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한 사람 (로마서 15장 8-9절) < 세상을 바꾸는 한 사람 >
미국에서 야구는 가장 백인 중심적인 스포츠였습니다. 1883년 미국 메이저리그에 최초의 흑인 선수가 등장했지만 그 후 60여 년 동안 흑인들은 주로 니그로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그 인종차별의 높은 벽이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의 등장으로 깨졌습니다. 흑인 야구선수 로빈슨의 등장은 미국 사회와 미국인의 인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빈슨은 고등학생 때부터 만능 스포츠맨이었습니다. UCLA대학에서는 야구, 미식축구, 농구, 육상의 네 종목에서 최고 선수로 뽑혔습니다. 1942년에는 군 장교를 지원했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될 뻔했지만 복싱 챔피언 출신 조 루이스의 도움으로 장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한번은 버스에서 뒤의 흑인 자리로 이동하라는 백인 여성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습니다.
전역 후 니그로리그에서 선수로 뛸 때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Branch Rickey)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리키는 인종문제에 엄격했던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죽자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 때가 왔다고 여기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리키는 실력과 함께 백인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학력과 인성과 어떤 모욕과 비난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갖춘 선수를 원했는데 그가 바로 UCLA대학과 장교 출신이었던 스포츠 천재 로빈슨이었습니다.
로빈슨은 1946년에 마이너리그에서 그는 타율과 득점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면서 리그 MVP가 되었고 1947년 4월 15일 드리어 메이저리그 무대에 섰습니다. 26000여명의 유료 관중 중 절반이 넘는 흑인들이 그의 첫 출장을 보려고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개막 전부터 몇몇 선수들이 로빈슨과 함께 경기에 뛸 수 없다는 탄원서를 내는 등 시련도 많았습니다.
원정 때는 더 힘들었습니다. 협박도 많이 받았고 숙소도 따로 써야 했습니다. 신시내티와의 첫 원정 경기 때는 관중들의 심한 야유를 받았습니다. 그때 다저스의 주장이었던 유격수 리즈가 1루에 있던 로빈슨에게 가서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방긋이 웃은 뒤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야유로 가득 찼던 경기장이 고요해졌습니다. 그 후 로빈슨은 무수한 시련을 극복하고 은퇴한 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나중에는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이끄는 흑인 민권운동에도 동참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재키 로빈슨의 데뷔 50주년인 1997년 그의 등번호 42번을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2004년부터는 그가 데뷔했던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했고 2007년에는 켄 그리피 주니어가 재키 로빈슨 데이 때 42번을 달고 뛰고 싶다고 요청한 것을 계기로 2009년부터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4월 15일에는 42번을 달고 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물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느낄수록 인물의 꿈을 새롭게 하고 소망의 하나님을 붙잡고 나아가면 변화의 역사는 시작될 것입니다.
<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
본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죄악 많은 세상이기에 어디서나 차별은 존재합니다. 사람간의 우열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짜 우월적인 인격과 위치에 있으면 차별할 필요가 없어서 남을 잘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차별적인 언행이 나타날까봐 조심합니다. 훌륭한 리더나 기업가는 더욱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외모나 출신이 아닌 성품과 능력을 보고 써야 선한 영향력을 오래 미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차별하면 망하는데 망하려고 차별합니까?
차별하는 것은 내면에 있는 열등의식의 표시입니다. 차별 프레임을 남에게 덧씌워 자기 열등감을 감추려다가 더 드러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종감정이나 지역감정의 근본 원인 중의 하나도 열등감입니다. 꿀리는 게 많아 잠재된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해 특정 집단을 일반화시켜 매도함으로 자기를 높이려는 시도가 그런 편향적인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꿀리는 게 없으면 그런 감정에 편승해 자기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좋은 리더는 불순종과 무책임과 게으름이 배인 사람은 분별해내지만 사람을 일반화시켜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차별과 분별은 크게 다른 것입니다. 차별은 무분별입니다. 분별할 줄 알면 차별하지 않습니다. 좋은 리더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지만 분별력은 탁월합니다. 분별력을 기르되 차별하지는 마십시오. 바른 인격자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인격 지수가 낮아 내면에 차별하는 마음이 있어도 대개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도 부끄러운 줄 알기 때문입니다.
나쁜 정치권력이 조직적인 차별 프레임을 씌워도 정상인은 차별적인 언행을 노골적으로 표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터넷에서는 익명으로 그런 언행을 노골적으로 나타냅니다. 익명의 댓글은 자기 인격 지수를 그대로 나타내줍니다. 열등감은 차별 프레임을 씌워 집단을 매도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거기서 편향적 감정도 생깁니다. 결국 일반화를 통한 편향적 감정의 표출은 열등감의 표출입니다.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차별 프레임을 씌워서라도 자기를 높이려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능력과 성품으로 자기를 높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미국에서는 중상류층 백인들보다 하류층 백인들이 흑인에 대한 차별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합니다. 하류층 백인의 가난과 실업의 책임은 1차적으로 흑인이나 동양인에게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무분별과 무책임과 게으름을 탓하기보다 편견과 딱지붙이기와 프레임 씌우기를 통해 차별로 자위하는 것입니다. 비천함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려는 성향과 열등감의 표출로 남을 차별하면 점차 분별력 있는 사람에 의해 오히려 자신이 고립되고 경멸받습니다. 그것이 독일의 나치, 미국의 KKK, 요즘 한국의 ‘일베’가 경멸받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열등감이 내재된 존재이기에 어디서나 차별을 꾀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로빈슨처럼 차별의 틀에 매이지 않고 강한 멘탈로 차별적인 세상을 극복해내는 것입니다. 그처럼 차별의 틀에 매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따라 ‘베들레헴 예수’라고 하지 않고 자라난 곳을 따라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까? 성도는 적어도 지역감정이나 나치의식이나 일베의식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 남서쪽의 해발 433미터에 위치한 산촌으로서 당시에 차별받고 천대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 “나다나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는데 나사렛 예수란 분이야.” 그때 나다나엘이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러자 빌립이 편견을 버리라는 의미로 “와서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자 열등감에 젖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무리 중에 논쟁이 벌어져 예수님이 참된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란 말이 들리자 어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그런 논쟁 중에 의로운 바리새인으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하며 말했습니다. “의장! 사실을 제대로 알기 전에 심판부터 하면 됩니까?” 그때 교권주의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출신이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갈릴리에서도 선지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역편견 때문에 진리의 예수님을 놓친 인생 최대의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편견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보는 눈이 어두워집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란 사실이 얼마나 위로와 소망이 됩니까? 눈물 많은 세상에서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예수’가 아닌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로 인해 큰 소망과 위로를 얻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머십시오. ‘연약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하는 지렛대’와 같습니다. 그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가엽게 여김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십시오. 하나님은 자녀를 차별 없이 품는 ‘어머니’와 같고 물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어머니와 바다는 속성이 유사해서 한자의 ‘바다 해(海)’ 자에 ‘어미 모(母)’ 자가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진실한 성도는 사람의 차이는 인정하되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내가 가는 곳마다 나 때문에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약자의 눈물과 상처를 헤아릴 줄 모르면 믿음의 축제 후에 남은 것은 허전함뿐입니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셨던 예수님처럼 약자를 환대하고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말고 편견을 버리십시오. 차별과 편견을 버리면 세상과 사람이 바로 보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도 바로 보이면서 생각을 초월하는 복된 삶도 눈앞에 보일 것입니다. 동시에 변화하는 세상에서 뒤처지거나 도태되지 않고 집단지성과 시대정신을 선도하게 될 것입니다.
< 최선의 인생을 꿈꾸십시오 >
한때 성공했어도 과거의 패러다임만 고수하면 실패하거나 도태하기 쉽습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목회자가 각 가정을 방문하는 심방이 중요했습니다. 그때는 목회자가 심방을 자주 하고 때로는 갑자기 성도 집을 찾기도 하면서 성도 가정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까지 알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목회자의 잦은 심방이 사랑이 많은 징표였고 목회자의 방문을 천사의 방문처럼 여겼습니다. 요새는 그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남을 갑자기 찾아가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자기 교인이라도 갑자기 찾아가는 것은 사려 깊은 모습이 아닙니다.
한 목회자는 심방을 좋아해서 수시로 성도들의 집과 일터를 방문하니까 성도들이 부담스러워하다가 나중에는 힘들어했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목사님이 너무 눈치 없이 찾아오신다. 예배 때 은혜 받고 힘을 얻고 싶은데 너무 돌아다니시면서 말씀 준비에 소홀하시다.”고 불평했습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시간계획에 따라 기도하고 묵상하고 말씀을 준비하는데 사전 연락도 없이 갑자기 누가 찾아오면 곤란하고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그 목사님은 목회를 그만두고 지금은 심방이 많이 필요한 특수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옛날에 교회건축은 비전의 확장 및 성장에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습니다. 교회를 웅장하게 건축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후 380년에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부터 2000년까지 1620년 동안 그 원리는 거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가 되고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교회건축이 교회성장을 이끄는 철옹성 원리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요새 교회건축이 꼭 필요했던 경우 외에는 건축해놓고 비어가고 심지어는 이자를 내지 못해 건물이 넘어가는 교회도 점차 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건물에 들어가는 이자 부담 때문에 최근에 “힘들어서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 한번 잘못했다가 목회자가 어떻게 자살 얘기를 하느냐고 교인들이 들고 일어나 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주일에 하루 쓰고 주중에는 텅텅 비워놓는 건물을 몇십 억 이상 들여서 크게 올리는 것이 콘텐츠를 중시하는 지금의 시대상에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전국 곳곳에 비어가는 교회, 학교, 병원 건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 건축에 나섰다가 비전도 무너지고 영적인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 상황을 보면서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문서선교 사역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약 2달 전 교회와 문서선교 사역 연혁을 정리하다가 마음에 강렬한 소원이 생겨 <월새기 영어판> 창간호를 <월새기> 창간 5주년이 되는 2019년 9월에 발행하기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습니다. 재정이나 인력이나 후원 면에서 거의 준비된 것이 없지만 그렇게 강한 소원이 생기게 된 것은 지난 3년 간 <월새기> 말씀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은혜 받고 변화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책 1권을 천 원에 공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정을 건물에 묻어두지 않고 문서선교에 풍성하게 사용하니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무수히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면서 <월새기 영어판>을 통한 세계선교의 비전을 더욱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분당 인근에 큰 교회건물을 지어놓고 이자를 내지 못해 허덕이다가 결국 건물이 넘어가버리는 모습들을 많이 보면서 마음이 씁쓸합니다. 그런 건축 재정보다 훨씬 적은 재정으로도 <월새기 영어판>을 발행해 전 세계에 있는 무수한 영혼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이끌 수 있으니 얼마나 영적인 효율이 큽니까?
어떤 사람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목사님이 뭘 믿고 <월새기 영어판> 발행날짜 목표까지 세우나?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닌가?” 그러나 <월새기> 발행 사역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은밀한 후원자의 손길을 통해 3개월 만에 창간호를 발행하고 지금까지 약 3년 간 은혜롭게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으면 자연히 은혜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신실하게 콘텐츠만 잘 준비해놓으면 하나님께서 은혜 받은 또 다른 은밀한 후원자를 보내주셔서 <월새기 영어판> 발행도 가능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지난 3년 간 뿌린 <월새기> 말씀의 씨가 헛되지 않아서 문서를 통한 세계선교의 비전을 향해 멋지게 이륙할 날이 조만간 올 것입니다. 번듯한 건물도 없는 작은 교회가 세계를 대상으로 복음전파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도전이 됩니까? 콘텐츠만 잘 준비하면 그런 멋진 일을 누구나 해낼 수 있습니다. 찬란한 꿈을 품으십시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고 소프트웨어보다 콘텐츠가 중요합니다. 자기 콘텐츠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계획해 두신 찬란한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인생을 그냥 순응하며 살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현실에 순응하는 삶은 찬란한 꿈을 파괴하고 삶의 목적을 깨뜨리고 삶을 정체시킵니다. 현재 위치에 자신을 한정시키지 마십시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현재의 일터에서 자리를 유지하는 것 정도로 끝내지 말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사장이나 회장의 꿈도 가져보십시오.
지금도 사탄은 수시로 다가와 속삭입니다. “아무개야! 네 모습을 봐라. 너무 나이가 많다. 이제 기회는 다 지나갔다. 헛된 꿈을 품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늦었다고 여기지 말고 새롭게 시작해보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소망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잉태시킨 꿈과 비전을 낙태시키지 않고 우리의 나머지 인생(the rest of life)을 최선의 인생((the best of life)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늘 붙들고 최선의 인생과 최상의 미래를 꿈꾸고 만들어가는 ‘세상을 바꾸는 한 사람’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에 대한 4대 정의(1) (히브리서 4장 12-13절) (0) | 2022.12.24 |
---|---|
자기 비우기 (0) | 2022.12.24 |
하나 됨을 지향하라 (0) | 2022.12.24 |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십시오 (사무엘상 23장 15-18절) (0) | 2022.12.24 |
남은 자의 하나님 (로마서 11장 1-12절) (0) | 2022.12.24 |
댓글