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속한 사람 (요한일서 3장 7-12절) < 하나님께 속한 사람 >
약 20년 전 A대학에서 강의할 때 20대 중반의 한 신학과 학생이 강의 후 당돌하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이러 곧 그가 말했습니다. “요새 전도가 어렵다지만 저에게는 아주 쉽습니다. 제가 B교회 전도사로 있는데 저는 단번에 100명 이상 전도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요한일서 3장 8절에 있는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귀신을 쫓아내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가 귀신을 쫓아내면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요.”
그 학생이 사역하는 교회는 당시 이단으로 여겨지던 교회였습니다. 그때 여러 얘기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만 하지 말고 학생으로서 수업에 빠지지 말고 시험도 중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수업도 자주 빠졌고 쪽지 시험도 거의 꼴찌였습니다. 귀신은 쫓아낸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불순종하고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원칙대로 하면 F를 주어야 했지만 졸업은 막고 싶지 않아서 최하 점수를 주었습니다.
영성주의자를 보면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말할 때마다 “영성, 영성” 하는데 왜 영성이 있는 모습이나 태도를 풍기지 못할까요? 그가 인식하는 영성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때도 영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지혜가 있는 것을 최고의 영성으로 여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영성을 내세워 교인을 미혹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 점차 많아지자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미혹되어 마귀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라고 본문에서 권면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미혹되지 않는 사람
본문 7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당시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은 영적인 지식이 있어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예언, 방언, 방서, 투시 등의 신비적인 은사들을 내세우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의 종교가 아니다.” 결국 영지주의자의 2대 특징은 신비주의와 방종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과시하려고 행하지 않았고 기적 행사를 자랑하거나 광고하지도 않았습니다. 기적 행사를 자랑하고 광고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는 반대로서 이단적인 냄새를 풍깁니다.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주무기는 기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사탄의 권세를 받은 적그리스도가 놀라운 기적을 꾸미거나 행해서 대중들을 미혹합니다. 그런 기적 행사 집회로 우르르 몰려가면 미혹되기 쉽습니다.
이단에게 미혹되지 않으려면 두려움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많은 사이비 종교와 이단 교주가 두려움을 통해 침투하고 기생합니다. 왜 보이스피싱 사기에 넘어갑니까? 두려움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누가 전화해서 말합니다. “지금 당신의 통장 정보를 해커가 빼낸 것이 검찰에 포착되었습니다. 극비 사항이니 가족이나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고 빨리 조치하십시오. 그래야 돈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겁부터 내지 말고 즉시 112에 신고하면 모든 문제가 완벽히 해결됩니다. 범인이 대포폰을 사용해 잡지는 못해도 다른 피해자는 막을 수 있습니다. 귀찮아도 신고해서 시민의식을 발휘해야 합니다. 저도 그런 전화를 몇 번 받았습니다. 그러면 큰소리쳐봐야 입만 아프니까 약 오르라고 점잖게 말합니다. “여보세요. 제 거래은행과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을 그렇게 거짓되게 살지 마세요.” 그러면 상대가 전화를 툭 끊어버립니다. 그때 바로 112에 신고하면 됩니다.
은행시스템이 쉽게 남의 돈을 빼가도록 허술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속지 않으면 거의 100% 안전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침착하게 대처해야 속지 않는데 두려움에 젖어 “그러면 어떻게 해요?”라고 하면 자기가 알려주는 대로 하라면서 돈을 교묘히 빼갑니다. 그처럼 두려움에 젖으면 사탄이나 이단 교주가 노략대상으로 삼고 “당신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야 불행과 저주에 벗어나고 가족이 초상을 치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속 접근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믿는 나는 어떤 상황도 겁나지 않다. 죽으면 죽으리라. 당신 말에 속지 않아.”라고 나오면 사기꾼이 전화를 툭 끊듯이 사탄과 이단도 “저 사람은 절대 안 통해.”라고 하면서 곧 도망칩니다. 그렇게 가볍게 물리치면 되는데 귀신 쫓는 축귀기도를 한다면서 몇 시간 동안 “귀신아! 나가! 나가!”라고 소리치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비책이 아니라 오히려 이단이 귀신을 이용해 영혼을 사냥하는 술책입니다. 두려움을 심으면서 귀신을 쫓아내주겠다는 이단 교주와 말을 섞으면 그 순간부터 불행과 저주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 한 여학생에게 이단 전도자가 접근해 말했습니다. “당신 얼굴을 보니까 아기 귀신이 붙었어요. 그 귀신을 쫓아내야 가족의 초상을 막을 수 있어요. 그 귀신을 쫓아내려면 저희 집회에 와서 그 아기 귀신을 쫓아내세요.” 사악한 영혼사냥 방법입니다. 성도의 능력과 권세를 확신하고 철저히 대비하면 그런 말에 결코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 대비가 없다면 가족의 초상도 겁나지만 아기 귀신이라는 말만으로도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소름이 오싹합니다. 그때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기 귀신 영상이 들어와 심한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멀쩡한 사람에게 먼저 귀신의 영을 집어넣은 후 귀신을 쫓아내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사악한 이단 교주입니까? 그런 귀신팔이 이단 교주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사도인 양 얼마나 활개를 칩니까? 아기 귀신 얘기 등으로 접근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때는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라고 코웃음을 치면 바로 그 순간 이단과 귀신은 깨개갱 소리를 내며 줄행랑을 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이단 교주에게 된통 당하면서 인생과 가정을 송두리째 빼앗깁니다.
공권력은 그런 사악한 행위를 최대한 막아주어야 하고 그런 사람의 활개를 막는 입법도 필요합니다. 요새는 모욕죄도 범죄입니다. 사실 모욕죄보다 동자 귀신과 줄초상 등의 얘기로 두려움을 주어 영혼을 탈취하는 죄는 더 피해가 크고 나쁜 죄입니다. 일종의 공갈협박죄입니다. 영혼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공갈협박죄를 법이 힘써 막아주어야 이단 교주가 수많은 영혼을 짓밟고 거대한 왕국을 세워 호화롭게 지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공권력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미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2. 죄를 극복하는 사람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축귀 사역 이단들이 거의 헌법처럼 중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축귀 사역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최대 목적을 이루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늘처럼 작은 것을 봉처럼 크다.”고 하는 침소봉대 해석입니다. 마치 돈을 원하는 자녀가 “아빠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내게 용돈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단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아빠의 존재 목적을 굳이 말한다면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잘 키워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용돈을 주는 일은 아빠의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다.”라고 하면 비교적 합당한 정의가 되지만 자기들 축귀 사역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쓰려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다.”라고 하면 얼마나 그 의도가 불순합니까?
마귀는 죄를 짓게 합니다. 결국 문맥에 따르면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말씀의 핵심 뜻은 죄를 타파하는 것을 뜻합니다. 죄를 타파하는 일 중의 하나로 축귀 사역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위장해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오히려 두려움의 영을 심고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말씀의 핵심 뜻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는 ‘죄를 타파하는 것’이란 사실은 그 다음 9절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결국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을 축귀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과는 많이 동떨어진 해석입니다. 그런 해석은 축귀를 통해 영혼을 사로잡기 위해 주로 이단 단체들이 내세우는 논리입니다. 실제로 축귀 의식을 자주 하거나 오래 하는 것은 귀신을 쫓아낸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의 권세를 하찮게 만드는 마귀의 전략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권세가 하찮으면 매일 새벽에 기도할 할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고 합니까? 그것은 그 말에 귀신이 안 물러간다는 반증입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입에서 그런 말이 아예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새벽에 귀신이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와서 다음 날 새벽에 또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고 하는 셈입니다. 그런 잘못된 습관이 얼마나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훼손하고 귀신이 성도를 우습게보게 하는 웃음거리인지 인식하지 못한다면 큰 불행입니다. 왜 이단은 그런 식으로 성도를 강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약하게 만듭니까? 그래야 그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에 마귀에게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귀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귀신을 두렵게 하십시오. 성도가 자기 확신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믿음에 굳게 서면 “귀신아! 물러가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귀신은 공포에 젖어 물러갑니다. 반면에 속으로 겁내면서 “귀신아! 물러가라!”고 소리치면 귀신이 더 찾아옵니다. 큰 소리가 아니라 큰 믿음이 중요합니다.
3. 의와 사랑이 있는 사람
의를 행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입니다(10절). 의와 사랑은 성도의 핵심 속성입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까? 아벨의 의로운 행위를 시기했기 때문입니다(12절). 마귀의 자녀들은 성도의 의로운 행위를 가장 시기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바탕으로 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나타냅니다. 이단에게 미혹되지 않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도 ‘의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7절).
의롭게 행하지 않고 대박 축복을 얻겠다는 욕심이 수많은 파멸과 불행이 원인입니다. 왜 다단계나 금융사기에 걸려 큰 피해를 입습니까? 대박 욕심 때문입니다. 거룩한 땀과 지혜와 창조성으로 물질을 정복하려고 하십시오. 다단계나 금융사기 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바탕으로 얻은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교회에서는 교우들을 상대로 대박 투자 권유를 하지도 말고 그 권유에 응하지도 마십시오.
행복과 보람과 기쁨이 지속적으로 넘치고 천국 상급을 얻으려면 완벽하게 살지는 못해도 의롭게 살려고 하십시오. “의롭게 살면 나만 손해야.”라는 인식을 버리십시오. 잠깐은 손해인 것 같지만 인생 전체로는 유익이 됩니다. 작은 믿음은 의를 경시하지만 큰 믿음은 의를 중시합니다. 입으로만 “영성! 영성!” 하지 말고 완벽하게 살지는 못해도 의롭게 살려고 힘쓸 때 각종 미혹을 극복하고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의 첫 딸이 A대학 뷰티디자인과 3학년 편입시험을 칠 때 윗동서가 그 대학의 유력한 총장 후보였고 과 면접위원장은 윗동서의 직계 후배 교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편입 원서를 넣을 때 제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동서 형님에게 A대 편입 지원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마세요.” 그 사실을 알리면 무언의 청탁 느낌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이 떨어져 동서 내외의 믿음에 상처가 된다면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그렇게 지원 사실을 감췄는데 며칠 후 동서 내외가 먼저 편입 지원 대학을 물어서 거짓말을 할 수 없어 그 지원 사실을 말하면서 그 사실을 면접위원장 교수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얼마나 떳떳합니까? 동서 내외도 청탁을 안 하고 오히려 극구 막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고맙게 느끼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떨어져도 좋으니까 청탁 낌새조차 없어야 된다. 오직 네 실력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모습을 통해 딸도 의롭게 살려는 믿음의 원리를 약간이라도 더 배우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이 합격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번에 딸이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모 방송사의 뷰티 담당 회사에 여름방학 인턴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주 다니면서 최근에 슬쩍 선배직원에게 첫 월급을 물어보자 그는 110만 원 받았다고 합니다. 요새 아르바이트 학생도 그 이상 벌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말했습니다. “은혜야! 네가 그 일이 마음에 들면 110만 원을 받아도 보수에 신경 쓰지 말고 다녀라. 앞으로 선교 많이 하기 위해 네가 뷰티디자인 회사를 차릴 수도 있으니까 배움의 기간을 실력과 인성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해라.”
요새 세상은 “프로로 대접 받으려면 돈을 많이 받고 일하라.”고 말하지만 저는 딸에게 “인성과 실력에서는 프로가 되고 보수는 생각하지 말라. 좋은 장인 밑에서 보수가 적어도 성실히 배우고 실력을 키우라.”고 수시로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결국 “성도답게 의롭게 살라.”는 일종의 신앙교육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인성과 충성심과 책임감과 실력을 배양하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단계의 찬란한 삶을 왜 예비하지 않겠습니까? 돈에 매이지 않고 소중한 가치에 매이고 더 나아가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매이면 언젠가 돈도 따라올 것입니다.
축복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대박 축복의 개념으로만 여기지 마십시오. 자기가 준비되지 않은 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축복을 받으면 나중에 인생도 추락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추구하고 의와 사랑을 추구하면서 자기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이고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최상의 축복과 행복의 자리로 그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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