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따라 살라 (요한복음 6장 41-58절) < 진리를 따라 살라 >
구원의 은혜는 공짜지만 축복의 은혜도 공짜는 아니다. 믿음을 공짜로 무엇을 얻게 하는 방편이나 도구로 여기지 말라. 구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사람이 치를 수 없는 대가를 하나님이 대신 치른 셈이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공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은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면 공짜의식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다. 죄인을 사랑해서 구원하고 싶어도 그냥 구원하면 공의가 무너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대가를 대신 치러 공의를 충족시킴으로 그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죄인을 구원하셨다. 결국 ‘공의’와 ‘공짜’는 반대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으려면 공짜의식을 버리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거두는 것’보다 ‘심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 공짜의식을 버리고 열심히 심어야 거둘 것이 많아진다.
모든 삶의 기준인 성경 말씀 중 개인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대표적인 말씀 중의 하나가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지 않고 거두려는 공짜의식의 삶은 스스로 속이는 삶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삶이다. 하나님은 ‘공짜의 하나님’이 아니고 ‘공의의 하나님’이다. 사랑과 친절과 땀을 내세워 심는 데 주력하라. 공짜로 무엇을 주고 속성으로 무엇을 해주겠다는 말에 너무 기대지 말라. 땀이 생략된 축복을 멀리해야 진리가 가까워진다.
요즘 사실인 팩트(fact)와 거짓인 페이크(fake)의 싸움이 치열하다. 많은 법정 다툼도 팩트와 페이크의 싸움이다. 잘 모르면서 페이크를 팩트로 알고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실을 알면서도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팩트 대신 페이크를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손해가 예상되어도 최대한 진실해야 한다. 특히 영혼을 삼키려고 진리를 막고 왜곡하는 사탄의 작업이 늘 있음을 깨닫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힘쓰라.
< 진리를 막는 태도 >
오병이어의 기적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이다. 그 기적으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로 인정해서 따르기보다는 먹고 배불렀기에 따랐다. 그 무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떡과 피’에 관한 말씀을 32-58절까지 했다.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을 듣고 대속의 피를 믿으라는 비유인데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서 많은 제자들이 물러가고 12명 제자만 남았다. 왜 당시 무리들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는가? 그들의 무엇이 진리를 막았는가?
1. 수군거리는 말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렸다(41절).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다.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43절).” 혼자 생각하면 비교적 냉정하게 진리를 성찰할 수 있지만 같이 수군거리면 분위기에 휩쓸려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뒤에서 불의하게 수군거리며 사람 마음을 분리시키는 것은 비겁한 일이고 결국 공동체를 아주 어렵게 만든다.
서양영화를 보면 정정당당히 총으로 결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로 등지고 열 발자국 후에 돌아서서 쏘자고 하면 그대로 목숨 걸고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악인은 열 발자국 전에 돌아서서 상대에게 총을 쏘면 심판관이 군중들 앞에서 그를 즉시 쏴 죽이고 그의 이름은 그 사회에서 영원히 추한 이름으로 기억된다.
뒤에서 상대를 악한 말로 쏘는 일이 인간사회에는 많다. 심지어는 교회나 교단에서도 있다. 정정당당히 진실로 경쟁하려고 하라. 하나님은 불의한 수군거림과 거짓 모함을 싫어하신다. 물론 남에 대한 말을 전혀 안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최대한 오래 참았다가 하라.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수군거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과 행동에서 최대한 선한 씨를 뿌릴 때 선한 열매가 맺어진다. 복된 인간관계를 원하면 사랑의 씨를 뿌리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원하면 복음 전파에 힘쓰고 진리와 가까워지려면 최대한 참된 말을 하라.
2. 외적인 판단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정을 전부터 잘 안다는 것 때문에 진리를 외면했다(42절). 외면만 보고 외면하면 진리는 멀어진다. 사람을 겉모습이나 과거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라.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외면만 보고 판단하면 진리도 멀어지고 행복도 멀어진다.
내면과 외면을 다 갖추면 금상첨화지만 둘 중에 하나를 보고 선택해야 하면 내면을 보고 선택해야 미래가 좋아지고 행복해진다. 왜 많은 인도인이 키가 작고 못난 테레사 수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는가? 인종과 종교와 나라를 초월해 수많은 인도 영혼을 품은 그녀의 아름다운 내면 때문이었다. 내면이 잘생긴 사람이 진짜 잘생긴 사람이다. 진리와 축복은 내면을 중점적으로 보고 과감히 선택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저도 두 딸이 내면과 외면을 다 갖춘 청년과 결혼했으면 좋겠지만 둘 중에 하나를 보고 선택해야 하면 내면을 보고 선택하라고 수시로 교육한다. 만약 두 딸이 외면이 부족한 배우자를 선택해도 딸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한 식구가 되면 사위에게 인물의 길을 가도록 거룩한 꿈과 비전을 계속 도전하고 격려하면서 부족한 점을 함께 채워 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면을 보고 선택하는 그 마음을 보시고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실 것이다.
3. 냉소적인 질문
요한복음 6장을 보면 무리들의 질문이 너무 많다. 적절한 질문은 분위기 전환에 도움을 주지만 집요한 질문은 진리를 알려는 구도자적인 질문보다는 자기 뜻을 드러내고 자기 지식을 과시하려는 질문일 때가 많다. 마음속에 이미 반대할 것을 작정한 채 하는 질문이나 먼저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없는 질문은 진리를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진리도 들음에서 얻어진다. 배움의 기초 자세는 질문 이전에 먼저 진지하게 들으려는 자세다.
냉소적인 질문도 문제지만 내면에 감춰진 냉소적인 생각과 태도도 문제다. 어떤 성도는 겸손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목회자의 사랑과 진실을 신뢰하지 않고 냉소한다. 오래 전에 어떤 목회자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어떤 성도는 책을 멀리한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는 다 위선자라는 것이다. 글과 삶이 다르다는 편견 때문이다. 작가가 그 글을 쓰려고 사물과 상황을 관조하고 자기를 성찰했던 사색과 묵상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결국은 냉소도 패망의 선봉이다.
믿음은 신기한 체험에서나 인생의 의문에 대한 논리적이고 적합한 답변에서 나기보다 들음과 배움에서 나기에 먼저 잘 듣고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진리가 자기 것이 된다. 겸손한 마음으로 과거의 자기 공로와 업적은 물론 상처도 잘 잊고 잘 배워서 치우침과 편견과 냉소를 버리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옳은 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갖출 때 은혜와 진리의 체험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4. 감사의 부재
하나님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사람은 스스로 축복과 구원의 자리로 갈 수 없다(44절).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의 손길로 내 모든 삶을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내 생명이 유지되고 가정에 큰 탈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진리도 깊이 깨달아진다. 이런 고백을 수시로 하라. “하나님! 건강의 은혜를 주시고 좋은 가족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와 좋은 만남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고 무엇인가에 속박된 채 신경쇠약에 걸겨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자유를 만끽하며 주일마다 예배하고 봉사하며 살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는 후일에 가서 깨닫게 될 것이고 천국에 가서는 더욱 깨닫게 될 것이다. 평범한 것에서 비범한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바르게 생각할 수 있고 이단에 빠지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또한 좋은 교우와 좋은 교회를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어떤 일이 잘되는 것도 행운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이뤄진 것이다.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도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좋은 것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이렇게 고백하라. “하나님!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한 시도 살 수 없고 더 나은 존재로 변화될 수도 없다.
5. 말씀의 무지
당시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 예수님이 “내가 줄 떡은 내 살이다(51절).”라고 했을 때 조금만 생각해도 영적인 메시지임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했다(52절). 이 장면을 보면 말을 잘 듣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말은 얼마든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 점을 늘 이해하고 대비하면서 인간관계를 하라.
말을 잘 듣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비성경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을 영해라고 주장한다. 참된 영해란 신기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영해는 ‘사랑의 이해’다. 영해는 이해하기 힘들 때도 이해하고 용서하기 힘들 때도 용서하는 것과 같은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삶 속에 잘 적용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성경 지식이 많고 은혜를 많이 받아도 시험에 들면 그 지식과 은혜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실제로 몇 단계 성경공부를 이수하고도 교회생활을 잘 못하고 이단이나 파당에 휩쓸려 교회를 떠날 때도 많다. 그러나 꿈과 비전을 공유하고 말씀의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적용을 미리 잘 배우면 시험에 들어도 웬만하면 교회를 잘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적절한 때에 다시 교회 사랑을 회복하고 일어선다. 말씀을 잘 이해하면서 적용과 실천까지 잘하면 점차 진리가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6. 정욕의 추구
당시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든 것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 그 사실은 정욕적인 추구를 버려야 진리가 깨달아진다는 암시다. 진리에 가까워지려면 무엇을 얻으려는 마음보다 소중한 일에 자신을 드리려는 마음을 늘 앞세우라. 또한 무엇이 채워지기를 원하면 그 전에 먼저 자기를 드리는 일부터 잘하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세상의 떡을 원하는 사람’과 ‘생명의 떡을 원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세상의 떡을 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바로 이어서 생명의 떡 얘기를 하자 무리들은 “그 말씀은 듣기도 어렵고 따르기도 어렵다.”고 하며 대부분 떠나갔다. 그때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영생의 말씀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그때 그 제자들은 진리를 꼭 붙잡았기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지금 세상은 점점 정욕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런 세상과 동화(conform)되지 말고 세상을 변화(transform)시키라. 세상적인 행복의 조건을 추구하면 행복은 내 손에 잡힐 듯 하다가 잡히지 않으면서 계속 세월만 흐른다. 반면에 예수님을 참된 진리의 실체로 삶과 마음의 중심에 모시면 세상적인 조건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추구할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살면서 기적의 떡을 찾기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진리 안에서 버릴 것을 과감히 버림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참된 축복의 열매를 많이 거두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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