롬의 능력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도 샬롬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면 불안과 염려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기도한 후에도 샬롬이 없다면 그 기도는 바람직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믿음의 기도인지 아니면 호들갑을 떠는 기도인지 잘 아십니다.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서는 샬롬이 주어지지 않고 문제 해결 능력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샬롬의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이웃에게 끼쳐지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의 파도가 우리에게 엄습해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문제의 파도를 막는 샬롬의 능력을 가진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샬롬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저도 가끔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한 마디 해주면 큰 힘이 됩니다.

"목사님! 힘내세요. 저도 힘써 도울께요. 우리에게는 반드시 더 좋은 길이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샬롬의 능력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샬롬을 가진 사람이 샬롬이 담긴 말 한마디를 해주면 영혼에 큰 힘이 됩니다.

 

이와 같이 샬롬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샬롬을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천국에 가기 전에 샬롬이 담긴 말과 행동을 통해서 천국의 삶을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샬롬의 능력을 가지고 천국의 삶을 산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구원받은 자녀라면 우리 가운데 샬롬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살롬이 이웃에게 전해지면 그것이 이웃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 영혼 안에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과 좋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 좋은 모습에 샬롬의 능력이 닿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샬롬을 전달받으면 기쁨이 있고, 샬롬을 전해준 자는 더욱 큰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우리 영혼에 샬롬을 심어주셨습니다. 왜 샬롬을 심어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그 샬롬을 우리 이웃에게 전파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이 샬롬을 전하는 입술이 되고, 샬롬의 능력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 샬롬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 >

 

성경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까? 큰 능력을 행하는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화평케 하는 자, 즉 샬롬을 주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화평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수십 년 쌓은 우정도 말 한 마디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샬롬은 노력해야 얻어집니다.

 

인간관계도 깊어지면 처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사람들은 대개 거꾸로 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덜 중요한 사람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잘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배우자, 자녀, 부모, 그리고 친한 사람들에게는 잘 하려는 노력을 별로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회에서는 호인으로 여겨져도 정작 가족들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볍게 만나는 사람들,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보다 먼저 가족들에게 호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알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친해질수록 더 샬롬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샬롬을 깰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우리는 최대한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샬롬은 조심하면서 힘써 만들어야 합니다. 샬롬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삶의 든든한 기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샬롬을 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든든한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을 만나도 우리는 샬롬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갈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주는 샬롬은 오늘의 문제를 잠재우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제가 평신도 때 다녔던 서울의 큰 교회를 담임하는 K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1963년에 시골에서 목회를 시작해서 여러 교회를 부임했는데 계속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한 교회는 너무 가난한 교회여서 사례는 없고 대신 교회에서 문방구를 차려 주었습니다.

그때 매일 목사님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문방구를 축복해주셔서 잘되게 해주세요."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망한 것이 축복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때 문방구가 축복 받아 거기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직도 문방구 가게를 하는 목사로서 연필 팔고 지우개 파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지나고 보니까 문방구가 망한 것은 버림받은 게 아니라 더 큰 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샬롬을 잃지 마십시오. 크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회개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화평은 화평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의 문이 열리면 사람과의 화평도 이루어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샬롬의 능력이 임하면서 마음은 물론 몸도 건강해집니다.

 

특히 두통, 고혈압, 만성위장병, 알레르기성 비염, 천식, 불면증, 관절염, 신경통, 암은

그에게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 및 사람과의 화평이 필요하다는 싸인입니다.

회개를 통해 샬롬의 능력이 임하면 그런 질병의 근원은 곧 마르게 될 것입니다.

 

서울의 한 여자 집사님이 심한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사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비염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짜증은 늘어나고 성격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막힌 코가 펑 뚫리게 해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은 기도하다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신의 문제는 코가 막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신앙적 나태와 교만과 불순종을 회개하고 기도제목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저의 코가 펑 뚫리기보다 저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펑 뚫리게 해주세요."

 

그날 밤새도록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기도하다가 아침까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펑 뚫렸습니다.

마음속에 지극한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고 왠지 몸 전체가 개운한 것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분의 비염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살면서 무엇인가 막힌 것을 느끼거든 하나님과 막힌 것을 있는지 살펴보고,

먼저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막힌 것을 뚫고 샬롬의 능력과 축복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환경이 관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행복은 내 안에 있습니다.

만약 어떤 분이 혼자 살 때 행복하지 않으면 결혼해서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행복하지 않으면 이혼하고 다시 혼자 살아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샬롬을 얻을 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샬롬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교만한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해서라도 낮추어 버리십니다.

아마 잘난 사람이 그 잘났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할 때까지 그를 낮추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완전히 절인 배추처럼 부드럽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제일인 줄 알면 도처에 배 아플 일만 보입니다.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새는 배만 아프지 않습니다.

남이 잘되는 모습을 보면 두통, 신경통, 고혈압에 치통까지 걸립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을 깎아 내리고 악평을 하고 단점만 있으면 꼭 말해야 속이 풀립니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하기 쉬운 일이 국회의원이라고 합니다. 잡아뜯기만 하면 됩니다.

 

남이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나도 그렇게 잘해야지!" 하고 결심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다른 사람이 봉사를 잘 하면 박수를 쳐주고 나도 곧 그렇게 잘 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이 나보다 이름이 더 나면 어떻습니까?

때로는 이름은 안 나도 중요한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여성들은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루즈를 바릅니다. 외모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눈썹과 입술보다 사실 뱃속에 있는 것,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이 훨씬 중요합니다.

만약 뱃속에 있는 것들,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이 자기를 안 알아준다고 삐치면 큰일납니다.

 

몸 중에서 발은 가장 수고하지만 가장 무시당합니다. 사람들은 손만 알아줍니다.

인간적으로 정말 섭섭한 일입니다. 그래도 발은 겸손하게 자기의 일을 묵묵히 감당합니다.

그런 보이지 않는 몸의 부분들이 수고하니까 우리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수고하는 겸손한 분들이 많을 때 그곳에 샬롬이 넘칠 것입니다.

 

4. 감사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권리에 관심이 많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책임에 관심이 많습니다.

권리에 관심이 많으면 대개 감사를 모르고 책임에 관심이 많으면 대개 감사를 압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책임에 관심이 많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특이한 것보다 평범한 것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슬로 비유합니다. 이슬이 그치는 것은 곧 저주의 상징입니다.

이슬은 매일 조용히 내리는데 그것은 매일 조용히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대개 그렇게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 은혜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은혜!" 하면 무슨 기적적인 무엇이 있어야 은혜를 받은 줄 압니다.

그래서 불치병 낫는 기적, 떼돈 버는 기적, 갑자기 신데델라 되는 기적만 기적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것은 어쩌다 한번 주어지는 그런 기적이 아닙니다.

매일 주어지는 하나님의 소리 없는 은혜가 우리 인생을 살리고, 우리 영혼을 살립니다.

 

기적은 일생에 몇 번밖에 없습니다. 그 몇 번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매일 소리 없이 내려주시는 은혜는 1초도 그친 적이 없습니다.

심장이 휘발유도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한번도 쉬지 않고 뛰는 것이 진짜 기적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진짜 기적은 보고 만지는 기적이 아닙니다. 소리 없이 임하는 은혜가 진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떠들썩한 모습으로 오기보다는 은근한 모습으로 옵니다.

무슨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무슨 은사를 받았다고 덜렁거리는 분들 보십시오.

그런 분들 중에서 신통한 분 봤습니까? 그런 분들이 꾸준히 신앙생활 잘 하고 있습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 어떻게 됐느냐?"고 하면 그 짧은 세월이 파란만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받는 삶이 아니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입니다.

사실 일년에 몇 번 기도원 가는 것보다 1365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폭포수 같은 은혜 구하다가 기복주의에 쓸려 내려가지 마시고, 이슬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마음에 깊은 샬롬이 찾아오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을 때 그 공동체는 샬롬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5. 관용이 필요합니다.

 

살다가 남의 단점을 보게 되면 그것은 두 가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덮어주고 샬롬을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드러내고 샬롬을 깨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단점을 캐내는 자기 되기보다 덮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관용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샬롬의 전파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관용을 베풀라는 말이지 남에게 관용을 요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관용을 베푸는 자는 남에게 요구하기보다 자기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관용이 없는 자는 자기 책임은 다하지 않고 남에게 어떻게 되라고 요구만 합니다.

 

자기 책임은 다하지 못하고 요구만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없이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생색내는 말만 하고, 생색내는 일만 하지 말고 말없이 수고하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내 수고는 덜 인정받아도 남의 수고는 기쁘게 힘껏 박수 쳐주는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관용을 가지고 살려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1) 차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다르다는 인식은 사회생활의 기초입니다.

치약 아래를 잡고 짜는 아내가 남편이 치약 위를 잡고 짠다고 매일 잔소리하면 됩니까?

 

2) 서로를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로를 바꾸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어집니까?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3) 서로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사귄 분이 크게 나쁜 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좋습니다. 그런데 마음 문을 닫아버리면 축복의 문도 닫힙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가 만델라입니다. 그는 27년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의 모든 정적을 사면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직을 다 마친 후에 특유의 소박한 미소를 짓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에 더 존경받는 모습이 얼마나 흐뭇하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들은 임기 후에 백담사 가고, 청문회 서고, 감옥 가고, 계란 맞고...

왜 우리는 이런 모습이 계속 반복됩니까? 정치에 정의와 관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 탓만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너무 남 탓만 합니다.

이런 사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같이 물들면 됩니까?

 

이제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남 탓하기보다 샬롬을 전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샬롬을 힘써 전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소금처럼 녹아지면서 맛을 내는 샬롬의 전파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