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의 역전인생 (누가복음 16장 19-31절) < 신실하신 하나님 >
편안과 평안은 다릅니다. 편안을 추구하면 평안이 뒤따르지 않지만 평안을 추구하면 편안이 뒤따릅니다. 제 경우에 아내의 평안은 목회의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며칠 전, 아내와 대화중에 아내가 재정문제로 걱정했을 때에 관한 얘기를 처음 꺼냈습니다. 22년 전에 첫째 딸을 낳고 “이제 분유 값과 기저귀 값을 어떻게 대지?” 하고 걱정했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걱정하다가 며칠 후 걱정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걱정할 일을 걱정하지 않으니까 평안할 수밖에 없고 평안 후에는 곧 편안이 뒤따랐습니다.
걱정할 일이 있어도 걱정하지 않으면 큰 걱정거리조차 작게 느껴집니다. 저도 큰 문제가 있으면 겉으로는 걱정하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아서 가족들도 잘 모르게 하지만 속으로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신기하게 해결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있었던 문제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걱정도 주변에 끼치지 않고 저절로 곧 사라지는 체험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얼마 전에도 큰 재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기도제목을 내놓지도 않아서 아무도 낌새를 몰랐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낌새를 몰랐지만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발행과 관련해서 상당한 재정적인 압박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마이너스 상황이 지속되면서 더 이상 재정조달이 힘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너무 힘드니까 직원을 줄이는 문제까지 심각하고 고려해야 할 상황이 되었고 더 나아가 월새기 발행을 중단하는 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두 딸의 대학 등록금으로 저축했던 재정도 끌어다가 월새기 발행비로 썼습니다. 첫째 딸이 지난 학기에 전액장학금을 받아 5백만 원 가까이 재정을 절약했지만 그 금액도 월새기 발행을 위한 한 달의 마이너스조차 한참 커버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은 제가 소속된 기독교 선교연맹(C&MA, 미국성결교)에서 설립한 대학인 뉴욕의 나약(Nyack) 대학을 다니면서 교단과 학교에서 나오는 장학금으로 등록금은 거의 안 내지만 기숙사비만은 다 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제일 물가가 비싼 뉴욕 지역에 학교가 있기에 기숙사비도 만만찮습니다.
이번 여름방학 기간에 둘째 딸이 종종 물었습니다. “아빠! 제가 이번 가을학기에 대학에 돌아갈 수 있어요?” 그때마다 딸이 걱정하지 않도록 밝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한나야! 아직은 아빠도 잘 모르겠다. 만약 월새기 재정이 부족하면 네 대학 공부보다 월새기 발행이 우선인 것 알지? 한국에 남을 수도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는 해라.” 그때 둘째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대학에 돌아가도 좋고 한국에 남아도 좋아요. 공부가 좀 늦어지면 어때요?”
지난 몇 달 간 그런 심각한 재정적인 문제가 있었어도 아무에게도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평안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실제로 이제까지 그런 믿음의 모험을 수없이 많이 겪었지만 하나님은 늘 신실하게 최선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성도는 힘들어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런 재정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니까 걱정과 불안에 빠질 일도 없고 주변에 걱정과 불안을 끼칠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펼쳐주시는 상황대로 나아가면 된다고 평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월새기 발행은 여전히 잘 진행되고 있고 발행권수는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둘째 딸이 뉴욕의 나약대학 기숙사에 들어가서 새 학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힘든 상황에서도 늘 극적으로 길을 열어주시는 것을 보면 너무 신기하고 너무 감사해요.” 지난 몇 달 동안 극심한 재정적인 문제가 있었어도 저는 여전히 평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손길로 적시에 길을 열어주셔서 곧 ‘편안’도 뒤따르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신실하신 하나님입니까?
살아가는데 물질이 요긴하게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문제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게는 하지 마십시오. 행복은 물질에 달려있지 않다는 말이 구호로만 그치지 않게 하십시오. 사실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물질문제로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힘들 때도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줍니다. 그처럼 힘들어도 하나님을 믿고 변함없이 섬김과 나눔의 길을 가면 어떻게 행복을 놓치겠습니까? 그런 삶만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은 곧 사라집니다. 참된 삶은 오히려 죽음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영원히 남는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삶뿐입니다(요일 2:17). 영원히 남는 삶을 살지 못하면 가진 것 같지만 가지지 못한 것이고 이룬 것 같지만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에 영원히 남는 삶을 살면 비록 가지지 못했어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역전의 때가 찾아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그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 부자와 나사로의 역전인생 >
한 부자가 매일 호화롭게 잔치를 즐겼습니다(19절). 그 부자의 대문 앞에는 거지 나사로가 심한 피부병에 걸린 채 누워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 부자가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로 배를 채울 때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나사로는 개조차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한 처지였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나사로는 비참한 처지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었지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습니다(22절). 부자는 죽어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고 나사로는 죽어 장사도 없이 초라하게 묻혔지만 죽음 후에 대 역전극이 일어나 부자의 영혼은 음부로 들어갔고 나사로의 영혼은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는 ‘사후의 중간상태’에 관한 언급이 비교적 뚜렷하게 나오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낙원과 음부는 천국과 지옥은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중간상태로서 낙원은 신자들의 영혼이 잠깐 거하는 곳이고 음부는 불신자들의 영혼이 잠깐 거하는 곳입니다. ‘중간상태에 관한 교리’는 인간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교리기에 신비의 영역으로 남기고 너무 깊이 파헤치거나 “내가 그 교리를 다 안다.”고 교만하게 나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사로는 비참하게 살다 죽었지만 아브라함 품으로 갔고 부자는 음부로 갔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극적인 역전인생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23절). 부자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사로를 보내 그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제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제가 불꽃 가운데서 괴롭습니다.”
그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절).”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은 사람은 죽어서 고통을 받고 반면에 살았을 때 고통을 받은 사람은 죽어서 위로받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까? 신실하게 살았는데 이 땅의 보상이 없어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하늘의 보상은 더욱 클 것입니다.
< 영혼구원에 힘쓰십시오 >
부자의 요청에 대해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서 서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되었다.” 죽을 때 결정된 각자의 처소가 죽은 후에는 결코 변경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 교리를 만들어 지상의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있는 사람을 위해 미사를 드리거나 헌금을 드리거나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하면 그가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낙원과 음부를 왕래하지 못하고 또한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지 못합니다. 죽기 직전에 심판을 면해보려고 믿음도 없이 자기의 전 재산을 좋은 일에 바쳐도 천국행과 지옥행을 뒤바꿀 수는 없습니다. 또한 죽은 부모를 위해 살아있는 자녀가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명당자리에 안치하고 기념사업을 하고 헌금을 많이 해도 죽은 사람을 음부에서 낙원으로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살아있을 때 힘써 전도하십시오.
특히 가족 전도는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부자는 극심한 고통 중에 가족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증거하여 그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27-28절). 이 장면을 보면 믿음을 가지고 천국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실감합니다. 천국을 사모하며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죽으면 천국 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사십시오.
한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남편 건강을 위해 생식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85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교통사고로 동시에 죽었습니다. 천국에 가니 천사가 섬겨주며 화려한 저택도 공짜로 주고 골프장도 마음껏 쓰게 했습니다. 하늘 뷔페식당에 있는 좋은 음식들도 다 공짜였습니다. 그 음식을 먹으면 살찌고 건강이 나빠질까봐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혹시 저칼로리 식당은 없나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쪄요.” 그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생식으로 천국에 너무 늦게 와서 크게 억울해했다고 합니다.
건강에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뱃속의 아이는 엄마 배가 가장 좋은 줄 압니다. 거기서 잘 놀지도 못하고 맛있는 것도 먹지 못하고 답답하게 있는데 뱃속의 아기는 거기가 제일 좋은 곳인 줄 알고 때가 되어도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열 달이 되면 나와야 되는데 나오면 죽는 줄 알고 나오지 않으려고 하니까 산모가 얼마나 고생합니까? 그처럼 세상이 좋은 줄 알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천국에 가면 “왜 이곳에 오지 않으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나?”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해 생명을 단축시켜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뜻에 항거하는 최악의 살인입니다. 열심히 살려고 하되 구원받은 성도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힘써 구원의 복음을 전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을 열심히 찾아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믿는 일’과 ‘믿게 하는 일’입니다. 부자처럼 자기만 위해 살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것은 나중에 다 놓고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영혼구원과 세상변화의 도구로 삼으십시오.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 자기 다섯 형제에게 전도해달라는 요청을 듣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안 된다. 네 형제가 있는 마을에도 모세와 선지자들과 같은 전도자가 있지 않느냐?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평범한 전도자의 말을 들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던 나사로가 가서 전하면 그 기적을 보고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아니다. 땅에 있는 전도자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 자는 죽었다가 산 자가 가서 전해도 복음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전도자의 말씀을 듣고 믿지 않으면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목격해도 그 기적으로 참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자는 나사로가 부활해 그의 다섯 형제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 구원의 믿음이 생길 줄 알았지만 아브라함은 전도자들의 말씀을 받지 않으면 기적적인 체험을 앞세워도 구원의 믿음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어도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믿음을 줄 것 같지만 기적적인 현상에 연연하면 오히려 기적이 내포한 진리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현실이 막히면 곧 믿음도 잃게 되기에 아브라함은 부자의 기적 요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신기한 기적을 보는 것보다 훨씬 복된 것입니다. 기적은 영적인 호기심을 유발시키며 믿음을 모방하게는 만들지만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기적보다 말씀이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 죽음 이후를 준비하십시오 >
부자와 나사로의 역전인생 드라마를 보면서 인생의 성패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낍니다. 부자는 살았을 때 이름 꽤나 날렸을 것입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누구도 그 이름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부자의 이름이 없이 그저 ‘부자’라고 기록되었지만 나사로의 이름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은 둘의 인생이 역전되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해도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나사로는 찬란하게 그 이름이 기록되었지만 부자는 이름을 전혀 남기지 못하고 영원히 잊혔습니다. 결국 나사로가 진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름을 남기지 못해도 하나님의 생명책에는 이름을 남기십시오. 그런 역전 인생을 꿈꾸며 천국을 준비하며 사십시오.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약 7년 전에 어머님 몰래 LA 시내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로즈힐에 부부 묏자리를 사 놓으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안쓰럽고 착잡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주님 재림 때까지 사후에 누워 계실 곳으로 마련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삶의 안정감을 느끼셨습니다. 죽어서 누울 묏자리 준비를 해도 안정감을 주는데 죽어서 주님을 기쁘게 만날 준비를 하면 얼마나 더욱 안정감이 생기겠습니까?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한 성당의 3개 문에는 각각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첫째 문에는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부자로 있는 세월은 잠깐입니다. 둘째 문에는 “모든 고난도 잠깐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나사로로 있는 세월도 잠깐입니다. 셋째 문에는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글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 문제다.”
죽음 이후의 준비가 없다면 세상의 승리와 성취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문제입니다.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잘 준비하십시오. 부자가 되는 것이나 승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을 준비함으로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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