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살리는 지혜로운 지도자(전도서 10:16–17).
백성을 살리는 지혜로운 지도자(전도서 10:16–17)라는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한 나라와 한 공동체의 운명이 칼과 창만으로 갈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그분은 눈에 보이는 권력의 크기만 보지 않으시고, 그 권력이 어떤 지혜로 운용되는지를 보십니다. 전도자는 “왕이 어리석고, 지도층이 아침부터 잔치하는 땅”을 향해 탄식하며 “화 있을진저”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왕이 귀족의 아들이요, 지도층이 기력을 위하여 정한 때에 먹고 취하지 아니하는 땅”을 향해 “복이 있도다”라고 선포합니다. 이 두 문장은 단지 정치평론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공동체의 생명이 어떻게 보존되고, 어떻게 소진되는지를 꿰뚫는 지혜의 칼날입니다. 그리고 이 칼날은 오늘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나라를 향해도 여전히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는 흔히 리더십을 말할 때 카리스마, 결단, 추진력, 성과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리더십의 뿌리를 “지혜”에 둡니다. 지혜란 단지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현실을 분별하고, 때를 알고, 욕망을 절제하며, 백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권세를 사용하는 능력입니다. 전도서 10장 16절이 말하는 “왕이 어리다”는 말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성숙의 부재, 곧 절제 없는 욕망과 분별력 없는 통치, 책임감 없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지도자가 철이 들지 않으면, 그 아래 있는 백성이 피곤해집니다. 공동체는 상처를 입습니다. 윤리는 약해지고, 정의는 흔들리고, 약자는 먼저 짓눌립니다. 왜냐하면 지도자의 미성숙은 반드시 백성의 일상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흘러나온 무절제는 아래로 퍼져 나가고, 위에서 시작된 방종은 아래에서 고통으로 맺힙니다.
전도자는 그 징표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방백들이 아침부터 잔치하는” 것, 곧 아직 하루의 사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쾌락과 자기 만족을 먼저 채우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아침”은 단지 시간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순위를 뜻합니다. 지도자가 우선순위를 뒤집어 자기 쾌락을 먼저 두면, 백성을 위한 공적 책임은 뒷전이 됩니다. 사명보다 식탁이 먼저가 되면, 돌봄보다 잔치가 앞서면, 공의보다 취함이 앞서면, 공동체는 서서히 말라갑니다. 겉으로는 잔치가 화려해 보이지만, 그 잔치의 비용은 결국 백성이 치릅니다. 지도자의 사치와 방종은 결코 지도자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도자의 지혜는 냉정할 만큼 현실적입니다. 지혜 없는 리더는 결국 백성을 소모시키는 리더가 됩니다.
그러나 17절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 줍니다. “왕이 귀족의 아들이요”라는 말은 혈통의 자랑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이 왕다움을 배운 사람, 통치의 책임과 절제의 품격을 훈련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칭찬하는 지도층의 표지는 또렷합니다. “기력을 위하여 정한 때에 먹고, 취하지 아니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목적이 바르고(기력을 위하여), 때가 분별되며(정한 때에), 절제가 선명합니다(취하지 아니함). 이것이 지혜입니다. 지도자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금욕주의자가 아닙니다. 지도자는 즐거움을 죄악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지도자는 목적과 때와 절제를 통해 자기 욕망을 사명 아래에 두는 사람입니다. 자기 배를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지혜가 공동체를 살립니다. 이런 절제가 백성의 일상을 지켜줍니다. 이런 분별이 약자를 살리고, 정의를 세우며, 평화를 회복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단지 나라 지도자에게만 적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위임된 권세”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교회에서 장로와 집사와 교사와 목회자, 가정에서 부모, 직장에서 책임자, 사회에서 공적 지도자, 심지어 한 팀의 리더까지도 동일한 영적 원리 앞에 섭니다. 하나님은 권세를 절대화하지 않으시고, 청지기적 책임으로 묶으십니다. 권세는 내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입니다. 맡겨진 것은 반드시 회계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지도자는 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자리와 이 영향력은 누구를 살리는가? 내 말과 내 결정은 누구의 숨을 트이게 하는가, 누구의 가슴을 막히게 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을 놓치면, 지도자는 어느새 “아침부터 잔치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겉으로는 바쁘게 일하는 듯해도, 속으로는 자신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그때 전도자의 탄식이 우리를 붙듭니다. “화 있을진저.”
그러나 은혜의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지도자가 무엇인지 말할 뿐 아니라, 그 지혜의 완성이 누구에게 있는지 보여 줍니다. 전도서의 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수록, 인간 지도자의 한계와 죄성을 더 뚜렷이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쉽게 어립니다. 쉽게 흔들립니다. 쉽게 취합니다. 어떤 이는 술에 취하지 않아도 성공에 취하고, 인정에 취하고, 권력의 달콤함에 취합니다. 어떤 이는 새벽부터 잔치하지 않아도, 마음은 늘 자기 만족의 잔치판을 벌이고, 백성을 도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왕”을 주셨습니다. 지혜의 왕, 절제의 왕, 때를 아시는 왕,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정한 때”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과 시간표 안에서 움직이셨습니다. 성급하지 않으셨고, 늦지도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도 “때가 이르렀을 때”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기력을 위하여”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생명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백성의 피로 잔치를 벌이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백성을 살리셨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백성의 노동으로 권좌를 지탱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의 순종으로 우리를 지탱하십니다. 세상의 리더십은 자기를 채우는 쪽으로 흐르기 쉽지만, 그리스도의 리더십은 자기를 비워 우리를 채우는 쪽으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왕으로 삼지 않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왕의 통치 아래에서, 모든 지도자는 “대표자”가 아니라 “청지기”로 서야 합니다. 칼빈주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신학이 가르치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그분의 섭리 속에서 인간은 책임 있게 부름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는 자기가 주인이라고 착각할 때 가장 위험해지고,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떨며 인정할 때 가장 안전해집니다. 백성을 살리는 지혜는 결국 “하나님 경외”에서만 시작됩니다.
이제 말씀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들어옵니다. “백성을 살리는 지혜로운 지도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지도자만 탓하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전체를 말씀 앞에 세우십니다. 백성의 영적 토양이 무너지면, 지도자는 그 토양을 먹고 자랍니다. 백성이 진리를 싫어하면, 지도자는 달콤한 거짓말로 인기를 얻습니다. 백성이 경건을 가볍게 여기면, 지도자는 책임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비판보다 먼저 중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세울 때 “능력”보다 “성숙”을, “스펙”보다 “경외”를, “말솜씨”보다 “절제”를, “성과”보다 “성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전도서는 지도자의 하루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보라고 말합니다. 그가 아침을 어디에 바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로 시작하는가, 자기 욕망으로 시작하는가. 사명으로 시작하는가, 잔치로 시작하는가. 이 아침의 방향이 결국 공동체의 방향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떠올려 봅니다. 어느 마을에 두 우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마을 위쪽 언덕에 있어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흘렀고, 다른 하나는 마을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었을 때, 언덕 위 우물을 맡은 관리자는 자기 집부터 물을 채우고, 친한 사람들의 항아리부터 채우며, 남은 물로 마을을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다들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우물은 금세 바닥이 났고, 아래쪽 마을부터 물이 끊겼습니다. 그러나 아래쪽 우물을 맡은 관리자는 반대로 했습니다. 먼저 어린아이와 노인에게 물을 나누고, 병든 사람에게 우선으로 주고, 마지막에 자기 집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그는 자기 항아리가 늘 반쯤 비어 있었지만, 마을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두 우물의 물의 양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달랐던 것입니다. 지도자의 우선순위는 공동체의 생명을 결정합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아침부터 잔치”와 “정한 때에 기력을 위하여 먹음”은 바로 이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로, 지혜 없는 지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행정의 미숙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을 갉아먹는 죄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미성숙은 말의 품격을 무너뜨리고, 판단의 공의를 흐리게 하며, 관계의 신뢰를 찢어놓습니다. 특히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는 조직이지만 단순한 조직이 아닙니다. 피로 사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면, 교회는 상처를 넘어 훼손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으로 멈추지 않고, 복음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지도자는 완벽할 수 없으나, 회개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실수할 수 있으나,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뜨리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를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빛 아래에 자신을 드러내며, 공동체 앞에서 정직하게 서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지혜로운 지도자의 표지가 무엇인지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전도서가 제시한 표지는 신비하지 않습니다. 목적, 때, 절제입니다. 목적이 바르면 권력이 도구가 됩니다. 목적이 흐리면 권력이 우상이 됩니다. 때를 알면 결정이 살립니다. 때를 모르면 결정이 죽입니다. 절제가 있으면 공동체가 숨을 쉽니다. 절제가 없으면 공동체가 숨이 막힙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에게 필요한 첫 번째 은사는 “분별”입니다. 분별은 세상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욕망을 알아차리고, 공동체의 필요를 읽고, 말씀의 원리를 현재에 적용하는 영적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분별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은 지도자를 무겁게 만드십니다. 거룩한 무게를 얹어 주십니다. 말 한 마디의 무게, 결정 하나의 무게, 본이 되는 삶의 무게를 알게 하십니다. 그 무게를 아는 자가 함부로 “아침부터 잔치”하지 않습니다. 그 무게를 아는 자가 “정한 때”를 기다릴 줄 압니다.
셋째로, 이 모든 것을 구속사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전도서의 지혜는 해 아래에서의 허무를 말하지만, 그 허무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질서를 발견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납니다. 인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왕들이 일어나고 쓰러졌습니다. 어떤 왕은 어렸고, 어떤 왕은 교만했고, 어떤 왕은 방종했습니다. 그 아래 백성은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뿌리에서 한 왕을 세우셨고, 그 왕은 세상 권력의 방식으로 다스리지 않고, 십자가로 다스렸습니다. 이 왕의 통치 아래에서 교회는 새로운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는 세상 통치의 흉내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통치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백성을 살리는” 리더십은 결국 “자기를 죽이는” 자리에서만 나옵니다. 자기 자랑을 죽이고, 자기 분노를 죽이고, 자기 탐욕을 죽이고, 자기 체면을 죽이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이며, 개혁주의가 말하는 은혜의 질서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채찍으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오직 복음의 능력, 성령의 역사로만 지도자의 내면이 다듬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도자를 훈련할 때 기술만 가르치지 않고, 경건을 세워야 합니다. 설교만 잘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무릎을 잘 꿇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말의 재능보다 눈물의 진실이 필요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로 말씀을 적용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말이 한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한 가정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태도가 한 공동체의 공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작은 지도자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세계를 이끌고, 선배는 후배의 길을 만들고, 믿음의 성도는 새신자의 발걸음을 안내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 앞에서 이렇게 결단합시다. 오늘 내 아침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내 하루의 첫 자리는 잔치인가, 예배인가. 내 입술의 첫 말은 불평인가, 감사인가. 내 마음의 첫 방향은 자기만족인가, 사명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한 때”를 알게 하시고, “기력을 위하여” 절제하며, 무엇보다 “백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내 삶을 쓰임 받게 하시기를 구합시다. 그리고 우리 위에 참 왕이 계심을 고백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의 삶의 주권자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지도자를 우상화하지 않고, 지도자를 증오하지도 않고,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성숙해지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만 공동체는 살고, 백성은 숨 쉬고, 교회는 빛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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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전도서 10:16–17은 지도자의 성숙과 절제가 공동체의 흥망에 직결됨을 보여 줍니다.
- “왕이 어리다”는 것은 성숙과 분별의 부재를 의미하며, “아침부터 잔치”는 사명보다 쾌락을 앞세우는 우선순위의 붕괴를 상징합니다.
- 복 있는 땅의 표지는 목적(기력을 위하여), 때(정한 때에), 절제(취하지 아니함)입니다.
- 구속사적으로 이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며, 예수는 백성을 소모시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백성을 살리는 참 왕이십니다.
- 교회와 가정과 사회의 모든 리더십은 청지기적 책임 아래 있으며, 성령이 주시는 분별과 절제가 백성을 살립니다.
묵상 포인트
- 내 삶의 “아침”은 무엇으로 시작되는가(예배/사명 vs 자기만족/쾌락)?
- 내가 가진 영향력은 지금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누구를 지치게 하고 있는가?
- 절제가 단지 금지가 아니라 “사명을 위한 자기 다스림”임을 믿는가?
- 지도자를 바라볼 때 비난과 이상화 사이에서, 중보와 분별의 길을 걷고 있는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 통치(자기 비움)가 내 리더십과 말투와 결정에 스며들고 있는가?
강해
- 본문은 대조 구조로 지혜로운 통치와 어리석은 통치의 열매를 보여 줍니다.
- 10:16의 “화 있을진저”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가 겪게 될 파괴적 결과에 대한 경고입니다. 지도자의 미성숙은 정책과 문화와 윤리에 스며들어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 “방백들이 아침부터 잔치”는 지도층이 책임보다 향락을 먼저 택하는 구조적 방종을 뜻합니다. 이는 공적 사명을 사적 욕망이 삼키는 모습입니다.
- 10:17의 “복이 있도다”는 지혜의 실천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지도층이 먹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먹는 이유(기력), 시간(정한 때), 상태(취함의 부재)가 문제입니다.
- 결론적으로 지혜는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욕망을 사명 아래에 정렬하는 능력이며, 이는 하나님 경외에서 비롯됩니다(지혜문학 전체의 큰 흐름).
주석
- “어린 왕”은 미숙한 통치를 대표하며, 분별 없는 충동과 권력의 방종을 암시합니다.
- “아침부터 잔치”는 하루의 첫 순서를 쾌락에 내어주는 상징으로, 공적 책임보다 사적 탐닉이 앞서는 우선순위 전복을 드러냅니다.
- “귀족의 아들”은 단지 신분을 칭송하기보다, 훈련된 성숙(품격, 절제, 책임감)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기력을 위하여”는 지도층의 소비가 백성을 위한 직무 수행(공공선)과 연결될 때 정당함을 시사합니다.
- “정한 때”는 지혜문학의 중요한 주제(때/시기/분별)와 맞물려, 리더십의 핵심이 타이밍의 분별임을 강조합니다.
- “취하지 아니함”은 단순히 술의 문제가 아니라, 탐닉과 과잉의 상태 자체를 거부하는 절제의 표지입니다.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감탄/탄식 표현은 지혜문학에서 경고의 무게를 지니며,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윤리적·섭리적 결과를 선포하는 기능을 합니다.
- “어리다”에 해당하는 개념은 단순 연령보다 미성숙(분별 부족, 경험 부족, 절제 부족)의 뉘앙스를 동반합니다.
- “정한 때”의 개념은 히브리 지혜 전통에서 때를 분별하는 능력(분별/절제/질서)을 상징하는 핵심 어휘장에 속합니다.
- “취하다”의 부정은 리더의 삶이 과잉과 탐닉에 지배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며, 절제가 곧 공적 책임의 보호장치가 됨을 보여 줍니다.
(헬라어-신약) 연결 원어 노트(참고)
- 본문 자체는 구약이지만, 신약의 지도자 윤리(절제, 분별, 단정함)와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절제(예: “절제함”의 덕목)는 지도자의 자격과 성도의 성화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이는 “취함”과 대비되는 성령 충만의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 따라서 전도서의 “취하지 아니함”은 단지 금욕적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춰 자신을 다스리는 성령의 열매로 확장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언
- 지도자의 우선순위는 공동체의 생명을 결정합니다.
- 절제는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살리는 질서입니다.
- 백성을 살리는 리더십은 결국 자기 자신을 십자가 아래에 두는 리더십입니다.
- 때를 아는 지도자는 공동체의 숨을 지켜 줍니다.
- 참 왕을 모실 때, 인간 지도자도 제자리를 찾습니다.
신학적 정리
- 하나님의 주권과 청지기직: 권세는 하나님께 속하며, 인간 지도자는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 타락과 권력의 위험성: 죄는 권력을 통해 쉽게 구조화되며, 지도자의 미성숙은 공동체 전체로 전염됩니다.
- 은혜와 성화: 지도자의 성숙은 기술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이며, 성령의 역사로 절제와 분별이 길러집니다.
- 그리스도 중심(구속사): 인간 왕들의 한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왕권과 십자가 통치로 수렴됩니다. 그리스도는 백성을 소모하지 않고 살리시는 왕이십니다.
주제별 정리
- 지혜: 하나님 경외에서 시작되는 현실 분별의 능력(목적·때·절제).
- 절제: 지도자의 사명을 보호하는 영적 방파제.
- 우선순위: “아침”이 드러내는 영적 질서(예배 vs 잔치).
- 공공선: 지도층의 소비와 결정이 백성의 유익을 향할 때 정당성을 얻음.
- 리더십의 열매: 지도자의 내면이 공동체의 문화와 윤리에 장기적으로 반영됨.
목회적 정리
- 지도자를 세울 때 능력보다 성숙, 매력보다 경건, 성과보다 성품을 우선해야 합니다.
- 지도자를 비난만 하거나 우상화하지 말고, 중보와 분별로 섬겨야 합니다.
- 지도자에게는 정기적인 자기 점검(우선순위/절제/동기)과 회개의 통로가 필요합니다.
- 공동체는 리더십의 문제를 개인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공동체의 영적 토양(진리 사랑, 경건, 정직)을 함께 세워야 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부터 나의 “아침”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말씀, 기도, 예배의 우선순위).
- 나에게 맡겨진 작은 권세(가정, 관계, 직무)에서 “백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결정하겠습니다.
- 나의 말이 사람을 지치게 했던 지점을 회개하고, 살리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 지도자를 위해 매주 구체적으로 중보하며, 필요할 때는 존중과 진실로 권면하겠습니다.
-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왕으로 고백하며, 십자가 통치의 방식(섬김·자기 비움)을 따라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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