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찬송을 잃지 않고 사는 길 (시편 22편 1-11절)

by 【고동엽】 2022. 12. 18.

찬송을 잃지 않고 사는 길 (시편 22편 1-11절) < 찬송을 잃지 않고 사는 길 >

 본문 1절에서 다윗은 힘들 때 “하나님! 왜 나를 버리고 멀리하고 돕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듯이 외쳤지만 자세히 묵상하면 이 외침은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담긴 외침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버림조차도 목적 있는 잠깐의 버림일 뿐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돕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돕고 있고 신음소리를 듣지 않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듣고 있습니다. 또한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응답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은 침묵하고 외면하셨지만 그 하나님의 침묵과 외면을 통해 벌어진 십자가 사건은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최상으로 충족된 지상 최대의 승리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침묵과 외면의 의미를 알고 고백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조금 전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고 외면한 것처럼 탄식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처럼 고난 중에도 찬송을 잃지 않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찬송을 잃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믿고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신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5절). 왜 성도는 역사를 배우고 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까?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그 가운데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특히 구원의 역사 속에 펼쳐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발견하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요새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마약에 손댄 사람은 무조건 총으로 쏴 죽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대단해졌지만 탈법만큼 초법도 나쁜 것입니다. 정당성이 결여된 개혁과 개발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성공주의’입니다. 잘살게 해줄 테니까 초법적인 독재를 용인하라는 전락된 가치관은 큰 후유증을 남깁니다. 성공주의자들은 독재자도 역사의 물결에 자신을 내맡긴 시대의 나이테이자 역사정신의 구현자라고 그럴듯하게 미화합니다. 그런 추한 역사의 미화가 또 다른 독재를 낳는 토양입니다.

 역사는 잠깐 힘 편에 서는 것 같지만 결국 정의의 편에 섭니다. 그래서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은 힘으로 정신의 가치를 왜곡하거나 억압하지 않습니다. 초법자가 탈법자를 무섭게 탄압하는 것은 어미 게가 옆으로 걸으면서 새끼 게에게 “앞으로 똑바로 걸어!”라고 회초리를 휘두르는 꼴입니다. 독재자들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일부분의 공로도 역사 미화의 수단이 되면 안 됩니다. 헤롯왕도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성공했지만 일시적인 성공이었습니다. 그런 독재자를 ‘실패한 인생의 본보기’가 아닌 ‘성공한 인생의 본보기’로 삼으면 안 됩니다.

 북한은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이라고 하지만 언젠가 김씨 정권이 무너지면 성난 군중들이 김일성의 동상을 다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나서서 김일성의 업적을 ‘공칠과삼’이라고 미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작업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잘못된 역사관으로 독재자를 미화하면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권을 무시하는 또 다른 독재자가 나옵니다. 역사의식도 없이 방관자로 살지 마십시오. 소리 나지 않는 은밀한 방식으로라도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바른 역사를 만들어가는 참여자가 되십시오.

 교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우를 돈벌이나 목적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교회를 무너뜨렸습니까? 그런 교회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목회자는 교인이 교우를 다단계 판매나 주식투자나 이자놀이로 끌어들이는 일이 없도록 사전교육을 잘 시켜야 합니다. 또한 돈이 급하다고 죽는 소리를 해서 정이 많은 교우가 돈을 꿔주기를 바라거나 교우를 사칭의 대상이나 청탁의 수단으로 삼는 등의 사심 있는 교우관계도 교회 내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잘 막아야 합니다.

 아라비아인들은 스승을 오아시스에서 다음 오아시스로 안내하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사막 길은 모래 바람으로 쉽게 변할 수 있기에 오랜 경험을 통해 길의 구조를 깊이 있게 파악한 사람의 인도를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인생길도 다양하게 펼쳐지기에 역사의식을 가지고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목회자가 목회성공을 위해 기복주의나 번영신학의 신기루로 교인을 이끌면 한국 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 종말 얘기, 귀신 얘기, 저주의 말 등으로 두려움을 심어 영혼을 종으로 만들어 이단왕국을 세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인이 많다고 바른 교회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기복주의의 길이 겉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기에 잠깐은 그쪽으로 사람이 몰릴 때도 많습니다. 그처럼 기복주의나 무속주의 같은 죽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기에 목회자는 교회사를 잘 알아야 하고 성도들도 교회사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의 역사적 교훈을 잘 인식해서 바른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의 길’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작업에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입으로만 열심히 내세우면서 자기 영광을 취하는 사람들도 멀리하십시오. 나쁜 목자와 나쁜 사람은 과감히 멀리하고 좋은 목자와 좋은 성도를 힘써 가까이하십시오. 바른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헛된 욕심을 버리면 바른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처럼 바른 믿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자기 영혼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십시오.

2. 자기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사람이 아닌 벌레처럼 비방과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6절). 사람들은 다윗을 보고 다 비웃으면서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받고 그를 기뻐하시니까 건져주실 거야.”라고 조롱했습니다(7-8절). 불신자들의 조롱은 성도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심한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신에 대한 확신과 뚜렷한 자기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대단하게 여기는 교만은 없어야 하지만 자기를 가치 있게 보는 자긍심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보고 원망과 불평과 한탄으로 살지 마십시오. 육체적인 약점이나 장애가 있다면 그것을 자기만의 개성으로 여기십시오.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는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자기만의 재주와 장기가 있습니다. 그 재주와 장기로 약점을 극복하며 살고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없게 하십시오.

 자신을 흙수저 인생으로 여기고 불행하게 생각하면서 금수저 인생을 증오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가문의 축복을 인정합니다. 바르게 사는 금수저 인생이라면 존중해주고 자신이 흙수저 인생으로 태어났다면 하나님을 붙잡고 신실한 금수저 가문을 만드는 거룩한 도전에 나서보십시오. 사람은 불행하게 태어났기에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한 도전을 포기하기에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가능성과 비전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비전과 사명과 목표를 뚜렷하게 가지고 자기를 힘써 준비시키십시오. 그러면 이별과 해고와 퇴직의 순간이 오히려 더 좋은 만남과 더 좋은 일터로 나아가는 순간이 됩니다. 평소에 잘 갖춘 존재가 되어 “해고되어도 좋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다.”라고 해야 복된 인생이 펼쳐집니다. 실력과 능력과 자세만 갖췄다면 사방에서 찾습니다. 결국 불안은 뚜렷한 자기인식과 자기비전과 자기의미를 가지지 못해서 생겨난 결과물입니다. 자기 가치를 인식하고 자기를 힘써 가치 있게 만들어 가야 자긍심도 넘치고 평안도 넘치게 됩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영국 런던을 방문할 때 세계적인 재벌이 방문한다고 영국 매스컴이 떠들썩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런던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그는 곧 공항 안내소에 가서 값싼 호텔을 찾았습니다. 안내원이 누추한 옷을 입은 헨리 포드를 알아보고 왜 값싼 호텔을 찾고 낡은 외투를 입고 다니는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헨리 포드가 말했습니다. “값싼 호텔에서 자도 값싼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헨리 포드입니다. 그리고 이 외투는 아버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것입니다.”

 바른 부자들은 비교적 검소하게 다닙니다. 이미 자기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어서 외적인 것으로 자기 가치를 나타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것으로 과시하려는 모습이나 사치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좋은 옷을 입거나 좋은 차를 탈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취향 차이를 인정해주십시오. 중요한 것은 자기 가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 외적인 것으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합니다. 부를 과시하지도 말고 반대로 가난을 과시하지도 마십시오.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여도 내면의 자긍심이 넘치게 하십시오.

 제 차는 11년 반을 탔습니다. 많이 낡았고 곳곳에 상처도 많습니다. 몇 개월 전에는 아내가 마트에 주차한 후 쇼핑을 하고 와보니까 심하게 긁혔습니다. 화물차가 긁고 간 흔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고치지도 않고 부끄러워함도 없이 잘 타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이 “내면이 알찬 인생으로 살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우습게 보여도 실제로는 우스운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인식하며 사는 내밀한 자기 가치 인식이 있어야 참된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가치 인식이 대단했습니다. 수시로 감옥에 갇혔지만 복음 때문에 갇혔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엄청난 자긍심을 가지고 살면서 왕과 총독에게조차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행 26:29). 그런 자긍심은 헛된 자존심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 가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자긍심에서 놀라운 영향력이 나타나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도 로마 황제의 가족들과 측근들까지 그의 영향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빌 4:22). 그처럼 뚜렷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살면 고난 중에도 찬송을 잃지 않습니다.

3.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모멸을 받아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9-10절). 그런 믿음을 가지고 다윗은 자신을 멀리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11절).” 당시 다윗이 처한 현실은 절망적인 현실이었습니다. 그 현실이 본문 12-18절에서 생생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자신의 고통을 묘사하고 자신을 칼과 개의 세력과 사자의 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한 후 바로 이어서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해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다고 고백합니다(19-21절).

 다윗은 절박한 자기 기도가 이미 응답될 것을 믿었습니다. 결국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는데 그 찬송 고백이 본문 22-31절에 나옵니다. 그 중에서 본문 22-23절 말씀을 보면 찬송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찬송이란 단순히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이란 주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높이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까? 곤고한 자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들으셨기 때문입니다(24절). 결국 그가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이 왜 자기 기도를 듣지 않으시냐고 한 것은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심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사전포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면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사실을 다윗이 자기 체험을 섞어 전한 다윗의 간증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 표현된 승리의 역사가 지금도 그대로 성도의 삶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비록 극심한 고난 중에 있고 인간적인 조롱을 받는 비참한 처지에 있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면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극적인 반전의 역사를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작년 말, 저보다 15살이 많은 저의 안수동기인 A 목사님이 만 70세에 은퇴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리더십의 변화 기간을 틈타서 일부 성도가 미국 법정에 선교비 횡령문제로 목사님을 고소한 것입니다. 뚜렷한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저 목사님이 열심히 선교하면서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선교지에 선교센터도 지어드리니까 “목사님이 딴 주머니를 찼을 거야.”라고 추측하고 고소한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가졌던 모멸감과 배신감은 매우 컸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공의가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미국 경찰이 샅샅이 뒤졌습니다. 마침내 밝혀진 것이 있었습니다. 너무 정직하게 썼고 진짜 헌신적으로 썼다는 사실이 오히려 밝혀진 것입니다. 미국에서 꽤 큰 이민교회를 담임했는데 자기 사례비 및 은퇴 적립금까지 각종 선교후원금으로 쓰는 바람에 은퇴할 때까지 자기 거처 하나도 마련하지 못한 사실이 오히려 밝혀져서 성도들이 오히려 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은혜 받은 한 성도가 뉴욕의 베이사이드에 집을 현찰로 사주는 극적인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 노후를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저희 부부가 만났을 때 A 목사님의 사모님이 제 아내에게 그 집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린이처럼 기뻐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의 헌신을 기억해주시고 영광의 면류관 대신 영광을 집을 주셨구나.” 하나님은 성도의 정직한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주시고 오해가 신뢰로 변하고 탄식이 찬송으로 변하고 단조의 구슬픈 노래가 장조의 활기찬 노래로 변하는 극적인 반전의 역사를 이뤄주실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